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 생활한 지난 시간을 떠올리면 수많은 아이들 모습이 눈앞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그 아이들 가운데 도드라지는 얼굴은 유난히도 속을 많이 썩인 아이들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친구와 싸우는 아이, 말끝마다 욕을 달고 사는 아이, 수업시간에 소리를 지르며 교실을 돌아다녀 수업을 할 수 없게 만드는 아이….

교단에 서고 첫 몇 년 동안은 아침에 출근할 때마다 버스 운전석 앞에 걸린 ‘오늘도 무사히’라는 문구가 남의 일이 아니었다. 때로는 밤을 새워 찾아본 아동심리학이나 문제행동 상담 사례에도 없는 아이들이어서 내 능력으로는 정말 어쩔 수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쩌다가 그 아이가 아파서 결석이라도 하면 정말 미안하지만 마음속으로 만세를 불렀다. 그날 하루는 내 마음은 물론 교실에도 평화가 충만한 날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잠시, 그런 내 모습이 선생으로서 큰 죄를 짓는 기분이 들어 퇴근길 막걸리 잔을 앞에 두고 자책하기도 했다. 이래저래 그 아이들은 아직 햇병아리 교사인 나를 흔들어댔다.

ⓒ박해성 그림

그러나 교사 냄새가 제법 날 정도의 경력인 10년이 넘어서는 그 아이들이 밉지 않았다. 이전보다 더 심한 아이들을 만났는데도 말이다. 오히려 그 아이들도 언젠가는 변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내가 담임을 하는 1년 동안이 아니어도 3년 뒤, 10년 뒤라도 변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내 친구 때문이었다.

아이들이 내 품에서 변하는 ‘교사의 행복’

친구가 살아온 이력을 말하자면 아닌 게 아니라 소설책 몇 권은 될 것 같다. 친구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문제아였다. 앞에 앉은 아이 머리를 연필로 찌르거나 주먹으로 쥐어박거나 해서 당한 아이 할머니나 어머니가 복도에 와서 지켜야 할 정도였다. 중학교 다닐 때도 문제아였다. 물론 공부하고는 담을 쌓은 친구다. 우리는 초등학교 때부터 한자를 배운 세대다. 그런데도 자기 이름을 한자로 쓰지 못했다. 중학교 졸업하도록 영어 알파벳을 처음부터 끝까지 쓸 줄도 몰랐다. 당연히 고등학교에 진학할 실력은 안 되고 가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친구는 읍내는 무대가 좁다며 서울로 진출했다. 아마도 청량리역 정도는 평정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서울에 와서 친구의 삶에 반전이 일어난다. 한 여학생 때문이다. 자기 이름도 한자로 쓰지 못할 정도의 무식함을 여학생 앞에서 드러냈고, 그것이 친구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 천자문을 외워 자존심을 찾았나 했는데 그 여학생은 고졸 검정고시를 볼 것을 권유했다. 공부라면 질색인 친구는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식으로 공부해서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또 여학생은 대학 진학을 주문했고, 친구는 대학에 갔다.

친구가 대학을 다닌다는 소문이 고향 읍내에 퍼졌을 때, 사람들은 ‘그 녀석이 대학을 가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는 사람도 있었다. 친구를 잘 아는 고향 사람들이 볼 때는 정말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게다가 친구는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의 한 사립중학교 교사가 되었다. 그것도 도덕 교사로 말이다. 거의 한 편의 인생역전 드라마다. 친구는 교사로 생활하는 동안 문제아를 포함해서 많은 아이들의 삶을 다독였다. 자신도 문제아 경력이 있었으니 학생들이 어디가 아픈지 잘 알았을 것이다. 지금도 그때 제자들이 친구를 찾는 걸 봐서 멋진 교사였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이 친구 이야기를 그동안 이런저런 일로 전국의 수만명 교사들에게 들려준 것 같다. 어떤 문제아라도 변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보듬어달라고. 내 친구를 변하게 한 그 여학생처럼 지금 고통스럽게 만나는 그 아이에게 따뜻한 삶의 멘토가 되어달라고. 내 친구는 학교 울타리 밖에서 한 여학생 때문에 변했는데, 아이들이 학교에서, 그것도 내 품에서 변한다면 교사로서 더 이상의 행복이 없지 않겠느냐고 말이다.

기자명 이중현 (남양주 조안초등학교 교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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