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철 교수의 신작 〈아름다움의 구원〉을 읽는다. 그가 이 책을 통해 주장하고자 하는 바는 대략 다음과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러니까, 어느새 진정한 아름다움은 ‘매끄러움’과 ‘긍정성’의 깃발 아래 폭력적으로 거세의 운명을 맞이했으며, 이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그것의 반대자, 즉 ‘부정성’을 재소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매끄러움은 곧 긍정성을 상징하고, 오로지 긍정성으로만 채색된 사회에서 부정적인 것들은 퇴출되기 마련이다. 무엇보다 페이스북의 ‘좋아요’ 버튼으로 상징되는, 가속화된 소통에 방해된다는 이유에서다.

책을 읽으며 나는 이러한 주장이 우리 대중음악의 현재 꼴과 아주 닮아 있다는 생각에 가닿았다. 어느새 부정적이고 어두우며 우울하고 굽이치는 세계관을 지닌 음악은 구석으로 밀려나고, 오로지 긍정적이고 밝으며 화려하고 직관적으로 와닿는 음악만이 환영받는 세상 아닌가. 텔레비전을 켜보라. 거기에서 보고 들을 수 있는 음악에 부정성이라고는 거의 없다. 한병철 교수가 적시해서 예로 든 제프 쿤스의 예술처럼 케이팝으로 상징되는 한국 대중음악은 듣는 이들에게 어떤 거부감이나 저항성을 느끼게 하지 않는 것에 목적을 두고 있는, ‘좋아요’의 예술이다.

이런 음악에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이 지면을 통해 수시로 아이돌 음악에 찬사를 보냈을 이유가 없다. 문제는 대중에게 가서 닿는 음악의 ‘거의 대부분’이 이런 음악이라는 데 있다. 게다가 잊을 만하면 새롭게 등장하고, 기억할 만하면 어느새 사라지고 없는 무한경쟁의 무한궤도 속에서 그저 도돌이표만을 왕복하고 있다. 이뿐이 아니다. 이런 음악들에 어떤 해석을 가하려고 하면 “그냥 닥치고 즐겨라” 하는 독후감이 줄을 잇는다. 하긴, 오로지 감탄사만을 요구하는 음악, 쾌적함만을 제공하는 음악, 듣는 이들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듣는 이들을 포옹하기만 할 뿐인 음악. 이런 음악을 해석하려는 행위 자체가 언어도단일지도 모른다.

ⓒ잠비나이 카페밴드 잠비나이는 국악기의 기묘한 울림에 강력한 록·메탈 사운드를 결합했다.

그럼에도 내가 열광적으로 지지하는 음악의 제목들을 훑어본다. 제프 버클리의 ‘그레이스(Grace)’, 라디오헤드의 ‘패러노이드 안드로이드(Paranoid Android)’, 드림 시어터의 ‘더 비거 픽처(The Bigger Picture)’, 이소라의 ‘금지된’, 윤상의 ‘가려진 시간 사이로’. 이 외의 수많은 곡들. 혹여 지겨워질까 봐 정말이지 아껴 듣는 음악들이다. 오직 특별한 순간에만, “혹시 이번에 한 번 더 들으면 조금이라도 물리지 않을까” 두려움에 떨며 감상하는 곡이다.

“어려워” 혹은 “충격적인데?”

이런 음악, 최근에도 하나 만났다. 잠비나이라는 밴드의 앨범 〈은서(隱棲)〉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잠비나이는 국내보다 해외 스케줄이 더 많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들은 국악기의 기묘한 울림에 강력한 록·메탈 사운드를 화학적으로 결합해내 주목을 받았고, 결국 해외의 유명 레이블과 계약을 체결하고 이번에 바로 이 새 음반을 발표했다. 반드시, 이 글을 먼저 읽고 유튜브에 들어가 앨범의 수록곡인 ‘그들은 말이 없다’의 뮤직비디오를 보기 바란다. 당신의 반응은 둘 중 하나일 게 분명하다. “어려워” 혹은 “충격적인데?”

음악학자 알렉스 로스의 주장처럼 “훌륭한 음악은 듣는 이들이 예상하는 바를 미리 꿰뚫고는 의기양양하게 잘못된 방향으로 자신을 틀어버린다”. 한병철 식으로 바꿔 말하면 “예술적 특수성을 통해 일어나는 것은 하나의 타격이며, 타격으로 인한 쓰러짐”인 것이다. 얼마 전 유명 음악평론 사이트 올뮤직가이드는 잠비나이의 〈은서〉에 별 4개를 부여했다. 부디 위에 언급한 두 가지의 반응 중에서 당신은 후자이기를 바란다. 강렬한 타격과 쓰러짐 속에서 새로운 세상이 벼락처럼 열릴 것이다.

기자명 배순탁 (음악평론가∙〈배철수의 음악캠프〉작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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