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터키 쿠데타 ‘자작극’ 의심 받는 이유


터키 여행, 얼마나 위험할까?

 

지난 7월15일 밤(현지 시각) 터키 이스탄불에 사는 지인과 전화 통화를 했다. 이스탄불 시내 탁심 광장 인근 아파트에 사는 가정주부 에르겐 씨(32)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모르지만 아이들은 전투기 굉음에 떨고 있고 애들 아빠는 연락이 안 된다”라고 말했다. 그 시각 쿠데타를 일으킨 군인들은 이스탄불에서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보스포루스 대교를 봉쇄했다. 시민들은 SNS와 방송을 통해 쿠데타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공항버스 기사인 모하메드 야무르 씨(47)는 “공항에 손님들을 태우고 갔는데 군인들이 탱크로 가로막았다. 테러가 일어났느냐고 물으니 그들은 나에게 총을 겨누며 버스에서 나오지 못하게 했다”라고 말했다. 이스탄불뿐만이 아니었다. 터키 수도 앙카라에서는 의회 건물이 쿠데타 군인들의 탱크에 포위되었다. 의회 건물 일부는 포에 맞아 파괴되었다. 군인들은 방송국을 점령해 ‘쿠데타 성공’을 선포했다.

하지만 이 쿠데타는 고작 6시간 만에 진압되기 시작했다. 7월16일 새벽 4시, 휴가를 떠났던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이 이스탄불 아타튀르크 공항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건재함을 과시했다. 이때부터 쿠데타 군인들이 점령했던 방송국과 주요 시설들을 정부군이 탈환했다. 날이 밝아오며 쿠데타에 가담했던 군인들은 속속 항복했다. 비날리 일디림 터키 총리는 7월17일 “쿠데타 과정에서 사망한 시민과 경찰, 정부군 수가 190명 이상이다”라고 밝혔다. 사망자와 부상자 집계는 날이 갈수록 늘어났다.

ⓒAP Photo7월21일(현지 시각) 터키 이스탄불 보스포루스 다리 주변에서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 지지자들이 국기를 흔들며 친정부 시위를 벌이고 있다.

쿠데타가 실패로 끝난 건 쿠데타 군이 민심을 잘못 읽어서라고 풀이된다. 에르도안 대통령이 SNS를 통해 쿠데타 저지를 호소하자 시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오며 화답했다. 쿠데타 군인 앞을 시민들이 막아섰다. 이 과정에서 쿠데타 군은 시민들에게 발포했다. 터키의 한 민간 방송사 기자인 모흐멧 씨(40)는 “그동안 에르도안 대통령의 독재가 쿠데타의 빌미가 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의 독재는 민주적인 선거로 막을 내려야 한다. 쿠데타로 그가 무너지면 또 다른 에르도안이 대통령이 된다는 사실을 시민들은 알고 있다”라고 말했다. 또 다른 한 터키 통신사 기자는 “이집트 무바라크 대통령이 축출되었지만 결국 그를 대신한 건 군부 정권이었다. 우리는 이 결말에 잘 학습되어 있다”라고 말했다. 시민들은 독재자이더라도 민주적 선거로 선출된 에르도안 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분명히 했다.

이들 외에도 쿠데타를 막기 위해 거리로 나온 시민 가운데는 에르도안 지지자와 종교적 지지자들이 압도적이었다. 미국 워싱턴근동정책연구소의 소네르 차압타이 선임연구원은 7월18일 〈월스트리트 저널〉 기고문에서 “시민 중에서 에르도안 대통령의 종교적 지지층이 쿠데타를 저지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라고 분석했다.

