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아메리칸 드림’이 위험하다

공화당의 위기가 곧 미국 민주주의의 위기

미 대선을 뒤흔드는 러시아 해킹 배후설

 

 

오는 11월 대선을 3개월 앞둔 미국이 때 아닌 ‘러시아 커넥션’으로 시끌벅적하다. 최근 미국 민주당의 전산 시스템이 잇따라 해킹당하는 해괴한 일이 벌어졌는데, 그 배후로 러시아가 지목됐기 때문이다. 이번 사태를 그대로 방치할 경우, 러시아가 미국 대선에까지 개입해서 자국에 유리한 후보로 투표 결과를 조작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었다. 결국 연방수사국(FBI)이 공식 수사에 착수한 데 이어 해외 감청 전문기관인 국가안보국(NSA)은 물론 중앙정보국(CIA)까지 측면 지원에 나서며 해킹의 배후를 추적 중이다.

폭로 전문 웹사이트인 위키리크스는 민주당 전당대회 사흘 전인 7월22일, 민주당 전국위원회(DNC:대통령 후보 경선 등 민주당의 각종 행사를 주관) 지도급 인사 등의 이메일 1만9252건을 폭로했다. 공개된 내용들에 따르면, DNC가 그동안 대선 후보 경선 국면에서 힐러리 클린턴을 일방적으로 편들며 버니 샌더스 진영의 선거운동을 방해했다는 의혹이 사실로 드러났다. 이로 인해 데비 슐츠 DNC 위원장이 전격 퇴진했다. 7월25일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는 한때 흥분한 샌더스 지지자들의 야유와 시위로 혼란스러웠으나 피해 당사자인 샌더스가 직접 나서 클린턴 지지를 호소하면서 봉합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민주당 전당대회 마지막 날인 7월29일, 민주당 하원선거위원회(DCCC:당 소속 하원 후보들을 위해 모금 등 각종 지원활동을 제공하는 조직)도 자체 컴퓨터 시스템에서 해킹 흔적을 발견했다.

ⓒAP Photo미국 워싱턴 D.C.의 민주당 중앙당사 건물. 최근 민주당 전산 시스템이 잇달아 해킹 공격을 받았다.

민주당이 이처럼 사상 초유의 해킹 사건에 휘말린 가운데 러시아 푸틴 대통령을 공개적으로 칭찬한 바 있는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는 “러시아가 해킹했다면 클린턴이 국무장관 시절 불법으로 주고받은 이메일 3만3000건도 찾을 수 있길 바란다”라며 오히려 러시아의 해킹을 부추기는 황당 발언을 해 빈축을 샀다. 이에 맞서 클린턴은 보수 방송인 〈폭스 뉴스〉에 출연해 “러시아 정보기관이 DNC를 해킹해 많은 이메일이 유출됐다. 트럼프 후보가 푸틴을 지지하는 것 같아서 매우 우려스럽다”라며 해킹의 배후로 러시아를 지목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도 NBC 뉴스 측이 “러시아가 미국 대선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라고 질문하자 “무엇이든 가능하다”라고 답변했다.

오바마 대통령까지 이번 해킹의 배후로 러시아를 암시하면서 수사 당국의 발걸음도 바빠졌다. 최근 ABC 뉴스 보도에 따르면, NSA 해킹 전문팀은 이번 사건의 용의자를 확정하기 위해 ‘역해킹’ 작전을 추진하고 있다. CIA도 신설된 디지털혁신국 주도로 수사에 공조하고 있다. 현재 미국 정보·수사 당국은 비록 공식적으로 러시아를 ‘배후’로 지목하지는 않았으나 러시아 정보기관인 연방보안국(FSB)과 군정보국(GRU)을 주요 용의선상에 올려둔 상태다.

만일 이번 해킹 사건이 러시아 측의 소행이라면, 구체적으로 누가 어떤 목적으로 이런 일을 벌였을까? 현재 워싱턴에서 가장 많이 오르내리는 설(說)은 ‘클린턴과 푸틴 간 뿌리 깊은 반목과 불화’ 때문이라는 것이다.

