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조상들은 항상 중국 대륙의 정세에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그 유명한 <삼국지연의>의 첫 구절이 “무릇 천하대세는 나누어진 지 오래되면 반드시 합쳐지고, 합쳐진 지 오래면 반드시 나누어진다”라는 것은 너도 알 거야. 이처럼 중국 대륙에서 어느 나라 또는 민족이 갑자기 흥성하여 패권을 차지하고 호령할지, 또 어떻게 갈리고 어느 쪽이 우리와 맞닿는가의 문제는 작게는 이익의 대소를, 크게는 나라의 존망을 결정하기도 했어. 오늘은 한 치 앞도 보기 힘든 국제 정세 속에서 살길을 찾아야 했던 조상님들 중 탁월했던 두 분을 모시고 가상 좌담회를 열어볼까 한다. 고구려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장수왕(394~491년, 재위 412~491년)과 외교 담판으로 거란군을 철수시켰던 고려의 서희(942~998년)가 그 주인공이다. 주제는 “우리는 이렇게 외교를 펼쳤다”. 사회는 아빠가 보도록 하지.

사회:인사는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고구려의 장수왕께 여쭙니다. 오랫동안 왕위에 계셨는데 어떤 식으로 외교를 펼치셨습니까.

장수왕:내가 즉위하던 무렵은 국제 정세가 급변하던 시기였소. 중국이 5호16국 시대의 혼란기를 극복하고 대충 북쪽의 북위와 남의 송나라로 정리되던 때였지. 일종의 양강체제(兩强體制)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거요. 아버지 광개토왕은 대륙의 혼란을 틈타 동서남북으로 거침없이 뻗어 나가셨지만 나는 그럴 수만은 없었소. 나는 북위와 송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일에 전력을 기울였지. 국경을 맞댄 북위와 교류가 잦았지만 결코 남쪽 왕조 송에게도 소홀하지 않았다오. 그 한 예로 439년 송나라가 말 800필을 요구해왔을 때 나는 바다 건너까지 말들을 보내줬소.

ⓒ연합뉴스 장수왕은 균형 외교를 위해 송나라에 말 800필을 보내기도 했다. 위는 장수왕릉으로 추정되는 중국 지린성 지안에 위치한 장군총.

말 800필이 무슨 의미인지 아시오? 유목민족인 선비족이 세운 북위는 기병이 주력이었지만 한족이 중심인 송은 그렇지 못했거든. 그들에게 말(馬)을 준다는 건 요즘으로 말하면 탱크 800대나 미사일 800기를 보낸 것과 같다고 보면 될 거요. 말 800필이 가면 그 말을 돌보는 사람은 또 얼마나 가야 하고, 그 말들이 먹을 건초는 얼마였겠소. 국력을 기울인 수송 작전이었지. 말만 보낸 게 아니라 우리 고구려가 쓰던 기병 전술까지 수출했다고 보면 될 거요. 그런데 이 439년은, 북위가 화북을 통일한 해이기도 했소. 나는 북위에도 사신을 파견했지. 심지어 11월, 12월 한 달이 멀다 하고 연거푸 보내서 친한 체를 했다오.

서희:장수왕께서는 북위와 송의 욕심과 약점을 동시에 이용하신 겁니다. 북위는 송나라와 맞서기 위해서 고구려와 무탈하게 지내야 했지요. 한편 송나라는 북위를 견제하기 위해서 고구려를 끌어들여야 했습니다. 요즘 청춘 남녀들의 연애 격언 중에 “잡힌 고기에게는 미끼를 주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지요? 장수왕의 비결은 바로 ‘잡힌 고기’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강대국이 낚시꾼이라면 요리조리 피해 다니면서 낚싯바늘을 피해 미끼만 잘라 먹는 얄미운 물고기였다는 거죠.

장수왕:좀 무엄하시군 서희 공. 나를 물고기에 비유하다니. 북위의 요구를 거부하고 북연의 왕 풍홍을 받아들였으며, 풍홍이 송나라를 끌어들여 우습게 놀자 그를 가차 없이 죽여버리기도 했거늘…. 어흠! 미끼 잘라 먹는 물고기라니.

서희:비유가 불쾌했다면 용서하소서. 그러나 대왕께서는 외교의 기본을 또 하나 보여주신 겁니다. 강대국의 욕심을 타고 넘어 도리어 약점을 찌를 수 있는 외교의 핵심은 곧 주체적인 자기 역랑입니다. 스스로 지킬 힘과 방책이 없는 나라라면 밖으로 다른 나라와도 사귈 수 없을 겁니다. 싫어도 미끼를 물어야 굶주림을 면하는 물고기가 될 뿐인 것이지요. 거란의 1차 침입 때 이야기를 해도 될까요?

장수왕:그때도 대륙 남쪽의 송나라(장수왕 때의 송나라와는 다른)와 북쪽의 거란, 즉 요나라와 다툼이 치열했지요?

