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 윤리 측면에서 볼 때, 왕조 국가와 근대 국민국가는 그 중심 가치가 판이하다. 왕조 국가의 중심 가치가 효라면, 근대 국민국가의 그것은 충이었다. 물론 이전의 왕조 국가들이 ‘효’ 못지않게 ‘충’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두 가치는 표리를 이루면서 사이좋게 지내기보다 수시로 격렬하게 충돌하곤 했다. 또한 이럴 때마다 언제나 효가 승리했다. 전통 시대 이데올로그들이 ‘효는 곧 충’이라고 끊임없이 강조한 까닭은 오히려, 충이 결코 효와 동일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충 자체만을 봐도, 국민국가 시대의 충과 근대 이전 시대의 충은 그 대상이 다르다. 왕조 국가에서 충의 대상은 왕이지, 국(國)이 아니었다. 충신은 왕을 위해 죽는다. 하지만 국민국가에서 충의 대상은 최고 권력자가 아니라 국가 혹은 국민이다. 그렇기에 국민국가는 국(國)을 위해 충을 다한 사람들에게 추모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다. 현충원(顯忠院)으로 불리는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와 대전 현충원은, 국민국가 대한민국이 내세우는 대표적 국가 추모시설이다.

충남 아산시 백암리 방화산 기슭에 자리 잡은 충무공 이순신 사당인 현충사(顯忠祠) 역시 또 하나의 대한민국 현충원이다. 이 사당이 처음 건립된 것은 18세기 초반이다. 이후 퇴락을 거듭하다가 일제강점기에 동아일보사 주도로 중건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집권한 뒤 대한민국을 본격적인 국민국가로 개조해가는 과정에서 현충원에 버금가는 추모 시설로 거듭난다.

ⓒ청와대 제공박정희 전 대통령이 현충사 사당에서 거행된 이순신 장군 ‘탄신 다례식’에서 분향하고 있다(1977년).

박정희 정권의 성역화 사업을 거쳐 현충사는 1967년 새롭게 문을 열었다. 당초 현충사는 조선시대의 개인 사당으로, 그 규모 역시 보잘것없었다. 그러나 성역화를 통해 새로 문을 연 현충사는 경내 면적만 16만3000평을 헤아린다. 또한 이순신 영정을 모신 본전을 필두로 유물관과 고택, 활터·홍살문·정려 등의 각종 시설이 화려하게 배치되었다. 이순신의 실제 모습은 알려져 있지 않다. 당시에 그려진 초상 같은 자료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현충사에 모셔진 영정은 1953년 장우성 화백이 그린, 이른바 표준 영정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이순신으로부터, 국가를 위해 멸사봉공(滅私奉公)하는 ‘국민의 이상형’을 발견해내려고 했다. 이순신은 박정희를 통해 ‘시민들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보여주는 ‘국민의 모범’으로 드라마틱한 변모를 겪게 되는 것이다. 박정희 정권은 국가 차원에서 대대적인 이순신 현창(顯彰) 사업을 벌였다. 이 사업은 2016년 현재까지도 정부 주도로 단절 없이 이어지고 있다. 양력으로 환산한 이순신의 탄생일인 4월28일, 현충사 현장에서 거행되는 ‘탄신 다례식’이 바로 그것이다. 충무공 혹은 현충사가 갖는 국가 추모시설로서의 위상은 이 행사를 집도하는 최고 제관(祭官)의 면모를 보면 단적으로 드러난다. 박정희 시대의 최고 제관은 박 전 대통령 자신이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박정희는 반드시 이 행사에 참여했다.

이런 전통은 문민정부 시대에 접어들어 김영삼 전 대통령으로까지 이어졌다. 김영삼을 마지막으로 대통령들은 한동안 현충사에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정부 차원에서 이순신을 기린다는 것 자체는 변하지 않았다. 비록 최고 제관 자리에서 대통령이 사라지기는 했지만, 언제나 이순신의 탄신 다례식에는 국무총리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참석해 헌작(獻爵)과 헌화(獻花)를 한다.

ⓒ청와대 제공3월18일 박근혜 대통령(왼쪽)이 현충사를 산책하고 있다.

김영삼 이후 김대중-노무현-이명박에 이르기까지 역대 대통령들이 현충사를 멀리한 것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명박을 제외한 다른 대통령들의 경우, 박정희에 대한 반감이 클 수밖에 없다는 공통점도 무시할 수 없다. 물론 국가를 대표하는 처지에서 충무공은 ‘멸사봉공의 국민’을 보여주는 표상으로서 매력적인 존재다. 그러나 현충사에는 박정희의 향이 너무도 짙게 남아 있다.

1995년을 끝으로 대통령 발길이 뚝 끊긴 현충사에 지난 3월 현직 대통령이 다시 나타났다. 박정희의 딸인 박근혜 대통령이다. 현충사가 단순히 부친 박정희의 ‘대통령 기념관’ 같은 곳이기 때문이었을까?

김대중·노무현·이명박은 현충사 찾지 않아

지난 글에서 거론한 ‘유홍준 설화’ 역시 이런 분위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 아니었을까? 문화재청장 재임 당시 유홍준은 박정희 대통령 한글 친필인 광화문 현판을 한자로 교체하느니 마느니 하는 논란의 와중에서 그만 엉뚱한 현충사 문제를 건드려 호된 비판을 자초했다. “현충사는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과 같은 곳”이라는 표현에 따른 설화가 커지자 서둘러 봉합에 나선 그는, 마침내 잘못했다며 고개를 숙이기에 이른다. 유홍준 당시 청장이 뭇매를 맞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두 가지 정도로 해석한다. 첫째, 누구나 알지만 차마 입에서 꺼내지 못하는 말을 해버렸다. 둘째, 박정희와 국민을 혼동했다. 적어도 외형적 차원에서 현충사는 박정희의 개인 기념관이 아니라 ‘국민의 전당’이며 그렇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거짓말하지 마라’ ‘진실하라’ 등은 우리 사회의 정론이지만, 사실 진실만큼 거북하고 불편한 것도 없다. 유 청장의 발언은 그의 속내인 동시에 현충사(혹은 그곳에 지울 수 없을 정도로 짙게 드리운 박정희의 그림자)를 향한 우리 사회 일각의 ‘반항심’이기도 할 것이다. 현충사는 누가 뭐라 해도 박정희 대통령이 국민국가 대한민국을 구성하는 바람직한 국민의 이상형을 찾는 과정에서 그 배양처로 주목해 대대적으로 재단장한 곳이다.

이는 한편으로, 이순신과 현충사에 짙게 드리운 ‘국민’의 그림자를 걷어내야 할 책무를 우리에게 지운다. ‘국가적 위기’가 닥칠 때면 언제나 이순신과 현충사가 호명되곤 한다. 영화나 드라마 등에서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이순신은 국가를 위해 사심이 없는 삶을 산 절대의 충신, 국민의 이상으로 그려진다. 이런 이순신에게 시민들은 환호한다.

하지만 ‘국민’ ‘국가’라는 집합명사와 추상명사는 시민 개개인의 자유와 인권, 더 나아가 요즘 각광받는 가치인 정의를 질식하게 만드는 독소로 작용하기도 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돌이켜보면 국민 혹은 국가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폭압과 폭력이 자행되었던가? 그 질식의 굴레에서 이순신과 현충사를 구출해야 한다.

기자명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문화재 전문 언론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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