정치 전문 매체인 〈폴리티코〉에 따르면, 클린턴은 연방 상원의원 시절인 2008년 푸틴을 ‘영혼이 없는 인간’으로 폄하한 바 있다. 푸틴의 KGB(옛 소련 시절, 비밀경찰 및 첩보조직이었던 국가보안위원회) 경력 때문이다. 클린턴은 오바마 행정부 1기의 국무장관으로 취임한 2009년 1월 이후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 푸틴에 대한 경멸감과 증오감을 표현한 바 있다. 특히 2011년 12월 러시아 총선이 부정 시비에 휘말리면서 모스크바 시민 수만명이 거리로 몰려나와 격렬한 푸틴 반대 시위를 벌였을 때, 푸틴은 시위를 부추긴 ‘주범’으로 당시 미국 국무장관이던 클린턴을 지목했다. 당시 라트비아를 방문한 클린턴이 “러시아 국민은 자유롭고 공정하며 투명한 선거로 책임 있는 지도자를 선출할 권리가 있다”라며 시위 군중을 공개적으로 지지했기 때문이다. 당시 격노한 푸틴은 여러 경로를 통해 오바마에게 강력히 불만을 토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사건 이후, 클린턴과 푸틴 사이의 악감정은 회복 불가능한 상태가 됐고, 결국 이번 같은 ‘보복 해킹’으로 이어졌을 공산이 크다는 지적이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러시아 담당 국장 출신으로 주 러시아 대사를 지낸 마이클 맥폴은 〈폴리티코〉에 “푸틴은 당시 클린턴에게 크게 격노했는데 이후에도 오랫동안 분을 삭이지 못했다. 이번 해킹이 (푸틴의) 보복일 개연성은 충분하다”라고 밝혔다. 시사주간지 〈타임〉 최근호도 “러시아가 정말 트럼프를 위해 미국 대선에 개입하기 시작했다면 클린턴에 대한 푸틴의 악감정이 충분히 동기가 될 만하다”라고 지적했다.

러시아가 미국 대선 전산 시스템을 공격한다면…

문제는, 러시아가 이 해킹의 ‘진범’으로 판명된다 해도 미국 정부가 보복할 만한 수단이 뚜렷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바마 행정부 내에선, 러시아 FSB와 GRU에 대한 보복 사이버 공격에서부터 경제제재에 이르기까지 강력한 조치를 단행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하지만 최근 미국 처지에서는 시리아 내전 등 굵직한 국제 현안을 풀어나가려면 러시아의 협조가 절실한 상태다. 그래서 미국 정부가 이 같은 외교적 고려를 무시하고 단호한 보복조치를 취하기는 어렵다는 관측도 있다.

ⓒAP Photo2012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APEC 정상회의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푸틴(왼쪽)과 클린턴. 둘은 사실 앙숙이다.

미국 정부는 예전부터 러시아에 관해서는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여왔다. 2014년 오바마 행정부는 중국 측의 ‘산업 스파이’ 행위를 거론하며 시진핑 주석을 압박한 바 있다. 올해 3월에는 이란이 미국 은행들을 해킹했다고 주장했다. 지난해 초에는 북한이 소니 영화사를 해킹했다며 경제제재를 했다. 이런 나라들에 비해 러시아는 지금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미국에 사이버 공격을 가했다는 혐의를 받아도 별 제재를 받지 않았다. 미국 국방부 합참본부실 이메일 시스템(지난해 8월), 미국 국무부 고위 관리와 우크라이나 주재 미국 대사 간의 통화 내용(2014년), 백악관 컴퓨터 시스템(2013년 10월) 등을 해킹한 주범이 러시아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러시아를 해킹 배후로 지목하기를 거부했다.

따라서 이번 해킹의 주범이 러시아로 밝혀질 경우, 미국 정부가 어떻게 대응할지도 관심사다. 〈뉴욕 타임스〉는 “미국 정부가 대응하지 않는다면 무거운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앞으로 (해킹 등) 불장난할 기회가 더 많아질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라고 경고했다. 미국 외교협회(CFR) 제니퍼 해리스 선임연구원은 “오는 11월 대선 직전 이런 해킹이 재발할 가능성이 충분하다”라고 우려를 표시했다. 예컨대, 러시아 해커들이 대선 직전 플로리다나 오하이오 같은 경합 주의 투표 시스템이나 전력망을 공격해서 미국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뜨릴 수 있다. 이에 대해 사이버 보안 전문가인 로버트 리는 인터넷 인기 시사 매체 〈시커(Seeker)〉와 인터뷰하면서 “가능할 것이다. 투표 시스템 제작회사들과 이들의 보안 체계를 들여다보면 아주 문제가 많다”라고 우려했다. 지난 7월 말, 전·현직 정보 당국 및 국가안보 고위 관계자들이 참석한 아스펜 안보포럼에서 존 칼린 국가안보담당 법무차관보는 “우리가 억제적 조치도 취하지 않고 해킹을 묵묵히 참고 견딜 거라고 생각한다면, 큰코다치게 될 것이다”라고 러시아에 은근한 경고를 보냈다.

기자명 워싱턴∙정재민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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