서희:그렇습니다. 요나라와 송나라는 오늘날 북경 지역인 연운 16주를 두고 다투었지요. 요나라는 송과 본격적인 전쟁을 벌이기 전에 배후의 위협이 될 수 있는 고려를 꺾어두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허장성세가 심했지요. “80만 대군을 몰고 왔다”라고 했어요. 그런데 80만 대군이라면 왜 구태여 항복하라고 큰소리를 칩니까. 허세였죠. 물론 만약 안융진 전투마저도 고려군이 패했다면 그 허세는 실세가 됐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소손녕은 그 작은 성을 빼앗지도 못하면서 계속 폼만 잡았죠. 이거 ‘뻥이다’ 싶었습니다.

장수왕:그때 서경(평양) 이북을 거란에 떼어주자는 사람도 많았지요?

ⓒ이천시청 제공 경기도 이천시 서희테마파크 역사관에 설치된 서희 장군 담판 모습.

서희:그랬습니다. 그러나 지렁이만 줘도 만족할 물고기에게 좋은 떡밥을 미끼로 쓸 필요는 없는 거지요. 실제로 거란은 고려 땅에 대한 욕심은 없었습니다. 저와 회담 중에 소손녕이 다음과 같은 말을 하는 바람에 춤을 출 뻔했습니다. “우리와 국경을 맞대고 있으면서 바다 건너 송나라와 친하게 지내는 까닭은 무엇이오?” 결국 이 말이 바로 거란의 속내이자 욕심이었지요. 후손들이 만든 영화 <범죄의 재구성>의 명대사이던가요. “상대방이 뭘 원하는지 알면 게임 끝이다.” 쾌재를 부르며 제가 소손녕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진 때문에 길이 막혀서 압록강 건너기가 바다 건너기보다 힘든데 어떡합니까. 우리가 여진족 몰아내고 옛 땅을 찾아 요새를 만들고 길을 열면 (요나라와) 친하지 않으려고 해봤자 안 친할 수 없지 않을까요?” 소손녕은 길게 생각하는 친구가 아니더군요. 자기네 왕으로부터 잽싸게 허락을 얻은 뒤 제게 낙타 10마리, 말 100필, 양 1000마리에 비단까지 얹어 선물을 주고 철군해갔지요.

장수왕:하하하~. 그래서 고려는 요나라에게 뭘 해줬나요?

서희:송나라와 단교하고 요나라 연호를 사용하기로 하였답니다. 압록강변 280리를 우리 땅으로 공인받고 성 쌓고 길 닦는 대가로 말입니다. 하지만 요나라에는 그게 중요했던 겁니다. 얼마나 바보짓을 한 건지는 수만 목숨을 바치고 나서야 알게 되지만요.

사회:두 분 말씀 잘 들었습니다. 한번 정리해볼까요. 두 분이 살던 시대와 오늘날이 물론 같을 수는 없지만 양강 구도의 틈새를 경험하신 분들로서 후손들의 외교에 도움말을 주신다면요?

장수왕:우선 섣불리 한편에 서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아야겠지요. 결단할 때는 분명히 있겠지만 드물 것이고, 섣불리 결단하여 한쪽의 적이 되는 일은 금기 중의 금기요. 그리고 어떤 최악의 상황에서도 빼낼 수 있는 패는 소매 속에 감춰둬야 하오. 고구려에 상륙하여 내 부하들을 살상한 송나라 장수를 내가 죽여버리지 않은 이유요. 왕가 사이의 혼인으로 양국(고구려와 북위)의 결속을 다지자는 북위의 요구를 애써 거절한 까닭이기도 합니다. 또한 중심을 잘 잡아야 하지요. ‘판단은 강대국이 하고 우리는 수용할 뿐’이라는 자들에게는 외교고 국방이고 아무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서희:상대방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파악해야 합니다. 80만 대군을 떠벌리면서 협상하자고 으르댄 소손녕에게 속내가 있었던 것처럼 툭하면 미사일을 쏘아대는 이들에게도 원하는 바가 있을 것이고, 그들을 감싸는 이들도 마찬가지인 게지요. 그렇다면 우리의 이익을 최대한 확보하면서 그들의 이익을 어느 정도 (또는 최소한으로) 배려해주는 것이 외교이고 협상입니다. 그 고민 없이 “적이 쳐들어왔다. 싸우자!”라고만 부르짖거나 “80만 대군이란다. 항복하자”라고 외치는 것은 얼핏 보기에는 대조적이지만 사실은 둘 다 동일한 바보짓일 뿐이지요. 그러고 보니 후손 중에 누군가 이렇게 묻는 게 들리더군요. “사드 외에 무슨 대책이 있단 말이냐?”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소. 미국이라는 나라의 1992년 대통령 선거 구호를 조금 비튼 말이오. “바보야, 문제는 외교야(It’s the diplomacy, stupid!).”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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