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직으로 내리쬐는 땡볕은 강철로 둘러싸인 야드(작업장)를 더 뜨겁게 달궜다. 29.3℃로 치달은 7월21일, 경남 거제시 연초면 한내공단에 부는 후텁지근한 바닷바람만이 텅 빈 공간을 채웠다. 용접 불똥이 튀고 굉음이 울리는 대신 적막이 흘렀다. 회색 작업복을 입은 노동자는 점처럼 드문드문 보였다. 심정열 ㈜열정 대표(43)는 드넓은 야드를 바라보며 짙고 긴 한숨을 내뱉었다.

“몇 달 전만 해도 직원이 150명이었다. 지금은 가까스로 40명이 남아 있다. 4월부터 원청인 ㅅ사로부터 기성금(업무비)을 못 받고 있다. 직원 월급 두 달치는 빚을 내 지급했다. 내일까지 돈이 들어오지 않으면 이제는 공장 가동을 멈출 수밖에 없다”라고 심 대표는 말했다. 한내공단에서 7년째 경비를 서고 있는 김 아무개씨는 “(조선업은) 끝났다. 잘나갈 때만 해도 11곳이던 공장은 서너 곳만 남았다. 그나마 물량은 반 토막으로 줄었다. 일하는 사람은 전에 비해 3분의 1도 채 안 된다”라고 말했다.

조선소 작업 라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본사-하청(사내·사외 1차 협력사)-재하청(2차 협력사)-물량팀’ 식의 다단계 고용구조다. 거제에 위치한 대형 조선소 대우조선해양이나 삼성중공업은 1차 협력사인 ㅅ사 등에 물량을 넘긴다. 매년 낮아지는 단가는 올해 8%나 깎였다. 1994년 공단이 설립된 이래 단가 하락폭이 가장 컸다며 협력사 관계자들은 혀를 내둘렀다. ㅅ사는 2차 협력사인 ㈜열정 등 네 곳에 물량을 다시 넘겼다. 이 과정에서 단가는 또다시 15%가 깎였다.

ⓒ시사IN 조남진

34년간 조선업에 몸담은 한 1차 협력사 관계자는 “일이 끊기는 게 두려운 하청 처지에서는 원청이 요구하는 대로 인력을 투입해 작업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원청은 남는 게 없다며 하청의 사정을 ‘나 몰라라’ 하는 식이다. 중간에서 돈 흐름이 막히면 연쇄 도산은 시간문제다”라고 말했다. 1차 협력사인 ㅅ은 2차 협력사에 기성금 7억여 원을 지급하지 못했다. 이미 수개월 동안 임금 체불을 겪은 2차 협력사 직원 80여 명은 월급 지급 예정일인 7월20일에도 아무 소식이 없자, 다음 날 오전 공장을 떠났다. 2차 협력사인 ㈜열정의 심 대표도 결국 7월22일 공장을 멈추고 말았다.

거제 연초면 오비일반산단 내 대아기업 앞에서 만난 덩치 큰 사내 예닐곱 명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휑한 야드만 바라보고 있었다. 회색빛 작업복을 입고 있었지만 공구를 잡지 않은 지 3개월이 지났다. 이들은 ‘물량팀’ 노동자다. 물량팀은 ‘보따리’로 불린다. 10∼50명씩 팀을 짜 작업하고, 끝나면 업체를 옮긴다. 오비일반산단에서 만난 한 물량팀 노동자는 “호황일 때는 협력사 직원보다 1.5배 많은 시급을 받을 수 있어서 좋았다. 요즘처럼 일감이 없을 때는 퇴출 1순위다. 이제 갈 데가 없다”라고 말했다. 사업자등록을 하지 않은 물량팀 노동자는 법적 보호를 받을 길이 없다. 고용보험에도 가입돼 있지 않아 실업급여를 받기도 어렵다. 현재 조선업계에서는 물량팀 노동자를 2만명가량으로 추산하고 있다.

ⓒ시사IN 조남진7월21일 경남 거제 한내조선특화농공단지의 한 1차 하청업체 모습. 일감이 부족해 공장이 한산할 때가 많다.

번호표 뽑던 ‘맛집’까지 텅텅 비어

대아기업에서 일한 물량팀 노동자 100여 명은 1∼4월 임금을 받지 못하고 실직하고 말았다. 대아기업이 경기 악화를 이유로 법원에 법정관리를 신청하면서다. 대아기업은 대우조선해양의 1차 사외하청 업체였다. 대아기업 물량팀 노동자들은 지난 6월 회사 앞에서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허사였다. 원청도, 하청도 책임지는 시늉조차 없었다. 그사이 일부 노동자는 자취를 감췄다. 남아 있는 이들조차 “답이 없다. 떠나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라고 말했다.

대아기업 건너편 도로에는 거제시에서 후원하는 ‘비정규직(하청) 노동자를 위한 노동법 강좌’ 안내 현수막이 펄럭이고 있었다. 고용노동부 통영지청은 “올해 들어 6개월간 회사 폐업 등으로 임금을 받지 못했다고 신고한 노동자가 4269명이다”라고 밝혔다.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45% 급증한 수치다. 도산 등으로 퇴직한 노동자가 사업주로부터 임금 등을 지급받지 못한 경우 국가(고용노동부)가 대신 지급해주는 체당금은 올해 6월까지 6개월간 74억4000만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97.4%가 늘었다.

