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배 로드 암허스트 호가 충청도 홍성 근처 해안에 닻을 내리고 조정에 통상을 요구한 것이 1832년이었다. 통상을 요구한 최초의 이양선이었지. 로드 암허스트 호는 수십 일 동안 조선에 머무르면서 조선인들과 접촉했어. 배에 한자를 쓸 줄 아는 사람이 탑승해 있어서 주민들과 필담(筆談)을 나누기도 했지. 조선 사람들은 어렴풋이 들어봤던 ‘영길리(英吉利:잉글랜드)’라는 나라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게 된다(최초로 ‘영길리’라는 이름이 조선 사람들에게 알려진 건 이수광의 〈지봉유설〉을 통해서였을 거야). 공충도 감사(충청도 감사)는 로드 암허스트 호와 접촉한 홍주 목사 및 수군 지휘관의 보고를 바탕으로 상세한 장계를 조정에 올렸지. 지금 읽어보면 슬며시 웃음이 나오기도 하는 내용이야.

“국명은 영길리국(英吉利國) 또는 대영국(大英國)이라고 부르고, 난돈(蘭墩:런던)과 흔도사단(忻都斯担:인도의 힌두스탄)이란 곳에 사는데, 영길리국(잉글랜드) 애란국(愛蘭國:아일랜드) 사객란국(斯客蘭國:스코틀랜드)이 합쳐져 한 나라를 이루었기 때문에 대영국이라 칭하고, 국왕의 성은 위씨(威氏:윌리엄 4세)라 하며….”

어떠니? 임금에게 영국이란 나라를 설명하려는 목적으로, 로드 암허스트 선원들 앞에 앉아 눈을 빛내며 귀를 쫑긋 세웠을 조선 관리들 모습이 상상되지 않아?

하지만 로드 암허스트 호의 마스트에서 휘날리던 유니언잭(영국 깃발)은 결코 평화와 친교의 상징만은 아니었다. 로드 암허스트 호가 조선을 방문한 8년 뒤 유니언잭은 지극히 불명예스러운, 하지만 역사적인 전쟁터에서 기세 좋게 휘날리게 되니까. 바로 ‘아편전쟁’에서.

ⓒ위키미디어1841년 아편전쟁 당시 청나라 푸젠성 샤먼을 점령한 영국군의 모습을 그린 기록화.

청나라의 막대한 경제력 앞에 만성적인 무역적자를 기록하던 영국 상인들은 기발한 수출 상품 하나를 개발해냈지. 바로 아편이었어. 중독성이 강한 데다 거듭할수록 점점 더 많은 양을 흡입해야 하는 지독한 성질의 아편은 삽시간에 청나라 전역을 휩쓸었다. 청나라가 재놓고 있던 은(銀)이 대량으로 영국인들의 호주머니에 흘러들어 갔지. 황족들까지 아편에 코를 벌름거리고 가난한 사람들은 아편을 위해 가족까지 팔아먹는 아수라장이 펼쳐졌다. 청나라 황제는 임칙서라는 관리를 아편의 유입 창구인 광둥으로 파견했어. 임칙서가 단호하게 아편을 압수하고 관련자들을 추방하자, 이를 영국 정부는 ‘청나라의 도발’이라며 전쟁을 선포하게 돼.

웰링턴 공작, 그러니까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을 격파했던 영국 귀족의 말을 들어볼까. “50년 공직 생활에서 영국 국기가 청나라 광둥에서처럼 모욕당하는 일은 본 적이 없습니다.” 웰링턴 공작에게 마약상들 머리 위에 휘날리는 유니언잭이 그렇게 명예롭더냐고 묻고 싶다. 그러나 영국 사람들 가운데에도 젊은 하원의원 글래드스턴 같은 진짜 신사들이 있었어. “그 기원과 원인을 고려해볼 때, 이 전쟁만큼 부정한 전쟁, 이 전쟁만큼 영국을 불명예의 늪에 빠뜨릴 전쟁을 나는 이제껏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파머스턴 외무장관(이 사람도 이후의 총리로 2차 아편전쟁을 지휘하게 되지)은 다음과 같은 유명한 좌우명을 지닌 사람이었다. “우리에겐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 다만 영원한 국가 이익이 있을 뿐이다.”

영국은 이익을 위해 불명예를 감수했고 ‘잠자는 사자’ 청나라는 ‘잠자는 돼지’로 전락하고 말았어.

19세기 중반과 후반, 영국의 최대 적수는 러시아였어. 인도를 애지중지하던 영국은 러시아가 남하할까 봐 노심초사했다. 러시아는 아편전쟁 때 중재를 했다는 명분으로 냉큼 오늘날의 연해주를 집어삼켰어. 부동항(不凍港), 즉 얼지 않는 항구를 향한 야욕을 본격화한 거지. 영국은 이런 러시아가 동북아시아에서 자국의 이권을 침해할까 봐 눈에 불을 켜고 있었다. 어떤 이들은 중앙아시아에서 북서태평양에 이르는 영국과 러시아의 충돌을 ‘그레이트 게임’이라고 부르기도 해. 이게 바로 ‘거문도 사건’의 역사적 배경이야. 너도 국사 시간에, 영국 해군이 우리 남해의 거문도를 점령한 거문도 사건에 대해서는 배웠을 거다. 그러나 영국이 왜 그랬는지는 정확히 모를 거야.

