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이변은 없었다. 최근 미국 남부 플로리다 주 올랜도에서 벌어진 최악의 총기 난사 사건으로 미국 의회에 한꺼번에 상정된 4건의 총기 규제 법안들이 모두 부결되고 말았다.

총기 규제 법안이 부결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어린이 20명과 어른 6명의 목숨을 앗아간 2012년 코네티컷 주 초등학교 총기 난사, 지난해 12월 캘리포니아 주에서 14명이 숨진 샌버너디노 참사 직후에도 총기 규제 법안이 의회에 상정됐지만 부결되었다.

하지만 이번 올랜도 참사로는 뭔가 변화가 있으리라 예상됐다. 총기 규제에 대한 여론이 과거 어느 때보다 거세고, 분노한 여론을 의식한 민주·공화 양당이 각각 2건씩 모두 4건의 총기 규제 법안을 발의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6월20일 상원 표결에서는 가결에 필요한 60표가 나오지 않았다. 민주·공화 양당은 총기 규제 법안을 실제로 통과시킬 의지도 없으면서 올가을 대선을 앞두고 민심 무마용 꼼수나 썼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사실 이번에 상정된 법안이 예전에 통과됐다면, 오마르 마틴(올랜도 참사의 범인)처럼 연방수사국(FBI)의 수사를 두 번씩 받고도 총기를 구입하는 경우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민주당 다이앤 파인스타인 상원의원이 발의한 법안은 과거 5년간 테러 감시 명단에 오른 사람이 총기를 구입하려면 법무장관의 승인을 얻도록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공화당 존 크로닌 상원의원이 트집을 잡았다. 누군가 테러 감시 명단에 잘못 들어갈 경우 헌법에 보장된 시민의 총기소유권을 침해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크리스 머피 상원의원 등이 공동 발의한 또 다른 법안은 총기 구매자의 신원조회 강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러나 공화당 척 그래슬리 상원의원의 반대로 좌절되고 말았다.

ⓒAP Photo6월22일 민주당 하원의원들은 총기 규제 입법을 촉구하며 26시간 동안 연좌농성을 진행했다.

도대체 전쟁터에서나 사용되는 살상용 총기에 시민들이 수십명씩 희생되는 사건이 빈발하는데도, 미국 의회가 총기규제법 하나 제대로 만들 수 없는 이유는 뭘까?

최근 ‘민심’을 보면, 미국 의회가 어떻게든 총기 규제에 나서야 한다는 명분은 분명하다. 지난해 12월 샌버너디노 사건 직후 퀴니팩 대학이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당국의 테러 감시 명단에 포함된 사람에게 총기를 판매해선 안 된다는 응답이 무려 83%로 나타났다. 친민주 유권자는 89%, 친공화 유권자도 77%가 찬성했다. 갤럽이 실시한 여론조사도 비슷했다. 당국이 테러 위험을 근거로 작성한 비행기 탑승금지 명단에 든 사람에게 총기를 판매해선 안 된다는 응답도 71%에 달했다.

이런 민심에도 불구하고 총기 규제 법안들이 번번이 부결되는 이유가 있다. 2012년 코네티컷 주 초등학교 참사 뒤 여론조사 기관 퓨리서치가 발표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총기 규제론자보다 ‘총기소유권 옹호론자’들이 훨씬 열정적이고 참여적으로 정치 활동을 벌이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관련 시민단체에 대한 기부’ ‘지역구 정치인과의 소통’ ‘청원서 서명 및 소셜 미디어를 통한 의견 개진’ 등의 활동을 수치화한 항목에서, 총기소유권 옹호론자들이 규제론자들에 비해 4~5배 높은 점수를 얻었다. 총기소유권 옹호론자들의 구심점은, 총기 문제에 관한 한 무소불위의 영향력을 행사해온 미국 최대의 총기 로비단체인 전미총기협회(NRA)다.

ⓒAP Photo전미총기협회에서 연설하는 도널드 트럼프.