정규직 노동자의 목에도 구조조정 칼끝이 닿기는 마찬가지다. 협력업체보다 조금 느리고 덜 아프게 진행될 뿐이다. 상시 구조조정이 진행 중인 삼성중공업은 올해 사무직과 생산직 희망퇴직자가 1500여 명에 이른다. 2018년까지 현재 인력의 30∼40%를 줄일 계획이다. 3월 대우조선해양은 경영 정상화를 위해 2019년까지 직영 1만명, 협력사 2만명으로 전체 정원을 3만명 수준으로 줄이겠다고 공언했다.

ⓒ시사IN 조남진7월20일 경남 통영에서 열린 ‘조선업 노동자대회’.

거제시 인구 26만명 중 두 조선소 내 종사자 수는 8만5000여 명이다. 2, 3차 협력사 종사자 수치를 더하면 인구의 약 70%가 ‘조선밥’을 먹고 산다. 전입신고를 하지 않고 머무르는 뜨내기나 경남 타 지역이나 부산에 터를 잡고 ‘기러기’ 생활을 하는 이들까지 합하면 수치는 더 늘어난다. 불황 탓에 안정적인 일자리를 잡지 못한 노동자는 대부분 타지로 빠져나갔다. 일감을 쫓아 부산에서 거제로 온 지 3년째 되는 김 아무개씨(39)는 “하청이라 하더라도 재무구조가 탄탄한 곳이라면 거제에 뿌리를 내리고 살겠지만, 대다수는 수년간 바짝 벌어 타지로 나간다”라고 말했다. 거제시 조선경제과 관계자는 “2012∼2013년에는 경기가 좋아 비정규직 물량팀이 5만∼8만명이었다고 추산한다. 현재 3분의 1이나 4분의 1 수준으로 떨어졌다”라고 말했다.

일자리를 찾아 외부에서 온 이들을 대상으로 호황을 누리던 원룸은 공실이 하나둘 늘고 있다. 현재 시내에 위치한 원룸 건물당 공실이 최소 한 곳, 많으면 서너 곳에 이른다. 공단 인근의 원룸의 사정은 더 심하다. 풀옵션 원룸은 2년 전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 45만∼50만원을 받았지만, 이제는 월세 25만원에도 구하려는 사람이 거의 없다.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 인근에 위치한 한 부동산 중개업자는 “조선업 경기가 악화된 최근 1년 동안에는 거래가 예년에 비해 절반에도 못 미쳤다. 심지어 대우조선해양 비리까지 터지면서 옥포동 인근 아파트 매매까지 완전히 사라졌다”라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거제에서는 원룸 건물 16채를 보유한 집주인이 100억원대 전세보증금을 들고 잠적한 사건이 발생했다. 세입자 대부분은 조선소 협력사 노동자들이다.

7월19일 저녁, 지역 상권의 중심인 고현사거리는 지나가는 행인이 손에 꼽힐 정도로 휑했다. 카페와 음식점은 텅 비어 있었다. 유명 ‘맛집’으로 알려진 음식점 주인 이 아무개씨(48)는 “예전에는 번호표를 뽑을 정도로 성황이었지만, 지금은 예약도 없는 편이다. 단골로 지내던 대우조선해양 직원이 ‘줄초상이 예고돼 있어서 밖에 나와 웃으며 밥 먹기가 눈치 보인다’고 내부 분위기를 전했다. 그나마 정규직은 형편이 낫다. 하청업체 이름표가 박힌 회색 작업복 차림의 이들은 회식이나 간단한 술자리도 거의 없는 편이다”라고 말했다.

불황인데도 음식점이 늘어나는 기현상이 일어나기도 한다. ‘조선밥’을 먹은 이들이 음식점을 차리기 때문이다. 거제시에 등록된 일반음식점은 지난해 말 3764개로 1년 전에 비해 10.5% 늘었다. 장평동 삼성중공업 앞에서 호프집을 운영하는 김 아무개씨(54)는 10년 동안 삼성중공업 협력사에서 일하다가 음식점을 열었다. 그는 “4∼5년 전 물량이 50%대로 떨어지는 걸 겪으면서 조선업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2년 전에 옛 동료들을 상대로 음식점을 차렸다”라고 말했다.

7월20일 오후 7시 거제시 고현동, ‘대우조선해양’ 이름표를 붙인 통근버스가 회색 옷을 입은 노동자 수십명을 토해냈다. 특근이나 잔업이 사라지면서 퇴근도 빨라졌다. 거제 시내에는 ‘조선업계 구조조정, 26만 거제시민은 반대한다’ ‘정부는 장기적인 조선산업 육성대책 마련해라’ ‘조선아 힘내라 거제시민 파이팅’ 같은 현수막이 곳곳에 걸려 있었다. 최근 고현동 수협 앞에서는 주중, 주말을 가리지 않고 조선업계 구조조정을 반대하는 시위가 열린다. 조직화된 노동조합 소속 정규직 노동자는 파업도 하고 기자회견도 한다. 하지만 2차 협력사, 물량팀 등 하청 노동자는 도리 없이 ‘조선밥’ 먹기를 포기하고 일자리를 찾아 또 다른 곳으로 사라지고 있다. 불행하게도 거제에는 아직 최악의 상황은 오지 않았다.

기자명 송지혜 기자 다른기사 보기 song@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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