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 읽은 어린이 문고들을 빼면, 내가 처음 읽은 과학책은 다윈의 〈종의 기원〉이었던 것 같아. 지적 허영심으로 끝까지 읽어냈지만, 아주 지루한 책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어. 번역도 형편없었던 것 같아. 20대에 그 책을 처음 읽었을 때는, 다윈의 지적 자식들이 쓴 책들을 나중에 내가 얼마나 좋아하게 되고, 그래서 그 지겨웠던 〈종의 기원〉을 다시, 그때와 달리 감동적으로 읽게 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어. 〈종의 기원〉 다음에 읽은 과학책은 뉴턴의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야. 이 책은 제목을 그냥 〈프린키피아〉(‘원리’라는 뜻이야)라고 줄여서 부르는 게 예사인데, 1998년에 교유사라는 출판사에서 세 권으로 번역돼 나온 한국어판 제목도 〈프린키피아〉야. 〈프린키피아〉는 그야말로 근대 물리학(뉴턴 시대에는 ‘자연철학’이라고 불렀지)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어. 그런데 고등학교 물리까지 공부한 독자들에게는 그리 어려운 책이 아니야. 나도 대학입시 물리를 다시 복습하는 기분으로 술렁술렁 읽었어. 물론 나는 〈프린키피아〉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어. 물리는 수학과 더불어 내가 학창 시절에 가장 싫어하던 과목이었으니까. 나는 그냥, 고전을 한번 읽어보자는 허세로 〈프린키피아〉를 읽었을 뿐이야. 〈종의 기원〉을 처음 펼쳐들 때와 비슷한 동기였던 거지. 사실 〈프린키피아〉는 내가 읽으려고 산 게 아니라 그즈음에 고등학생이었던 큰아이에게 읽히려고 산 책이기도 했고. 수학과 물리를 좋아하던 그 아이는 그 책을 아주 쉽고 재미있게 읽어냈다더군.

그 뒤 오래도록, 내 독서가 그리 게으르지는 않았는데도, 자연과학 책은 거의 안 읽다시피 하고 살았어. 〈종의 기원〉이나 〈프린키피아〉에 맞먹는 고전들만이 아니라, 대중을 상대로 쓰인 책들도 마찬가지였어. 물론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나 〈창백한 푸른 점〉, 에드워드 윌슨의 〈사회생물학〉 같은 베스트셀러는 이따금 들춰봤지만.

ⓒ이지영 그림

내가 과학책을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한 건 40대가 거의 끝나가면서야.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을 읽은 뒤부터였어. 알다시피 〈만들어진 신〉 자체는 딱히 과학책이라고 할 수 없지. 그냥 자신의 과학 지식에 바탕을 두고 무신론을 주장한 책이지. 그렇지만 나는 그 책을 읽으며 좀 거만하다 싶긴 해도 명민하고 글 잘 쓰는 도킨스라는 사람에게 반했어. 그래서 그 뒤 한국어로 번역된 도킨스의 책을 찾아 닥치는 대로 읽기 시작했어. 〈눈먼 시계공〉 〈지상 최대의 쇼〉 〈무지개를 풀며〉 〈이기적 유전자〉 〈확장된 표현형〉 〈악마의 사도〉 〈리처드 도킨스의 진화론 강의〉 〈조상이야기〉 같은 책이 그즈음의 나를 홀렸어. 도킨스가 물리학자나 화학자라면 나는 아마 그의 책을 읽지 않았을 거야. 아무리 지적 허영심이 크다고 하더라도, 내가 거의 이해할 수 없는 책들을 찾아 읽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러니까 내 과학책 읽기는 생물학에서 시작했고, 지금까지도 거의 생물학의 범위를 넘어서지 않았어. 제임스 왓슨의 〈이중나선〉처럼 이론과 에피소드가 버무려진 책도 읽었지. 생물학자들의 자서전이나 평전에도 눈을 돌렸고.

간간이 〈파인만씨, 농담도 잘 하시네!〉나 한스 그라스만이 쓴 〈쿼크로 이루어진 세상〉 같은 물리학 대중서를 읽기도 했지만, 아무튼 내게 가장 재미있는 과학책은 생물학 분야의 책들이야. 아마 수학이 거의 개입되지 않아서 그럴 거야. 그런데 도킨스는 자기 책 여러 곳에서, 약간의 경쟁심과 존중심과 심통을 섞어가면서, 동갑내기 생물학자인 스티븐 제이 굴드를 언급해. 학문적 동조나 비판을 할 때도 있지만, 예컨대 “쟤는 왜 생물학 책에서 미국 프로야구 얘기를 하는 거야? 미국놈 티 되게 내네” 하는 식으로 사적 감정까지 드러내. 그래서 나는 자연스럽게 스티븐 제이 굴드로 넘어가게 됐어. 〈판다의 엄지〉에서 시작된 내 굴드 여행은 〈다윈 이후〉 〈클론 AND 클론〉 〈생명, 그 경이로움에 대하여〉 〈레오나르도가 조개 화석을 주운 날〉 〈풀하우스〉 〈인간에 대한 오해〉 같은 책으로 이어졌어. 개중에는 절판된 책도 있어서 도서관에서 빌려 읽기도 했지.

