세계가 예측 불가능한 무차별적 테러로 몸살을 앓고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 벌어진 테러들을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5년여 전 발발한 시리아 내전에 닿게 된다. 시리아 내전은 ‘아이들의 정치적 낙서’라는 아주 우연한 사건으로 시작되었다.
엉킨 실타래의 시작점을 찾아가야 테러의 본질을 알 수 있겠다고 생각해서 이번 연재를 하게 되었다. 2011년 현장 방문 기록을 바탕으로 면담, 전화 통화, 소셜 미디어 등까지 활용해서 다시 취재했다.
이번 연재에는 시리아 주민 107명의 목소리를 담았다. 인터뷰 대상자 가운데는 현재 난민이 되어 터키나 유럽에 체류 중인 사람들도 있다. 연재는 격주로 실을 예정이다.

 

2011년 중동에서는 ‘재스민 혁명’으로 불리는 ‘아랍의 봄’ 혁명이 들불처럼 번져갔다. 튀니지를 시작으로 이집트, 예멘, 리비아까지 아랍의 독재국가들이 줄줄이 시민의 시위로 무너졌다. 인터넷과 위성방송도 단단히 한몫을 했다. 중동에서 휴대전화가 보편화된 것은 이라크 전쟁 이후다. 사업자들이 앞다퉈 이라크에 진출하면서 인근 아랍 국가들로까지 휴대전화가 급속히 퍼진 것이다. 기지국 하나만 세우면 되는 휴대전화는 유선전화보다 인기가 높았다. 안테나 접시를 다는 것으로 수신 가능한 위성방송도 덩달아 성행하게 되었다. 재미없고 딱딱하며 종교 색채가 짙은 국영방송만 보던 아랍인들은 이렇게 서방 문화를 접하게 되었다. 청바지와 짧은 치마도 신기했지만 대통령을 임기제로 뽑는 민주 절차는 더욱 매력적이었다. 시리아 남부 도시 다라에 사는 청년 아하마드 사르프 씨(24)는 “위성방송에서 프랑스인들의 파업과 시위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프랑스 정부는 그 사람들을 가두거나 죽이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아하마드 씨 이외의 시리아인들도 지금은 나라 밖이 얼마나 다른지 안다.

ⓒAP Photo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의 퇴진을 촉구하는 시위.

다라는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에서 약 100㎞ 떨어진, 요르단과 국경을 마주한 곳이다. 2011년 3월 초 이 마을의 청소년 15명이 장난삼아 담벼락에 낙서를 했다. 내용은 “시리아 국민은 정권의 전복을 원한다!”였다. 당시 아랍의 각 나라에서 유행하던 구호다. 아이들은 인터넷과 위성방송 뉴스 채널에서 주워들은 대로 아무 뜻 없이 적어놓은 것이었다. 시리아 비밀 사복경찰은 아이들을 신속히 잡아들였다.

‘무카바라트’라 불리던 비밀 사복경찰은 시리아에서 공포의 대상이었다. 놀란 부모들은 경찰서와 관공서로 몰려가 ‘철부지들의 장난일 뿐이니 석방해달라’고 탄원했다. 다라에 살던 주민 아미드 씨(32)는 그때를 생생하게 기억한다. “아이들이 이미 죽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더 많이 잡혀갈지도 모른다고 했다. 집집마다 아이들 입단속을 하느라 비상이 걸렸다.” 부모들의 탄원은 시위로 발전했다. 그날이 3월15일이었다. 마을 사람들 고작 100여 명이 벌인 시위가 기나긴 시리아 내전의 시작일 줄은 아무도 몰랐다.

