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준비한 독후감의 주제는 ‘제국’이었으나, 참고해야 할 책 한 권이 입수되지 않았다. 황급히 햄버거로 주제를 바꾸었다. 이런 교체는 억지처럼 보인다. 하지만 에릭 슐로서의 〈패스트푸드의 제국〉(에코리브르, 2001), 조지 리처의 〈맥도날드 그리고 맥도날드화〉(시유시, 2003), 조 킨첼로의 〈버거의 상징:맥도날드와 문화권력〉(아침이슬, 2004)을 보면 막상 그렇지도 않다.

지난 7월22일, 미국 뉴욕에서 인기 있다는 수제(手製) 버거 프랜차이즈가 서울시 강남구 논현동에 개점했다. 30℃가 넘는 폭염 아래 그것을 시식하겠다는 사람들이 몇 시간씩이나 줄을 섰는데, 그게 제 살갗을 ‘패티’처럼 익혀가면서까지 먹어야 할 정도의 음식일까? 햄버거가 길거리나 공장과 가까운 이동판매대에서 처음 팔리기 시작했던 20세기 초, “햄버거를 먹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고기를 꺼내 먹는 것이나 마찬가지다”라거나 “가난한 자들을 위한 음식”이라는 혹평이 무성했다. 햄버거에 사용되는 쇠고기 패티의 내용물을 믿을 수 없었던 데다가, 패티에는 나쁜 방부제가 잔뜩 들어가 있다고 의심했기 때문이다.

1921년 미국 최초의 햄버거 체인점 화이트 캐슬은 믿지 못할 패티라는 오명과 싸우면서 도시의 남성 근로자층을 파고들었고, 1950년대가 되자 햄버거는 평균적인 미국인이라면 일주일에 세 개씩 먹는 미국의 국민음식이 되었다. 햄버거의 위상이 이처럼 상승한 데에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눈에 띄게 변한 미국인의 생활양식이 있다. 전후 여성들을 위한 일자리가 늘어나면서 가정에서 요리할 시간이 줄어들자 미국인들은 미리 준비된 식품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냉동 패티를 이용한 햄버거는 직장을 다니는 부모들이 오랜 근무시간과 전쟁터 같은 교통체증에 기진맥진하여 집에 돌아온 후, 마지막 순간에 요리할 수 있는 손쉬운 음식이 되었다.

ⓒ공이지영 그림

대형 햄버거 프랜차이즈의 등장은 모더니티의 본거지인 미국에서조차 놀라운 최첨단으로 다가왔다. 1950년 테네시 시골에서 태어나 학창 시절을 도시에서 보냈던 조 킨첼로에게 햄버거 프랜차이즈 식당에 가는 것은 “모던하게 사는 방법과 매너를 알게 해주는 문화 교육”이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모던’을 얻은 대가로 전통적이고 지역적인 자신의 고유 음식과 식사 문화를 빼앗겼다. 〈버거의 상징〉 38~52쪽은 지은이가 느꼈던 이런 문화 충격이 미국산 패스트푸드 프랜차이즈가 입점한 제3세계 어디에서나 흔히 벌어지고 있다고 말한다.

조지 리처는 미국 패스트푸드점의 원리를 사회학의 수준으로까지 끌어올렸다. 〈맥도날드 그리고 맥도날드화〉 59~69쪽은 미국의 햄버거 프랜차이즈 기업이 보여주는 극도의 효율성과 자동화를 유대인 학살수용소에서 나치가 시범했던 “대량학살을 위한 효율적 메커니즘”과 동일시한다. 1993년에 처음 출간된 이 책에서 지은이는 다른 여러 나라와 같이 한국에는 친미 감정도 공존하지만 “오랜 반미의 역사를 가지고 있고, 미국화가 한국의 정체성을 파괴할 것이라는 두려움”도 크다고 말한다. 따라서 한국이 다른 나라보다 미국식 패스트푸드 문화에 “더 강하게 반발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한국을 너무 모르고 쓴 대목이다.

