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을 공들인 영화 한 편이 극장에서 사라졌다. 6월23일 개봉한 <비밀은 없다>는 누적 관객수 25만명(7월22일 기준)에 그치며 막을 내렸다. 관객에게 충분히 평가받을 시간조차 없었다. 극장 개봉 첫 주말부터 ‘퐁당퐁당’ 시간표로 상영됐고, 2주차에 ‘극장 동시 개봉’ 타이틀을 달고 IPTV와 VOD 시장으로 직행했다. 극장에서 볼 때 최적화되도록 제작된 영상과 사운드는 너무 쉽게 그 의미를 잃었다.

상업영화의 성패를 가르는 건 흥행 성적이라지만 ‘그것만으로’ 영화를 평가하는 게 온당할까. 내가 보고 싶은 영화가 아니라 극장이 보여주는 영화를 봐야 하는 현실에서 흥행 성적으로 대변되는 시장의 평가라는 건 얼마나 믿을 만할까. 그래서 때로는 성공보다 실패가 더 많은 것을 드러낸다.

<비밀은 없다>는 흥행 실패라는 결과까지 포함해, 영화 안팎으로 ‘2016년 한국’이라는 시·공간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지문 같은 영화다. 몇몇 극장이 ‘이대로 보낼 수는 없다’며 상영을 이어나가고 있는 까닭이기도 하다. 손희정 연구원(연세대 젠더연구소)은 “어쩌면 한국 여성영화의 역사는 <비밀은 없다>와 다양한 텍스트들이 엉켜 있는 2016년 6월부터 다시 쓰일지도 모른다”라고 평한다.

<씨네21>(제1063호)은 <비밀은 없다> 특집 기사를 시작하며 이 영화의 재평가 가능성을 언급한다. “취향과 호불호의 문제를 떠나 이 영화가 이대로 잊혀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얼마간 시간이 흐른 뒤 이 영화가 주목받지 못한 걸작으로 다시 소환되었을 때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라도 좀 더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있다고 믿는다.”

한국 영화에 ‘드디어’ 도착한 낯선 여성들

이경미 감독은 단편영화 <거짓말> <기억> <오디션> <잘돼가? 무엇이든>에 이어 2008년 첫 장편영화 <미쓰 홍당무>로 인상적인 데뷔를 했다. <미쓰 홍당무>는 평단과 관객에게 고른 지지를 받았고, 이 감독에게 제29회 청룡영화상 신인감독상과 각본상을 안겼다. 이 감독의 ‘영화 인생’은 남들보다 조금 늦었다. 영화감독을 꿈꾼 적은 한 번도 없다. 고등학교 때부터 해온 연극을 반대한 아버지 때문에 대학에서는 러시아어를 전공했고, 졸업 후에는 3년 동안 해운회사에 다녔다. 그러다가 등록금도 싸고 수학능력시험을 안 봐도 되는 한국예술종합학교의 존재를 알게 됐다. 마침 휴가 기간과 시험 기간이 같아서 응시했는데 ‘덜컥’ 합격했다. ARS를 통해 합격자 발표를 듣던 순간이 아직도 생생하다. “정말 큰일 났네.” 수화기를 붙잡고 덜덜 떨었다.

ⓒ시사IN 윤무영

이경미 감독(사진)은 <비밀은 없다>를 “스릴러의 외피를 쓴 멜로”라고 규정했다. <비밀은 없다>는 누적 관객수 25만명을 기록하고 막을 내렸지만 영화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이뤄지고 있다. (※ 이 기사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미쓰 홍당무> 이후 8년 내내 <비밀은 없다>만 붙잡고 있었던 건 아니다. 아직 투자가 확정되지는 않았지만 박찬욱 감독의 차기작인 <도끼>의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했다. 애초 자신의 차기작으로 몇 년간 준비했던 <여교사> 시나리오는 엎어졌다. <비밀은 없다>의 최종 시나리오까지 합쳐 시나리오 버전만 50개가 넘는다. 불면증에 시달리는 와중에 집주인이 전세금의 80% 인상을 요구해 이사를 가는 예기치 못한 일도 두 번이나 있었다.