ⓒAP Photo시리아 다라 시에 배치된 보안군이 주민에게 총을 겨눈 모습
ⓒAP Photo길거리에 널브러진 시신을수습하는 장면

 

첫 시위 한 달 뒤인 4월15일, ‘시리아 다라 청년그룹’이라는 블로그에 아부칼릴이라는 사람이 정부에 대한 요구사항을 올렸다. 정권 교체 및 언론의 자유, 최저임금 보장 등 20여 가지 내용이었다. 이 게시물은 페이스북과 트위터에 공유되어 시위 현장의 구호로 제창되었다. 전직 시리아 경찰인 알리 씨(45)는 “시위 현장에 나갔다가 깜짝 놀랐다. 이전의 시리아에서는 시위가 거의 없었다. 사람들이 모일 수 없게 사복 비밀경찰이 미리 단속했기 때문이다. 시위 경험도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저렇게 한마음이 되어 구호를 외치는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시리아 관영방송은 시위가 시작된 지 한 달 정도 지나서야 ‘외부 무장 테러단체가 국민들을 선동하고 있다. 정부가 곧 진압에 들어간다’라는 내용을 방송하기 시작했다. 모든 언론이 같은 내용을 보도했다. 하지만 시리아인들은 이미 인터넷과 위성방송을 통해 서방 언론을 접하고 있었다. 다라 주에서 자동차 정비업을 하는 주민 아하메드 씨(54)는 “시리아인들은 부족 단위로 모여 산다. 마을 구성원이 거의 친인척이다. 외부 사람(무장 테러단체)이 시위대에 끼면 모를 리가 없다. 아무도 보도를 믿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마침내 그해(2011년) 4월18일, 시리아 보안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다. 그 자리에서 4명이 사망했다. 시리아 내전의 공식적인 최초 사망자들이다. 같은 달 23일에도 보안군의 발포로 11세 소녀 등 15명이 숨졌다. 시위대는 부상자와 함께 인근 모스크로 피신했다. 그날(4월23일) 보안군은 알오마리 모스크에 총탄을 퍼부었다. 물대포와 고무탄에 폭탄까지 동원됐다. 심지어 희생자 장례식에 참석한 조문객에게 발포해 20명이 숨졌다.

여론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바샤르 알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은 일련의 유혈 사태에 대한 책임을 물어 다라 시장을 해임했다. 또한 아버지 하페즈 알아사드 대통령에서 자신에 이르기까지 48년 동안 유지해온 국가비상사태법을 폐지했다. 국민을 억압하던 대표적인 악법이 사라졌다는 소식이 인터넷을 통해 삽시간에 퍼졌다. 시리아에도 봄이 오는 듯했다. 하지만 이 기대는 불과 하루 만에 무참히 깨졌다. 시리아 정부는 국가비상사태법 철폐 바로 다음 날 또다시 시위대에 무차별 발포했다.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갔다. 배신감을 느낀 국민들의 시위는 다라를 넘어 시리아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무차별 발포와 강경 진압, 구금과 고문은 날로 심해졌다. 그럴 즈음 유튜브에 충격적인 영상이 올라왔다. 정부군에 사살된 시신 수십 구가 길거리에 방치된 장면이었다. 시리아 시민들이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통해 가려졌던 진실을 폭로하기 시작한 것이다.

ⓒREUTER2011년 6월 시리아 어린이들이 시리아 보안군에게 숨진 13살 소년 함자 알카티브를 추모하고 있다.


2011년 6월, 유튜브에는 13세 소년의 참혹한 시신 모습을 담은 2분30초짜리 동영상이 게재되었다. 그의 이름은 함자 알카티브. 함자는 2개월여 전인 같은 해 4월 말, 다라에서 가족과 함께 시위에 참여했다가 실종된 초등학생이었다. 다라의 병원 의사인 자파리 씨(37)는 소년의 시신을 직접 살펴봤다. “살아 있는 동안 엄청난 폭행을 당한 것으로 보인다. 시신이 온통 보라색 피하출혈로 뒤덮여 있었다. 다리엔 총탄을 여러 발 맞았다. 함자를 고문한 사람들은 자식도 없단 말인가. 악마다.”

함자의 죽음은 시민들의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그 분노가 시리아 내전의 끝을 알 수 없게 만들었다.

