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겪는 더위라지만 올여름은 시작부터 만만치 않았다. 예년에 비해 일찍 찾아온 무더위가 마른장마와 함께 극성을 부리고, 기습적인 폭우는 변덕스럽기 짝이 없다. 절망스럽게도 올해 폭염은 오래 머물다 갈 전망이다.
밤에는 열대야가 맹위를 떨친다. 7월23일부터 8월4일 현재까지 서울의 열대야 발생 일수는 12일에 이른다. 지난해 같은 기간, 서울의 열대야 발생 일수는 5일에 불과했다. 열대야란 밤 최저기온이 25℃ 아래로 떨어지지 않는 현상을 말한다. 습도가 높아지면 체감온도는 더 올라간다.
결국 막무가내로 달려드는 더위를 피하기 위해 사람들은 강과 바다를 찾고, 더러는 해외로 나간다. 최근에는 집이나 집 인근에서 실속 있게 피서를 즐기는 ‘스테이케이션(stay+ vacation)’이 떠오르고 있다. 가벼운 주머니 사정이나 피서지 인파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을 염려가 없다.
쉬이 잠들기 힘든 밤, 도심 속 심야 영화관과 야간 영업 대형마트, 야간 개장 놀이공원 등 ‘밤놀이’가 확산된 지는 이미 오래다. 한강·서점·고궁 등 ‘유흥’을 벗어난 공간들도 밤까지 문을 여는 추세다. 특별할 것 없지만 낮보다 멋스럽다. 여름밤을 즐기는, 고즈넉하고 정겨운 피서법을 소개한다.
강변의 밤은 낮보다 찬란하다
서울의 1등 피서지는 한강이다. 뒤로는 우뚝 선 빌딩이 스카이라인을 이루고 앞으로는 강물이 잔잔하게 일렁거린다. 도심에서 동서남북 사방이 트인 이만한 경관을 가진 곳은 찾아보기 힘들다.
폭염주의보가 확대된 8월3일, 지하철 5호선 여의나루역 인근 한강공원에는 어둠이 깔릴수록 피서객이 늘어났다. 물빛광장에는 가족 단위로 나온 이들이 텐트를 펴놓고 분수에 발을 담갔다. 어린이들은 온몸을 적신 채 물줄기를 가지고 놀았다. 강변 바람을 맞으며 야간 자전거 라이딩을 즐기는 사람들도 한강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서울시는 7월15일부터 8월21일까지 ‘한강 몽땅 여름축제’를 진행 중이다. ‘한강으로 피서 간다’는 콘셉트로 2013년부터 매년 여름, 여의도·뚝섬·잠실 등 한강공원 11곳에서 열린다. 공연·예술, 수상 레포츠, 휴식 프로그램 등 3가지 테마로 구성된 80여 개 프로그램이 마련됐다. 한강 다리 밑에서 영화를 상영하는가 하면, 높이 10m·길이 150m 규모의 초대형 워터슬라이드까지, 각양각색 놀이가 피서객을 맞는다.
‘한강 몽땅’의 대표 프로그램은 한강을 곁에 두고 캠핑을 즐기는 한강 여름 캠핑장이다. 뚝섬·잠원·여의도 한강공원에 텐트 총 430동이 설치돼 있다. 금요일과 토요일에는 예약이 꽉 찰 정도로 인기가 좋다. 한강 캠핑장에서는 ‘몸’과 ‘먹을거리’만 준비하면 캠핑이 완성된다. 저렴한 이용료 1만5000원(텐트 대여비 포함, 4인 이용, 평일 기준)으로 문턱을 낮췄다. 샤워실 등 편의시설은 주변에 설치돼 있다. 그늘막·테이블·의자 등 장비 일체도 값싸게 대여할 수 있다.
8월3일 오후 8시 여의도 캠핑장에는 숯불에서 튀는 불티가 날렸다. 지인과 조개를 굽던 최지해씨는 “야외에서 직접 만들어 먹는 게 특별하다. 교통편이 좋아 퇴근 후 부담 없이 다녀가기 편하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텐트에서 1박을 하지는 않을 계획이다.