<비밀은 없다>의 첫 제목은 <불량소녀>였다. 이 감독이 가장 좋아하는 제목이기도 하다. 이후 <음모자들>로, <행복이 가득한 집>으로 몇 차례 더 제목이 바뀌었다. 최종적으로는 영화의 스릴러·추리물의 성격을 더 부각하기 위해서 지금의 제목으로 결정됐다. <미쓰 홍당무>가 투자에 애를 먹었던 반면, <비밀은 없다>는 여러 투자사에서 원했다. 배급도 CJ엔터테인먼트가 맡았다. 과정은 힘들었지만 출발은 좋았다. 그런데 이 초라한 성적표는 무슨 까닭일까.

“생각하자, 생각하자, 생각하자. 정신 똑바로 차리고 생각하자.” 극중 연홍(손예진)의 대사인 이 말은 평소 이 감독의 말버릇에서 나온 대사다. 실패의 이유에 대해 아직은 생각 중이다. 영화는 리스크가 큰 비즈니스다. 실패한 감독에게는 다음 기회가 잘 주어지지 않는다. 그런 부분의 걱정까지 포함해 이 감독은 생각하고 있다. 여러 요인이 복합적이라고 보지만 짚이는 건 있다. “<비밀은 없다>의 여자들이 좀 과격하다. 특히 자식 잃은 엄마의 슬픔과 고통을 표현하는 톤이 기존 영화들과 다르다.”

총선 보름을 앞둔 어느 날, 유력한 신인 정치인의 딸 민진(신지훈)이 사라진다. 그러나 딸을 찾아 나선 연홍이라는 어미에게서는 그간의 엄마 캐릭터가 답습해온 ‘엄마다움’이 없다. 연홍뿐만이 아니다. <비밀은 없다>의 여자들은 한국 영화에 ‘드디어’ 도착한 낯선 이들이다. 서럽게 우는 대신 화려하게 화장하고, 수사 기록을 내놓으라고 자해하고, 돈을 요구하고, 시체를 암매장하고, 자루에 사람을 넣어서 팬다. 그리고 말한다. “니를 죽이면 내가 지는 거다. 어디 한번 끝까지 살아봐라.” 이들 여성은 실종 사건의 주변이나 희생자가 아닌 ‘주체’로 존재한다.

이때 영화의 주요 소재처럼 홍보되었던 정치나 선거는 배경이자 도구로 전락한다. 선거에 출마한 종찬(김주혁)의 “여보, 나 오늘 노재순을 이겼다”라는 대사는 매우 하찮은 무엇이 된다. “이런 부분이 어떤 관객에게는 참을 수 없는 단점으로 여겨진다. ‘더 중요하게’ 다뤄져야 할 것들이 무시된다는 느낌일까. 그런 부분에서 쾌감을 느끼느냐, 느끼지 않느냐로 관객의 호오가 갈리는 것 같다.”

<비밀은 없다>의 캐릭터는 전형적이지 않다. 연홍(손예진 분, 위 사진 왼쪽)에게서는 ‘엄마다움’이 느껴지지 않는다.

 

지역주의, 빈부격차, 왕따, 동성애 등을 건드리는 데서 멈추지 않고 ‘세다’ 싶을 정도로 개연성 있게 밀어붙이는 것도 <비밀은 없다>가 가진 힘이다. 특히 ‘전라도’라는 지역 혐오 코드를 직접적으로 까발리는 부분은 백미다. “내가 평소 이 사회에서 부조리하다고 생각하고, 불합리하다고 여겼기에 이해하고 싶지 않은 여러 편견이나 현상을, 연홍이 맞닥뜨리고 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연홍이 ‘순결한’ 여자인가?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동시에 이 여성도 불합리와 부조리의 씨앗을 갖고 있으며 이 구조 속에서 가해자이기도 한 자신을 발견하는 과정을 담고 싶었다.”