열성파 총기소유권 옹호론자들의 힘이 얼마나 센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일화가 있다. 6월12일 올랜도 총격 사건이 터진 뒤 공화당의 사실상 대선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가 공화당 기존 입장과 달리 총기 규제를 지지했다가 불과 며칠도 못 가서 번복했다. 트럼프는 6월19일 CBS 방송의 시사 프로그램 〈국민과의 대면〉에서 총기 규제에 강력히 반대해온 NRA에 대해 “우리나라의 이익을 최고로 잘 지키는 훌륭한 사람들”이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트럼프가 이처럼 바짝 꼬리를 내린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1871년 설립된 NRA는 2013년 5월 현재 전국적으로 500만명 이상의 고정 회원을 거느린 미국 최대 로비단체다. 말이 로비단체이지 실상은 무시무시한 정치적 힘을 행사한다. 선거 때만 되면 총기 규제에 찬성하는 의원들을 겨냥해 강력한 낙선운동을 펼치기 때문이다.

실제로 NRA의 크리스 콕스 집행국장은 트럼프가 CBS에 출연한 그날, ABC 시사 프로그램 〈디스 위크〉에 나가서 “총기 규제에 찬성하는 의원들은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위협했다. 오는 11월 상원의원 3분의 1, 하원의원 전원을 새로 선출하는, 대선과 동시에 시행되는 중간선거를 감안할 때, NRA의 위협을 무시할 수 있는 현역 의원, 특히 공화당 의원은 거의 없다. 〈뉴욕 타임스〉가 총기 규제 법안의 부결에 대해 “올해 중간선거에서 당선 여부가 위태로운 공화당 현역 의원들이 NRA 노선을 거역할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지적한 것도 이 같은 현실을 방증한다.

NRA 못지않게 미국인의 총기 소유욕도 큰 문제다. 집에 총을 보유한 미국 가구는 전체의 3분의 1에 달한다. 물론 미국 가구의 총기 보유 비율은 감소 추세다. 1975~1980년에는 50%까지 치솟았지만, 이후엔 차츰 줄어들어 2010년엔 총기 비보유자가 보유자를 2배나 앞질렀다. 그런데도 총기 사고는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 미국 역사에 기록될 만한 대형 사고 12건은 모두 2007년 이후 발생했다. 그런데도 갤럽의 여론조사 추세를 보면 ‘현행보다 훨씬 엄격한 총기 규제’에 대한 찬성률이 50%에 미치지 못한다.

총기에 민감한 보수 유권자들 건드렸다가…

올랜도 참사 직후 제출된 4건의 총기 규제 법안이 부결되고 말았지만 아직 한 가닥 희망이 남아 있다. 공화당의 대표적 온건파 수전 콜린스 상원의원이 마련한 법안이 표결을 앞두고 있다. 콜린스 법안의 핵심은, 항공기 탑승이 금지되거나 추가 보안 검색이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사람은 총기를 구입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이다. 다만 총기를 구입할 수 없는 본인은 법원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고 승소하면 모든 소송 비용을 변제받는다.

민주당은 콜린스 법안에 긍정적이지만 오히려 공화당의 동료 의원들이 부정적인 것으로 알려졌다. 게다가 하원을 장악한 공화당의 폴 라이언 의장은 설령 콜린스 법안이 상원을 통과해 하원으로 넘어와도 서둘러 처리할 의사가 없다고 확언했다. 올가을 의회 중간선거가 5개월도 채 남지 않은 시점에 굳이 총기 문제에 민감한 보수 유권자들을 자극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보인다.

현재 미국 46개 주에서 총기 폭력의 생존자들 중심으로 구성된 ‘생존자 네트워크’ 소속 자원봉사자 1000여 명이 총기 규제 운동을 벌이고 있다. 생존자 네트워크는 점차 활동 영역을 넓히면서 세간의 주목을 끌어내고 있다. 하지만 총기 규제 문제가 지금처럼 정치 논리에 휘둘리는 한, 성인 한 사람이 거의 한 자루씩 가질 수 있는 총기류 3억1000만 정이 떠도는 미국 사회에서 제2, 제3의 올랜도 사건의 예방은 극히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기자명 워싱턴∙정재민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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