텐트 속 열기를 이기지 못한 탓에 밤 9시가 넘어가자 짐을 싸는 이들이 늘었다. 한강 캠핑장의 김형준 책임자는 “여름에는 잠자기보다 밤늦게까지 놀다가 귀가하는 친구나 가족 단위 이용객이 많다”라고 말했다. 한강 여름캠핑장 예약은 홈페이지(hangang.seoul.go.kr/project2016)에서 선착순으로 받는다.
한강에 먹을거리가 없다고 생각하면 오산. 여의나루역 2번 출구에서 한강을 바라보면 형형색색 인파에 입이 떡 벌어질 정도다. 푸드트럭 70대가 즐비하고 수십미터씩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몽땅 축제의 일환으로 세계의 음식을 맛보는 ‘한강 푸드트럭 100’의 풍경이다. ‘한강 푸드트럭 100’은 수요일마다 열리는 수요야식회와 월드푸드페스타로 나뉜다. 수요야식회는 8월17일 행사만 남겨두고 있다. 월드푸드페스타는 한강 몽땅 관광주간인 8월8일∼11일 나흘에 걸쳐 진행된다.
8월3일 찾은 ‘푸드트럭 100’은 차량마다 개성이 넘쳤다. 푸드트럭을 배경으로 ‘SNS 인증’에 나서는 젊은이도 많았다. 인스타그램의 명소로 불릴 법했다. 메뉴도 다양했다. 스테이크, 팬케이크, 심지어 짜장면과 탕수육도 있었다. 가격대는 5000원 안팎(스테이크는 1만원)이다. 아기를 안은 가족 단위 방문객이 눈에 띄었다. 외국인도 자주 보였다. 수요야식회가 열리는 날. 발라드·힙합·디스코·포크 등 매주 다른 콘셉트의 공연이 분위기를 돋운다.
‘푸드트럭 100’에 참여한 사업가들은 식재료의 신선도에 많은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쉽게 상하는 재료는 소량만 준비한다. 스테이크를 파는 김준섭씨(22)는 “날이 더워서 가능한 한 빨리 다 팔려고 한다. 다행히 한강은 다른 곳보다 매출이 잘 나오는 편이다”라고 말했다. 영업이 잘되는 날은 하루 매출 300만원을 올리기도 한단다. 한강 몽땅 축제의 일환이 아니더라도 ‘밤도깨비 야시장’에서 푸드트럭을 이용할 수 있다. 서울시가 ‘푸드트럭 플랫폼’을 구축하기 위해 상설화한 프로그램이다. 10월까지 매주 금∼토요일 밤 물빛광장에서 열린다.
여름에는 주경야독이 맛이지
독서를 통한 서늘한 감동을 최고의 피서로 삼는 이들이 있다. 작품을 통해 통념을 깨고 새로운 인식과 발견을 만났을 때 지금까지와는 다른 깨달음을 얻는다. 그 어떤 청량음료도 대신할 수 없다. 삼성경제연구원은 해마다 최고경영자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해 ‘여름 휴가지에서 읽을 책’을 선정해 발표하기도 한다. 책읽기에는 ‘독서의 계절’ 가을보다 여름이 훨씬 낫다는 의견도 많다.
어둠이 쏟아지면 남산타워의 빛을 따라 서울 용산동으로 걸음을 옮겨보자. 해방촌 오거리에 도달하기 직전, 작은 서점 세 곳을 만날 수 있다. 문학 전문서점 ‘고요서사’, 독립출판물 전문서점 ‘스토리지북앤필름’ 복합문화서점 ‘별책부록’이다. 어두운 주택가와 이질적인 것 같으면서도 절묘하게 어울린다.
세 서점은 오후 8시 전후로 문을 닫는 여느 날과 달리, 8월3일에는 자정까지 문을 열었다. 퇴근 후 해방촌을 찾는 이들을 위해 지난 6월부터 매월 첫째 주 수요일에는 심야 영업으로 밤 손님을 맞기로 의견을 모았기 때문이다.
8월3일 밤 9시쯤에도 ‘고요서사’ 앞은 토박이 주민들로 북적였다. 마을에 작은 서점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마실 삼아 구경하러 나왔다고 한다. 예닐곱 평의 조그만 실내는 이미 만원이다. 조용히 앉아서 책을 읽는 남성과 서가에 꽂힌 책 목록을 살피는 이들이 여럿 서 있었다.