미국을 대표하는 유명 햄버거 프랜차이즈가 일으킨 혁신으로 조지 리처가 꼽은 것은 “주로 복잡한 절차의 간소화, 제품과 서비스의 단순화, 그리고 예전에 종업원이 하던 일을 소비자가 무급으로 하게 하는 방법” 등이다. 이런 혁신은 패스트푸드 업계뿐만 아니라 사회의 다른 부문으로도 파급됐다. 유명 햄버거 기업이 강박적으로 추구했던 효율성은 민간 기업뿐 아니라, 노동·교육 등 정부의 공공정책까지 널리 스며들었다.

햄버거는 미국을 대표하는 음식이면서 지역주민이 거부하는 세계화의 상징이기도 하다. 1999년 8월12일, 프랑스 농민 조제 보베는 마을 친구들과 함께 자신의 마을에 들어서는 미국산 햄버거 프랜차이즈 매점을 때려부쉈다. 재판정에 선 보베는 미국의 햄버거 프랜차이즈는 “음식 표준화의 상징”이라며, “우리가 한 행동은 ‘미국 식민지 반군이 영국에 저항했던’ 보스턴 차 사건과 비슷하다”라고 주장했다. 반세계화 투쟁가들은 이 사건을 “기업화된 농업 그리고 거대 자본가들에 의해 만들어진 전 세계의 무역 블록화에 반대하는 농부들의 저항”이라고 선언했다.

갖가지 패스트푸드는 어린이의 발육과 건강에 치명적이다. 유명 햄버거 프랜차이즈는 이런 비난을 신상품에 반영해왔으나, 회사에서 권하는 ‘세트 메뉴’에는 소금·설탕·지방이 여전하다. 게다가 여러 햄버거 기업이 커다란 사이즈로 경쟁하기 때문에 문제는 줄어들지 않는다. 초창기에 있었던 패티의 안정성 논란 역시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에릭 슐로서는 현재의 비육우 대량 사육과 도축 체계는 ‘이콜리O157:H7’균에 취약하다고 말한다. 더 알고 싶은 사람은 〈패스트푸드의 제국〉 267~298쪽을 보면 된다.

〈패스트푸드의 제국〉에릭 슐로서 지음에코리브르 펴냄

가정 붕괴 주범으로 지목된 패스트푸드점

햄버거 소비는 쇠고기를 확보하기 위해 사라지는 농지와 환경파괴 문제를 낳았다. 그러나 제러미 리프킨이 〈육식의 종말〉(시공사, 2002) 230~267쪽에서 지적한 환경문제에 비해 프랜차이즈 패스트푸드점의 비인격적 측면은 심각하지만 진지하게 거론되지 않았다. 도시인은 삭막함을 견디기 위해 각종 ‘단골(장소)’을 만들어왔으나, 종업원과 고객 사이에 최소한의 접촉만 허용하는 패스트푸드점은 고객과 종업원 사이의 인격적 친밀감을 없앴다. 나아가 좌석 회전율을 높이기 위해 최적화된 패스트푸드점은 가족 사이의 대화마저 단절한다. 조지 리처는 “오늘날 가정 붕괴 이야기를 많이 하지만, 패스트푸드점이야말로 가정 붕괴에 결정적으로 기여하고 있다. 반면 가정 붕괴는 패스트푸드점의 단골 고객을 만들고 있다”라면서 허다한 프랜차이즈를 물리치고 마을이나 집 근처의 가게를 이용하자고 말한다.

학문적 좌파인 문화연구자들은 미국에 본사를 둔 다국적 기업을 조롱하는 데 능하다. 맥도날드·버거킹·스타벅스 같은 기업이 거기에 포함된다. 이때 문화연구자들은 기업을 비판한다지만, 해당 매점의 종사자는 물론 그곳을 애용하는 대중은 그들의 비판을 자동적으로 자신에 대한 멸시와 연관 짓는다. 문화비평가가 봉착한 이런 난관은 그들이 대상으로 삼은 거의 모든 사안에서 발생한다.

1988년, 미국 햄버거 프랜차이즈가 국내에 진출하기 전에 내가 먹었던 햄버거가 이른바 수제다. 오래된 ‘햄버거 명상가’로서 말하건대, 두 손으로 들고 먹지 않는 햄버거, 쟁반에 얹혀 나온 것을 나이프와 포크로 먹는 것은 절대 햄버거가 아니다.

기자명 장정일 (소설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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