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 스토리


‘EU 탈퇴’라 쓰고 ‘이민 반대’라고 읽는다

해가 진 영국 ‘증오 프로젝트’에 기대다

영국 총리 후보로 꼽히는 인종차별주의자

‘EU 탈퇴’ 세계 금융공황 올까

트럼프와 브렉시트는 쌍둥이?

 

한쪽은 변화를 내세우고 다른 쪽은 현상 유지를 주장한다. 모험에 나서는 ‘길(Leave)’은 불안해 보이긴 하지만 그만큼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면이 있고, 지금 ‘이대로(Remain)’라는 건 캠페인이라 부르기도 어색하다. 시작은 현상 유지가 6대4로 앞섰지만 뚜껑이 열리자 전세(戰勢)는 순식간에 역전되고 말았다.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브렉시트(Brexit, Britain+Exit) 국민투표 이야기다.

현재의 시스템으로부터 손해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쪽, 변화를 갈망하는 쪽은 언제나 휘발성이 강한 다수다. 안정을 꾀해야 할 집권당으로서는 애초부터 가지 말아야 할 길이었다. 차기 보수당 리더를 자임하는 보리스 존슨 의원이 총리와 각을 세우더니 최고법원장을 겸하는 법무장관, 환경장관, 국방부 부장관 등 내각 각료들까지 탈퇴를 주장하고 나섰다.

브렉시트 국민투표 논쟁의 시발은 2014년 선거가 결정적이었다. 그해 영국의 유럽의회 의원(MEP) 선거는 1910년 이후 무려 104년 만에 보수당과 노동당 양당이 다수당 자리를 내어준 첫 전국선거였다. 당명에서부터 ‘영국 독립’을 내건 영국독립당(UKIP)은 EU 탈퇴를 내세워 유럽 의회의 다수당을 차지하는 아이러니를 연출했다. 이민자에 대한 인종차별적 발언도 서슴지 않는 극우파 정당이었다.

ⓒAFP나이절 패라지 영국독립당(UKIP) 대표(가운데)는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가 브렉시트를 이슈화해 국민투표에 올리도록 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2000년 선거에서 과반 확보에 실패해 자민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하고 있던 보수당으로서는 새로운 표밭으로 여길 만했다. 18년 만에 보수당 단독정부 구성을 노리던 그 이듬해 총선, 캐머런 총리가 EU 탈퇴 국민투표 공약을 내건 것은 실체로 증명된 EU 회의주의자를 유혹하는 도박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 도박은 보수당 절반을 더 오른쪽으로 몰고 극우파들에게 강력한 지지 기반을 만들어준 자충수가 되고 말았다. 극우파에 EU 회의주의자가 붙고 모든 기성의 것에 대한 심판의 표심까지 가세했다.

탈퇴로 기우는 여론조사에 놀란 재무장관은 브렉시트가 결정되면 300억 파운드(약 54조원)의 세금을 더 걷어야 한다는 협박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모험’에 나서는 쪽의 관심은 애초부터 경제도 일자리도 아니었다. 영국 경제는 유럽 경제공동체(EEC·EU 전신)에 가입한 1973년 이후 40여 년 동안 1인당 GDP는 103% 성장했고 2016년 현재 실업률은 EU 평균(8.9%)을 훨씬 밑도는 5%에 불과하다. EU 회원국은 물론이고 미국의 연방준비제도와 거의 모든 경제기관, 연구자들이 한목소리로 EU 잔류가 영국에 이득이라고 증언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투표가 ‘잉글랜드 독립운동’으로 여겨진 까닭

여기에 브렉시트 진영에게 진정한 공포의 대상은 한 해 37만명에 이르는 이민자 규모다. 사실상 이민자들이 지금 영국 경제성장의 견인차 구실을 해왔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역시 일자리나 경제 이슈가 아니다. 주권과 자율성 같은 그럴듯한 수사를 걷어내면 결국 ‘정치’다. 이들은 누가 ‘지배’할 것인가 묻고 있다. 다만 문제는 이들의 관점에서 정치가 지배와 피지배의 배타적 구도에서만 작동한다는 점이다.

ⓒEPA83세의 여배우 실라 핸콕은 투표 전날까지 TV 토론에 나와 ‘EU 잔류’를 역설했다.