과학책 읽기로 인도하는 훌륭한 길잡이

〈어느 인문주의자의 과학책 읽기〉최성일 지음연암서가 펴냄

나는 물리학이나 화학 같은 단단한 과학(hard sciences)에 영 젬병이었지만, 그래도, 아니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그 학문들이 생물학보다 우위에 있다는 경외심을 지니고 있었어. 이해하기 어려운 대상에 대한 존경심 같은 거였지. 그런데 도킨스와 굴드의 책을 읽다 보니, 그리고 그들의 책에 촉발돼 다시 다윈의 〈종의 기원〉을 읽다 보니, 생물학이야말로 과학 중의 과학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 물론 그중에서도 진화생물학 얘기지만. 수식이 들어가지 않은 과학책이라니! 나 같은 수포자(수학 포기자)에게 얼마나 매력적이었겠어? 도킨스와 굴드의 생물학 책들은 그 인접 학문들로 나를 이끌었고, 그래서 나는 올리버 색스를 비롯한 의사들의 책을 읽었지. 올리버 색스의 가장 유명한 책일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를 읽은 것 역시 부끄럽게도 최근 들어서야.

서양 말에서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한국어의 ‘인문학’이나 ‘인문주의’ 같은 말에는 어떤 아우라가 드리워져 있어. 그래서 마치 제대로 된 교양인이나 지식인이 되려면 인문학 서적을 많이 읽어야 하는 것처럼 돼 있어. 그렇지만 나는 어느 편이냐 하면, 지식의 중요도에서 훨씬 앞서는 것은 인문학이 아니라 자연과학이라고 생각해. 사실 역사적으로 인간의 세계관을 바꿔온 것은 인문학이 아니라 자연과학이었어. 자연과학자들이 발견한 지식들이 보편화하면 거기에 바탕을 두고 인문학자나 사회과학자들이 이론을 새로 정립하곤 했지. 우리가 플라톤이나 공자보다 더 똑똑하다면, 그것은 지금 인문학이라고 불리는 영역에서 그들보다 더 생각이 깊어서라기보다는 자연과학 분야에서 그들보다 아는 것이 훨씬 많기 때문이야.

그래서 나는 〈시사IN〉 독자들의 독서 목록에 지금보다 더 많은 과학책이 들어갔으면 해. 나는 이 글에서 꽤 많은 과학책을 언급했어. 그런데 그런 과학책들을 본격적으로 읽기 전에 〈시사IN〉 독자가 읽어줬으면 하는 책이 있어. 최성일이라는 사람이 쓴 〈어느 인문주의자의 과학책 읽기〉라는 책이야. 연암서가라는 출판사에서 나왔어. 최성일씨(1967~2011)는 이제 고인이 된 사람인데, 생전에 〈출판저널〉 기자로 출판계에 입문한 뒤 여러 지면에 출판 시평과 북 리뷰를 활발히 기고한, 말하자면 책 평론가 또는 출판 평론가야. ‘책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다섯 권으로 이뤄진 〈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들〉을 비롯해, 최성일씨의 저서는 거의 다 책과 관련된 내용이야.

〈어느 인문주의자의 과학책 읽기〉는 코페르니쿠스의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 스티븐 제이 굴드의 〈다윈 이후〉,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의 〈부분과 전체〉, 김형자의 〈과학에 둘러싸인 하루〉, 필립 키처의 〈과학적 사기〉, 올리버 색스의 〈뮤지코필리아〉 등 과학책 40여 권에 대한 촌평 내지 감상문을 모은 책이야. 저자가 서문에서 “나는 과학책 애호가일 따름”이라 밝히고 있듯, 최성일씨는 과학 전문가가 아니었어. 그래서 이 책 역시 과학책들에 대한 본격적 서평이라기보다 내용 소개와 자신의 감상이 주를 이뤄. 그런데 나는 외려 그것이 이 책의 장점이라고 생각해. 내용이 난삽하지 않기 때문에 〈어느 인문주의자의 과학책 읽기〉는 독자들을 과학책 읽기로 인도하는 훌륭한 길잡이가 될 수 있거든. 최성일씨는 매우 단정한 문장을 쓰는 사람이었는데 그것은 〈어느 인문주의자의 과학책 읽기〉에서도 예외가 아니야. 그러니 이 책을 읽기 어려워하는 독자는 거의 없을 거야.

문득 최성일씨가 작고한 날 그의 빈소를 찾았던 일이 생각나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여름밤이었어. 젊은 나이에 죽은 이 ‘책쟁이’의 명복을 나와 함께 빌어주었으면 좋겠어.

기자명 고종석 (작가·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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