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국어 시간에 이런 시 배운 적 있니? “한 손에 가시 쥐고 또 한 손에 막대 들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백발은 막대로 치려 했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고려 말 우탁이라는 사람의 시조야. 그런데 이 양반은 유머러스한 시조와는 달리 도끼를 어깨에 걸고 궁궐 앞에 엎드려 “내 말을 듣든지 아니면 이 도끼로 내 목을 치든지!”를 부르짖었던 지부상소(持斧上疏)의 원조였다. 고려 제26대 국왕이었던 충선왕은 충렬왕과 몽골 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었어. 아버지의 후처를 자식이 차지할 수 있었던 북방 민족의 풍습 때문인지, 그는 아버지 충렬왕의 후궁에게 눈독을 들였고 끝내 자신의 후궁으로 들어앉히고자 해. 백발을 몽둥이로 막느라 바쁘던 우탁은 이런 임금의 비행에 도끼를 들고 궁으로 향했어.

“전하께서는 부왕이 총애하는 후궁을 숙비에 봉했는데, 이는 삼강오륜에도 맞지 않을뿐더러 종사에 전례가 없는 패륜이옵니다. (중략) ‘신하는 간언을 할 때 목숨을 건다’고 했는데, 오늘 소신에게 터럭만큼의 잘못이 있다면 신의 목을 치시옵소서.”

ⓒ시사IN 조남진 7월15일 황교안 총리(가운데)가 사드 배치에 대해 설명하려고 성주에 갔지만 주민 반발로 무산됐다.

웬만한 왕국이라면, 신하가 이 정도까지 말한다는 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는 증거다. 아니할 말로 대놓고 임금에게 ‘호래자식’이라고 욕한 거잖아. 하지만 우탁은 살아서 물러나와 벼슬을 버리고 초야에 묻힌다. 이렇게 절대군주에게 자신의 할 말을 또박또박 하면서 몰아붙였던 것이 우리 역사상 소중한 상소(上疏)의 전통이야. 물론 폭군을 만나거나 임금의 비위를 심하게 거스른 경우 허무하게 목숨을 잃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하지만 민주공화국에서 상소 제도는 박물관으로 보내야 할 역사적 유물일 뿐이지. 만인지상(萬人之上)의 왕이 아니라 만인에게 봉사하는 대통령이 다스리는 나라에서, ‘꿇어 엎드려서’ 말할 일이 뭐가 있겠냔 말이야.

그런데 얼마 전 국가 기간방송사라는 KBS에서 사드에 비판적인 견해를 밝힌 논설위원과 정부의 언론 개입에 반대했던 기자가 한직으로 발령 나거나 제주도(제주총국)로 쫓겨났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빠는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이제는 상소가 다시 필요한 때가 됐구나. 다시금 권력자에게 반대하려면 비상한 용기와 특출한 배짱이 필요한 시대가 왔구나’라고 말이지. 그런 뜻에서 아빠는 오늘 우리 ‘여왕 전하’께 감히 상소문을 올려보고자 한다. 제목은 “請羅某之免責疎(청나모지면책소)”, 우리말로 바꾸면 ‘나 아무개씨의 책임을 면하여주시기를 청하는 소’.

신(臣) 아무개는 분연히 무릎 꿇고 아뢰나이다. 옛날 삼봉 정도전은 경복궁 근정전을 이름 지으며 ‘아침에는 정사를 듣고, 낮에는 어진 이를 찾아보고, 저녁에는 법령을 닦고, 밤에는 몸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 임금의 도리라 하였사오니 열심히 일할 뿐 아니라 편안히 쉬는 것도 왕으로서 응당 해야 할 일일 것이옵니다. 하오나 전하는 편히 쉬어야 할 때 굳이 해외를 분주히 다니시는 통에 건강을 해치고 나랏돈을 없애시니 이 중년의 신하 눈물이 앞을 가리고 소매를 적실 뿐이옵니다. 항차 백성들은 ‘다음은 남극에 가시려나 보다’라고 쑥덕거리고 있으니 이 어찌 황공한 일이 아니오리까.

오늘 소신이 둔한 몸을 이끌고 전하 앞에 엎드린 뜻은 얼마 전 백성들에게 개·돼지라 일컫고 ‘신분제를 공고히 하자’ 하였다가 그만 파면 위기에 몰린 나 아무개 교육부 기획관의 죄를 사하여주실 것을 청하고자 함이옵니다. 그의 언행이 너무나 괘씸하고 어이없는 것은 사실이오나 그 혼자 벌을 받기엔 너무나 억울해 보이는 점이 있어 삼가 전하께 아뢰는 것이옵니다.