시리아 내전의 또 다른 이유는 바로 경제 문제

시라아인들의 분노가 폭발하기 시작한 2011년 4월 어느 날, 검은색 아바야(머리에서 발끝까지 덮는 이슬람 고유 의상)를 입은 여성 수천명이 시리아 북서부를 연결하는 고속도로 한가운데서 연좌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이슬람권인 시리아에서 여성들이 모여 정부에 뭔가를 요구한 첫 사건이었다. 대부분 가정주부인 이들의 요구는 간단했다. 빵 값을 내리라는 것. 주부들은 경찰에 끌려가면서도 울부짖었다. “아이들을 굶겨 죽일 수는 없다.” 그러나 시리아 내무부의 한 관리는 이 시위에 대해 “여자들이 고속도로를 막고 시위를 하다니, 말세는 말세인가 보다. 저 여자들은 불순분자 악당들이다”라고 말했다.

이 사건은, 시리아 내전의 원인이 독재정권에 대한 분노와 더불어 경제 문제에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시리아의 은행원, 교사 등 이른바 엘리트층이 받는 월급이 한 달 평균 40달러 안팎이다. 독재국가가 으레 그렇듯이 관료의 부정부패도 심각하다. 그러나 알아사드 정부 처지에서는, 빵 값을 내려달라는 주부든 아이들을 찾는 부모든 모두 ‘외부 테러리스트의 사주를 받은 폭도’나 마찬가지다. 시리아 정부는 내전 기간 5년 내내 이 시각을 고수하고 있다.

다마스쿠스 대학 사회학과 교수였던 무스타파 씨(가명)는 “IS(이슬람국가)가 시리아에 정착한 이후 ‘시위대는 테러리스트’라는 정부의 입장이 더욱 탄력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내전 초기에 거리로 나왔다가 탱크와 총에 짓밟힌 시민들은 평범한 사람이었다”라고 말했다. 다라에서 중소 농장을 하던 하산 씨(48)는 요르단 자파리 난민촌에 거주하고 있다. 다라와 가까운 요르단으로 잠시 피란한다고 생각했는데 5년이 지나도록 고향 땅을 밟지 못하고 있다. 그는 2011년 시위 당시 아들을 잃었다. 그 자신도 정부군의 표적이어서 시리아로 돌아갈 수 없는 처지다. 그는 “내 아들과 친척들을 죽인 알아사드를 용서할 수 없다”라며 분노했다. 자파리 난민촌에는 다라 출신이 많다. 그들은 고향 다라를 ‘시리아 혁명’의 요람이라며 자랑스러워한다.

ⓒ다라야시 지방위원회 홈페이지 갈무리7월9일 고립된 다라야 시의 주민 수십명이 팻말을 들고 거리로 나와 응급구호 표시인 ‘SOS’를 그려 보이며 도움을 호소하고 있다.

최초 시위로부터 5년여가 지난 현재, 다라는 시리아 내의 봉쇄된 18개 도시 중 하나다. ‘혁명의 요람’ 다라가 알아사드 정부에게는 ‘반군의 소굴’에 불과한 것이다. 30만명 이상이 거주하던 다라는 현재 8000여 명이 근근이 연명하는 유령도시로 전락했다. 정부군의 계속되는 폭격으로 대다수 주민이 피란을 떠났다. 기자와 어렵게 연결된, 다라의 주부 라디아 씨(33)는 애타게 울부짖었다. “아이들이 학교에 못 간 지도 4년이 다 되었다. 매일 식량이 모자라 풀까지 뜯어먹는 참상이 이곳의 일상이다. 구해달라! 나를 구하지 못한다면 두 아들만이라도….”

독재정권에 끌려간 아이들을 구하려는 부모의 애타는 마음으로 시작된 시리아 사태는 5년간 롤러코스터를 타다가 이제 세계 전체가 나서도 해결하기 힘든 난제로 발전했다.

지난달(2016년 7월) 9일, 다마스쿠스 남서부 다라야 시의 주민 수십명이 거리로 나와 팻말을 들었다. 아이들은 응급구호 표시인 ‘SOS’ 모양으로 줄지어 섰다. 영어와 프랑스어, 아랍어로 된 팻말에는 유엔 등 국제기구를 겨냥한 문구가 씌어 있다. “다라야의 어린이를 도와주세요.” “이 포위망을 뚫고 들어와 주세요.”

기자명 김영미 (국제문제 전문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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