종찬은 “아이들이 죽는다고 부모는 죽지 않는다”라고 말하지만, 연홍은 내내 “왜”라는 질문을 놓지 못한다. 어미가 사라진 새끼를 찾으려 몸부림치는 시간을 통과하는 동안, ‘왜’를 둘러싼 진실은 폭력적으로 드러난다. 사건을 해결하려는 연홍에 대한 주변의 냉소 역시 지금, 여기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반영한다. 미옥(김소희)이 돌돌 말아 비닐로 싸맨 ‘유서’를 품속에서 꺼내 연홍에게 건네는 장면을 이 감독은 가장 가슴 아픈 장면으로 꼽는다. ‘대통령님께’로 시작하는 유서는 적어도 나라만은 나를 지켜줄 거라는 믿음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 감독은 이런 장면 장면마다 세월호 참사의 영향이 있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오랜 시간 시나리오를 써오면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사건이다. 의도가 오해될 수도 있을 거 같아서 그동안 말하지는 않았는데… 어떻게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을까. 안산 분향소에 갔다가 희생자의 친구가 쓴 포스트잇을 봤다. ‘내가 복수해줄게, 그러니까 파이팅’이라고 쓰여 있더라. 그 문장이 내내 떠나지 않아서 시나리오에 썼다. 애초 결말은 상영본과 달리 민진의 유일한 친구인 미옥이 종찬을 차로 세 번 밀어 죽인 다음 연홍을 만나는 걸로 찍었다.”

마케팅은 스릴러와 추리물 쪽으로 방점을 찍었지만, <비밀은 없다>는 장르나 틀에 갇히지 않는 영화다. 굳이 따지자면 멜로에 더 가깝다. 이 감독 역시 “스릴러의 외피를 쓴 멜로”라고 말한다. “결국 사랑 이야기다. 시나리오를 쓰면서 한 사람의 마음에 가닿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가장 가까운 사람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게 얼마나 비극적인 일인지 생각을 많이 했다.”

미옥(김소희 분, 위 사진 왼쪽)은 슬픔에 빠져 있지 않고 친구를 위해 복수를 한다.

 

직접 작사에 참여한 OST도 발매

연홍이 딸 민진의 흔적을 찾아 헤매며 사건의 실마리를 찾는 과정은 더하고 뺄 것 없는 멜로다. 살아서 서로를 이해할 수 없었던 모녀는 미옥을 매개 삼고서야 ‘제대로’ 마주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연홍은 미옥에게 묻는다. “(민진이가) 지 엄마는 좋아하디?” “엄마는 멍청해서 지가 지켜줘야 한다고 했어요.” 대다수 모녀 관계의 딜레마가 이 대화 속에 담겼다. 엄마처럼 살고 싶지는 않지만, 이 가부장제의 구조 속에서 지키고 싶은 사람 역시 엄마니까.

<미쓰 홍당무>의 투자가 쉽게 이뤄지지 않았을 때, 이경미 감독은 박찬욱 감독에게 물었다. 오랫동안 마음에 품었던 질문이다. “투자가 이렇게 안 되는 건 제가 여자 감독이어서 그럴까요?” 박 감독은 “너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라고 되물었다. 그때 이후로 더는 그런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

여성 감독의 성취에 대해 주목하기보다 주변화하려는 평단의 움직임도 이 감독은 자신이 풀어야 할 숙제라고 생각한다. “많은 분들이 박찬욱, 나카시마 데쓰야(<갈증>) 두 감독의 영화와 비교를 하던데, 내가 만든 영화가 오롯이 내 전작들로 해석되는 상황까지 밀고 나가는 게 나의 숙제인 것 같다.” 세 번째 영화가 관객과 만나기까지는 8년이나 걸리지 않기를 이 감독도 바랄 뿐이다. 이 감독이 직접 작사에 참여한 영화 OST는 8월 초에 발매될 예정이다.

기자명 장일호 기자 다른기사 보기 ilhosty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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