브렉시트를 주창한 영국독립당의 실체를 지적해두는 것도 의미 있다. ‘영국’독립당이라고 하지만 이들은 엄밀하게 말하자면 잉글랜드·스코틀랜드·웨일스·북아일랜드로 구성된 연합왕국(United Kingdom)에서 잉글랜드의 극우 민족주의 분파에 가깝다. 2014년 선거에서도 잉글랜드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서 영국독립당의 의석은 스코틀랜드·웨일스에서 각 1석을 차지하는 데 그쳤다. 잉글랜드 밖에서 영국독립당이 주도하는 브렉시트, EU 탈퇴는 애초부터 상상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이번 국민투표가 한편으로는 ‘잉글랜드 독립운동’이라 여겨진 이유다.

브렉시트가 결정되자마자 스코틀랜드에서는 독립을 위한 국민투표 재추진 요구가 터져 나왔다. 지배와 피지배의 관점으로만 본다면 스코틀랜드 역시 잉글랜드의 지배 아래 있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EU만 위기에 봉착한 것이 아니라 300년 연합왕국의 성채가 무너지는 거대한 도미노 게임이 펼쳐질 수도 있는 것이다. 지난 5월 당선된 무슬림 출신의 사디크 칸 런던 시장은 “브렉시트는 EU를 핑계 삼아 분열을 꾀하는 ‘증오의 프로젝트(Project Hate)’다”라고 경고한 바 있다.

투표를 일주일 앞둔 시점에 터진 노동당 국회의원 조 콕스 테러 사건은 브렉시트 국민투표가 갖는 위험한 성격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주었다. 수단·콩고·시리아 등지에서 가난과 난민 문제에 천착한 사회운동가, 공포와 증오가 번지는 세계의 치유를 위해 정치에 입문한 국회의원이 ‘영국의 지배(Britain First)’를 외치는 극단주의자의 총탄에 스러진 것이다. 그녀의 마흔두 번째 생일이었던 투표 전날, ‘조처럼 사랑하자(#LoveLikeJo)’ 하는 호소가 울려퍼졌지만 물줄기를 바꾸진 못했다.

83세의 여배우 실라 핸콕은 투표 전날 마지막 TV 토론에 나와 이렇게 말했다. “2차 대전의 참상을 기억해요. 5000만명이 넘게 목숨을 잃었어요. 전쟁이 끝나고 유럽이 하나로 뭉쳐 더 이상 적대시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물론 그게 올바르게만 간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하지만 그게 EU의 실패만은 아니에요. 전 세계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예요. (중략) 이런 문제는 분명히, 아주 분명히 더불어 함께 풀어나가야 하는 것들이지 문을 걸어 잠그고 그들을 미워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에요.”

역사적으로 EU는 1, 2차 세계대전의 무수한 희생으로 이루어낸 평화 프로젝트(Project Peace)다. 좌중을 압도한 그녀의 절절한 호소도 결국 과거에 묻히고 말았다. 결점이 많다는 것이 파괴와 절연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EU는 프레임워크에 불과하다. 그 안을 어떻게 구성하고 어떤 가치와 내용으로 채울지는 민주주의가 풀어나가야 할 숙제일 뿐이다. 2012년 노벨 평화상이 EU에 주어진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러나 물은 엎어졌고 영국은 물론 유럽과 세계가 당분간 이 분열의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오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관세와 무역, 국경과 이민 등 당장 2년으로 예정된 탈퇴 협상은 잔류를 주장했던 캐머런 총리가 수행할 수 없다. 단기적으로 EU 측은 또 다른 이탈 요구를 막기 위해서라도 영국에 불리한 협상 조건을 제시할 수밖에 없고, 더욱 우경화될 영국 정권 역시 보란 듯이 교착상태를 지속시킬 가능성이 높다. 그 과정에서 이래저래 EU 해체의 목소리가 힘을 얻는 악순환이 유럽을 최악의 불안정 상태로 몰아넣는다면, ‘증오 프로젝트’의 절정이 어디로 향할지 아무도 모른다.

기자명 런던·안관수 (영국 사회혁신연구소 SPREAD-i 대표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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