심야 서점에 대한 기대치가 한껏 높아지고 있다. 고요서사 차경희 대표는 “단순히 연장 영업을 하는 정도로 생각했는데, 평소보다 더 많은 사람이 온다. 따로 신청을 해야만 방문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도 생겼다(웃음). 행사가 아니니 가볍게 와주시면 된다”라고 말했다. 차 대표는 손수 상그리아(포도주에 소다수와 레몬즙을 섞어 만든 술)를 만들어 심야 책방에 온 이들에게 한 잔씩 선물했다. 오후 10시에는 서점에 남아 있는 이들끼리 간단한 게임을 하기도 했다.
고요서사를 출발해 느릿느릿 10분 남짓 걸으면 스토리지북앤필름을 만난다. 2013년 겨울 해방촌에 입주한 강영규 대표는 인근 책방 주인들에게 ‘해방촌 심야 책방’을 열자고 제안했다. 그때만 해도 가벼운 마음이었는데, 직장 탓에 쉽게 오지 못했던 이들의 뜨거운 반응에 놀랄 정도였다. 스토리지북앤필름에서 200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별책부록’도 해방촌의 밤을 즐길 수 있는 장소다.
금요일마다 24시간 열리는 서점 겸 카페도 있다. 서울 강남구 논현동에 위치한 북티크에서는 금요일 밤 10시~토요일 오전 6시, 졸음을 쫓으며 함께 책을 읽는 이들을 만날 수 있다. 참가비는 1만원이다. 최근 문을 연 마포구 서교동 북티크 2호점에서도 매주 금요일 24시 심야 서점을 운영할 계획이다. 올해 개관 2주년을 맞은 경기도 파주출판단지 내 도서관 ‘지혜의 숲’은 책 읽는 피서객의 성지다. 자유롭게 책을 볼 수 있는 분위기인 까닭에 자녀를 둔 가족 단위 이용객이 많다. 특히 3관은 24시간 이용할 수 있어서 인기가 좋다.
시·공간을 뛰어넘기에 만화만 한 아이템도 없다. 365일 연중무휴로 운영되는 서울 마포구 성산동 망원만방에서는 금요일 오후 11시∼토요일 오전 6시 심야권을 9000원에 이용할 수 있다.
달빛에 비친 고궁은 어떤 모습일까
보름달이 뜨면 창덕궁의 돈화문이 열린다. 평소 창덕궁 관람 시간은 오후 6시30분까지다. 그러나 ‘창덕궁 달빛기행’ 행사 동안에는, 일찍 닫은 궁문을 보름달이 뜨기 시작할 무렵인 저녁 8시께 다시 연다.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은 매년 4∼6월과 8∼10월 음력 보름 전후로 미리 신청한 관람객 150명에게 달빛 아래 창덕궁을 답사할 기회를 제공한다(한국문화재보호재단 홈페이지 www.chf.or.kr).
창덕궁 달빛기행에서는 ‘밤에만 볼 수 있는 고궁’의 고즈넉함을 기대할 만하다. 궁궐 내 조명은 최소한으로 줄였다. 20명씩 짝을 지어 청사초롱과 달빛에 기대 궁궐 길을 걸을 수 있다. 금천(錦川)에 비친 달빛을 따라 낙선재로 향하면 조선 왕실의 몰락과 궁중 여인의 한을 더듬어볼 수 있는 흔적이 나온다. 낙선재 후원에 우뚝 선 상량정에서 바라보는 도심 야경은 창덕궁 달빛 기행을 통해서만 즐길 수 있다. 올해 신설된 프로그램이다.
창덕궁 달빛기행 등 야간 고궁 답사 프로그램은 예매 시작 10분 만에 동이 날 정도로 인기가 높다. 티켓을 구하지 못한 아쉬움을 달랠 길이 있다. 서울시청 앞 덕수궁은 매일 밤 9시까지 문을 연다. 따로 예약하거나 신청하지 않아도 된다. 창덕궁에 비해 고즈넉한 분위기는 덜하지만, 어두운 밤 달빛에 비친 궁궐의 모습이 아름답기는 창덕궁과 다를 바 없다. 더구나 매주 목요일 저녁 7시, 덕수궁 정관헌에서는 전통 국악공연이 펼쳐진다(9월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