우선 그는 그른 말을 했을지언정 사실과 다른 말은 하지 않았사옵니다. 신분의 공고화를 말하였으나 소리쳐 밝힌 가벼운 죄 있을 뿐이지 세상이 초저녁에 그렇게 변하였음을 어찌 부인하겠나이까. 심지어 대학의 교수라는 자가 “아인슈타인도, 스티븐 호킹도 다 한 표다. 백치 아다다, 벙어리 삼룡이도 다 한 표다. 이게 정상이냐”라고 물으면, 또 다른 교수가 “민주주의가 지배하는 사회는 천민이 지배하는 세상이고, 천민이 주인 된 세상이 민주주의다. 그래서 역으로, 민주주의가 지탱되려면 귀족이 그 척추를 이루어야 한다”라고, 이 나라 재벌들의 돈을 받아 운영되어왔다는 자유경제원 토론회에서 떠드는 세상이옵니다. 오히려 이들에 비하면 나 아무개의 죄가 가볍지 않사옵니까. 저 토론이란 것을 들으며 박수를 쳤을 개기름 흐르는 자들은 그들의 ‘노빌리티(nobility:귀족적 고귀함)’를 어루만지며 미소 짓지 않았겠사옵니까.

아파트 한 채 겨우 가졌던 검사가 몇 년 사이, 오피스텔 100채에 수백억 재산을 쌓고 탈세를 밥 먹듯이 하다 구속되었으되, 법정에 출두할 땐 법원 관리들이 우산을 펴서 그 얼굴을 가려주는 것이 당연한 세상이온데 어찌 나 아무개를 탓하겠나이까. 초년 검사 시절 단 4000원 이득을 본 암표상을 “죄질이 나쁘다”고 구속시킨 사람이 검사장에 올라, 공짜로 받은 주식으로 떼돈을 벌고 기업 수사 중단을 미끼로 처남에게 100억원대 일거리를 안겨주는 참람한 행각을 벌였다는 의심을 사고 있는데도, 거짓말을 할 대로 지껄이고, 증거 없앨 시간을 있는 대로 준 뒤에야 겨우 수갑을 그 손에 채우는 나라이온데 어찌 나 아무개만을 벌할 수 있겠습니까. 아아~. 나 아무개(羅某)가 그 노모의 품에 안겨 울부짖는 음성이 귀를 찌릅니다. ‘어머니 왜 나만 가지고 이럽니까!’

어찌 전하의 생각과 다르다 하오리까

또 하나 아뢰옵건대 나 아무개는 전하의 성지(聖旨)에 따랐을 뿐이옵니다. 제 자식 잃고 말 한번 들어달라고 울부짖는 가족들 앞을 눈길도 주지 않고 걸어가시던 전하의 모습이 생생하옵니다. 그들이 전하에게 들개보다 나은 점이 무엇이었겠사옵니까. 전하의 명을 받잡는 포졸들은, 비무장의 농민을 물대포로 쏘아 넘어뜨리고 나동그라진 위로 또 물을 뿌리고 앰뷸런스까지 따라가면서 쏘아댔는데, 그 잔인함이 어찌 인간에 대한 것이겠습니까. 멀쩡히 살아가던 한 가장을 식물인간으로 만들고도 사과 한번 하지 않는 마음이 어찌 사람을 향한 것이겠습니까.

아아~ 나 공(羅公)이여! 전하의 깊은 충신이여! 정녕 ‘민중은 개·돼지와 같다’는 나 공의 말은 전하를 향한 단심(丹心)이요, 충절의 표상이었던 것입니다.

전하께서 사드 배치를 발표하실 때의 옥음(玉音)을 기억하옵나이다. 아무런 양해도 검증도 없이 불쑥 성주를 최적지로 찍으시며 ‘국가 안위를 위해 지역을 할애해준 주민들에게 보답해야 된다고 본다’라고 하셨던바, 그 말씀이 정말 보답의 언사인지 무시의 표현인지는 알 길이 없었나이다. 또한 지금 연일 불만을 터뜨리며 ‘국가 안위를 위해 할애해주지 않는’ 주민들을 무엇으로 보고 계실지는 더더욱 모르겠나이다.

아니, 모르고 싶나이다. 알고도 모르고 싶나이다. 대화를 하겠다고 내려간 영의정 대감이 ‘탈출’을 감행하던 중, 대화를 요구하는 차가 가로막자 경찰이 나서 아이들이 타고 있는 차 유리창을 깨고 차로 들이받으면서 빠져나갔다 하니 이로 미루어 가까스로 짐작을 할 뿐이옵니다. 항차 나 아무개의 백성 대하는 생각이 어찌 전하의 그것과 다르다 하오리까.

다시 한번 아뢰옵건대 나 아무개의 충정을 헤아리시어 파면을 막으시고 전하의 인재로 무겁게 쓰시옵소서. 전하의 마음을 알고 입안의 혀처럼 움직일 충신을 어찌 개·돼지들이 짖는다고 자르시겠습니까. 아아~ 나 아무개는 정녕 유승민 공처럼 배신의 정치를 할 이도 아니요, 김무성 공처럼 옥새 소동을 벌일 위인도 아니며, 선왕처럼 “나도 못했지만 나보다 더 못한다”라고 등 뒤를 찌르는 부류도 아닌, 전하의 충신임을 굽어 살펴주시옵소서.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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