ⓒ독립기념관 제공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주장하다 영일동맹의 벽에 부딪치자 자결한 이한응 열사.

러시아 남하를 막기 위해 거문도 무단 점령

1885년 3월 러시아군은, 영국이 앞세운 아프가니스탄 군대를 전멸시키면서 이 나라로 들어간다. 왕년의 젊은 ‘아편전쟁 반대파’ 의원에서 총리의 자리에 오른 글래드스턴은 주먹을 쥐고 부르짖어. “우리 제국의 일부인 인도와 이웃한 아프가니스탄의 주권을 놓고, 우리의 권위와 신념을 지키기 위해 러시아와 전쟁을 불사할 것이다.” 1885년 4월9일의 연설이다. 영국 함대는 이로부터 불과 엿새 뒤에 냉큼 거문도에 상륙했어. 목표는 러시아 태평양 함대의 항로에 뾰족한 못을 박아넣는 것이었다.

슬프게도 조선 정부는 거문도 점령 소식을 청나라로부터 들었다. 당시 조선은 영국과 이미 외교관계를 맺고 있었어. 그러나 영국은 청나라와 일본에 점령을 통보하면서도 조선엔 일언반구도 없었다. 더 슬픈 이야기는, 조선 정부가 거문도가 어디 있는 섬인지 몰라서 한참 동안이나 헤맸다는 거야.

영국은 강적을 상대하는 경우엔 항상 동맹 파트너를 만든다. 19세기 말 당시, 영국이 동맹국으로 선택한 나라는 일본이었어. 역시 ‘그레이트 게임’의 일부였지. 영일동맹은 영국의 ‘영원한 벗’인 ‘국가 이익’을 지키는 성벽 중 하나였다. 영국의 국가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 ‘대한제국의 외교권’ 따위는 무시했다. 영국 신사들에게 ‘오로지 영원한 건 국가 이익’뿐이었거든. 을사늑약이 체결된 뒤 외교권이 상실된 나라의 불우한 외교관으로 영국 신사들에게 일본의 횡포를 고발하던 대한제국 외교관 이한응을 두고 영국 외무상은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려.

“대한제국 대리공사에게 영국의 극동정책은 영일동맹에 근거하며 또 다른 ‘양해’는 있을 수 없음을 납득시킬 것.” 이한응은 자결을 택하고 말지.

며칠 전 영국인들은 또 한 번의 역사적 결정을 내렸다. 너도 최근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을 ‘브렉시트’다. 영국인 과반수가 유럽연합(EU)으로부터 이탈하는 쪽에 투표한 거지. 이 결정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수용되고 어떤 경로로 진화할 것인지, 아빠는 잘 모른다. 하지만 영국인들이 어느 쪽이든 “영원한 건 영국의 이익”이라고 생각하면서 한 표를 던졌으리라 본다. 물론 그 결정이 멍청했다 하더라도 말이지.

브렉시트 관련 뉴스를 심각하게 지켜보다가 문득 우리나라 뉴스로 넘어오니, 재벌그룹 형제가 피 터지게 싸우는 가운데 어떤 기관장이 ‘천황폐하 만세’를 우렁차게 봉창하고, ‘위대한 우리 상고사 타령’이 고고하게 들려오는구나. 변호사 생활 몇 년 만에 오피스텔 100채를 사들인 전직 검사이자 재테크의 1인자 및 그와 쌍벽을 이루는 검사장의 소식은 어느새 사라지고 말았네.

영국이 ‘그레이트 게임’을 벌이며 거문도를 점령하던 1885년, 오늘날의 서울 명륜동에는 〈삼국지〉에 나오는 관우를 모시는 ‘북묘’라는 사당이 만들어졌다. 북묘를 세운 이는, 자신이 관우의 딸이라고 우겼던 무당 진령군. 당시 차별의 대상이던 무속인이 자그마치 군(君) 칭호를 받은 이유는, 그녀가 민비의 철석같은 신임을 얻고 있었기 때문이야. 영국 함대가 국토를 점령하고 눌러앉으려던 때 세자의 건강을 빈답시고 금강산 1만2000개 봉우리마다 재물을 쌓아놓고 굿을 한 무당은 역시 나랏돈으로 자기 ‘아버지’ 사당을 짓고 있었단다. 뭐 그걸 생각하면 오늘의 우리는 조금 나아졌다고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영원한 친구도 적도 없는” 세상에서 우리의 영원한 벗인 ‘이익’을 제대로 찾아가고 있는 것일까.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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