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카는 시리아에서 손꼽히는 비옥한 지역이다. 남쪽으로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젖줄이었던 유프라테스 강이 흐른다. 그 덕분에 시리아 전체 농산물의 70~80%를 라카 주에서 생산했다. 주요 작물도 밀·옥수수·목화·토마토·감자 등 다채로웠다. 2011년 시리아 내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말이다. 현재 라카는 IS(이슬람국가)의 수도로 더 유명하다.

압둘와합(32) 헬프시리아 사무국장은 라카가 고향이다. IS에 대한 의견을 물었더니 역질문이 돌아왔다. “기자님이 이상하다고, 악명 높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몇 배는 더 싫어합니다. IS는 우리의 이름을 더럽히고 있어요.” IS 앞에는 ‘이슬람’ 혹은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단체라는 설명이 따라붙는다. 압둘와합 씨는 수니파 무슬림이다. 이름도 ‘알라를 섬기는 자’라는 뜻이다. 무슬림과 IS를 구별하지 못하는 한국인에게 ‘테러리스트’라고 욕을 먹기도 했다. 그러나 압둘와합 씨를 비롯한 시리아인들은 IS의 최대 피해자다.

ⓒ시사IN 이명익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어머니와 남동생 한 명은 터키에, 다른 남동생 한 명은 노르웨이에 있다. 아버지와 두 여동생은 아직 라카에 있다. 두 남동생을 먼저 도피시킨 건 IS의 징집을 피하기 위해서다. 라카에 남아 있는 가족들은 집에서만 생활한다. 외출을 하면 ‘옷이 길다, 짧다, 수염을 안 기른다, 왜 여자 혼자 밖에 나왔느냐’ 등등 IS가 시비를 걸어온다. 시장에 갈 수 없으니 집집마다 방문하며 물건을 파는 상업 차량이 생겼다.

무엇보다 안전이 위태롭다. IS를 격퇴시킨다는 이유로 미국·프랑스 등 서방 연합국의 폭격이 연일 이어지고 있다. 물론 전투기의 공습은 민간인과 IS를 구분하지 못한다. IS 전투원 10명을 죽일 때 민간인 90명이 희생되는 식이다. 압둘와합 씨는 “우리 가족도 바로 내일 죽을 수 있어요”라고 말했다.

한국에 온 건 2009년이었다. 다마스쿠스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그는 프랑스 유학을 준비했다. 대학교 어학당에 다니던 한국 친구들이 호기심을 자극했다. “다른 외국인 친구들과 비교해 한국 친구들은 쉽게 가까워졌어요. 너무 잘 맞아서 이 나라는 어떤 곳일까 찾아보게 됐죠.” 알아보니 한국에는 시리아 대사관조차 없었다. 역시 시리아에도 한국 대사관이 없었다. 사회주의 국가를 표방하는 시리아는 북한의 우방국으로 아직까지 한국과 수교를 맺지 않고 있다. “한국에 사는 시리아인도 찾기가 어려웠어요. ‘그렇다면 내가 한국 전문가가 돼서 앞으로 한국과 시리아의 가교 역할을 해야겠다. 도전해보자’ 그렇게 생각했죠.”

한국 생활은 예정보다 길어졌다. 2011년 내전이 터진 이후 라카에 가보지 못했다. 2013년 6월 시리아 상황을 안타깝게 여기던 한국 친구들과 시리아 난민 지원단체 ‘헬프시리아’를 만들었다. “그때는 몇 개월 후면 시리아 문제가 끝날 줄 알았어요.” 유엔 인도주의업무조정국(OCHA)에 따르면 시리아 내전 발발 이후 전쟁 전 인구 2300만명 중 거의 절반이 집을 잃고 난민 신세로 전락했다.

압둘와합 사무국장은 2014년 시리아 알레포의 난민 캠프, 2015년 시리아와 요르단, 터키 등 주변국의 난민 캠프를 방문해 구호물품을 전달했다. 활동비용은 후원금으로 마련한다. 3년간 그를 포함한 자원봉사자들의 힘으로 운영되던 헬프시리아는 최근 상근자 한 명을 뽑았다. 좀 더 지속 가능한 구조를 갖추기 위해서다. “구호물품 전달은 제일 기본적인 거예요. 앞으로 할 일이 많아요. 한국으로 오는 시리아 난민도 조금씩 늘어나고 있고요. 마지막 난민이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헬프시리아는 활동할 겁니다.”

기자명 김연희 기자 다른기사 보기 un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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