실패한 쿠데타 후폭풍은 거셌다. 쿠데타의 주모자로 알려진 전직 공군사령관 아킨 외즈튀르크, 육군 2군 사령관 아뎀 후두티, 3군 사령관 에르달 외즈튀르크, 데니즐리 특공대 대장 외즈한 외즈바크르 등이 체포됐다. 이어 대규모 숙청이 시작되었다. 터키 정부는 쿠데타가 진압되자마자 7월16일 오전 군인 6000명을 체포하고 경찰 9000명을 해고했다. 또 판사 3000명을 직무 정지시켰다. 교사와 교직원 1만5200명을 해고하거나 직위 해제했다. 군·사법부에서부터 교육계까지 체포되거나 축출당한 이들의 숫자를 모두 합치면 5만명에 이른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왜 쿠데타를 일으킨 군인들 외에도 교사와 판사들까지 해직하고 체포했을까? 에르도안은 이번 쿠데타를 정적 제거 기회로 활용하고 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한때는 동지였지만 지금은 정적인 이슬람주의 사상가 펫훌라흐 귈렌을 쿠데타 배후로 지목했다. 귈렌은 1999년 치료차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로 건너가 지금까지 그곳에 머물고 있다. 그는 2002년 세속주의 정당에 맞서 친이슬람 성향인 에르도안의 집권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하지만 2013년 에르도안 대통령이 귈렌파 숙청에 나서면서 둘은 정적이 되었다. 귈렌은 1970년대부터 사회단체 ‘히즈메트(봉사)’를 조직해 영향력을 키웠는데, 에르도안 대통령은 이 단체를 ‘펫훌라흐주의 테러 조직’이라 규정하고 있다. 에르도안은 미국과의 외교 마찰을 감수하면서까지 귈렌의 송환을 미국 정부에 강하게 요청하고 있다.

ⓒAFP쿠데타 당시 군용 헬기를 타고 그리스로 넘어와 망명을 요청한 터키 군인이 밀입국 혐의로 재판을 받기 위해 법원으로 호송되고 있다.

군인·경찰 외에도 교사·판사까지 대대적 숙청

숙청 바람은 정부 조직에도 불었다. 터키 정부는 7월19일 하루에만 총리실 직원 257명, 내무부 8777명, 재무부 1500명, 종교청 492명을 해고하거나 직위 해제했다. 터키 국가정보국(MIT) 직원 100명도 직위 해제했다. 터키 정부는 귈렌과 관련성이 있다는 이유로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국 24곳의 허가도 취소했다. 나아가 에르도안 대통령은 7월20일 “군사 쿠데타 세력의 위협을 빠르고 효과적으로 제거하기 위해 3개월간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한다”라고 발표했다. 터키에서 국가 비상사태가 선포된 것은 2002년 이후 14년 만이다.

쿠데타 진압 이후 에르도안이 ‘제왕적 대통령’에 가까워지면서 친위 쿠데타 또는 자작극이라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파이낸셜 타임스〉는 7월19일 음모론자들이 주장하는 근거를 보도했다. 쿠데타 당시 에르도안 대통령은 서남부 휴양지 마르마리스에서 휴가 중이었다. 그가 쿠데타 발생을 인지한 뒤 전용기를 타고 이스탄불로 이동할 때 쿠데타 군의 F16 전투기 2대가 따라붙었다. 에르도안이 탄 전용기는 격추되지도 않았고, 몇 시간 만에 진압된 쿠데타 세력의 어설픈 작전도 석연치 않다는 것이다.

게다가 군 참모본부는 7월19일 “쿠데타 발발 5시간 전 국가정보국(MIT)으로부터 반란 모의가 진행 중이라는 정보를 받고 즉시 군에 장비 이동 금지와 기지 폐쇄 명령을 내렸다”라고 밝혔다. 쿠데타를 사전에 전혀 몰랐다는 에르도안 대통령의 설명과 상반된다. 쿠데타가 사전에 노출되었다면 에르도안 대통령에게도 보고되었을 것이고, 이를 귈렌파를 제거할 기회로 삼고자 방치한 ‘자작극’일 가능성도 있다. 〈파이낸셜 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정보업체 스트리트비스가 터키인 2832명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32%가 에르도안 대통령을 쿠데타 배후로 지목했다.

국제적으로도 이번 쿠데타의 여파는 적지 않다. 귈렌 송환을 둘러싸고 미국과 터키가 대립하면서 시리아·이라크 내 IS 제거에 나선 국제연합군 전력은 약해질 수밖에 없다. 또 쿠데타 세력에 대한 사형 부활을 에드로안 대통령이 공언하면서 미국·유럽 군사 동맹체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에서 터키가 배제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은 “나토는 민주주의에 관한 명백한 요구 조건을 갖고 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도 사형제 부활 움직임에 대해 쓴소리를 했다. 메르켈 총리는 에르도안 대통령과 통화하면서 “쿠데타 이후 대응 과정에서 법치가 준수돼야 한다. 사형제와 유럽연합(EU) 가입은 양립할 수 없다”라고 밝혔다. 페데리카 모게리니 EU 외교대표 역시 사형제를 도입한 국가는 EU에 가입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기자명 김영미 (국제문제 전문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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