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에는 세곡을 운반하는 조운선(漕運船) 침몰 사고가 곳곳에 기록되어 있다. 태종 때는 조운선 34척이 침몰되어 쌀 1만여 석을 잃었고 사람 1000여 명이 죽었다. 수색 작업 중에 섬에서 한 사람을 발견했는데, 그는 도망가기 바빴다. 쫓아가 까닭을 물으니 “도망하여 머리를 깎고, 이 고생스러운 일에서 떠나려고 한다”라고 대답했다. 임금은 이에 “쌀은 비록 많더라도 아까울 것이 없지마는, 사람 죽은 것이 대단히 불쌍하다. 그 부모와 처자의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조운(漕運)하는 고통이 이와 같으니, 선군(船軍)이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하여 도망해 흩어지는 것은 마땅하다”라며 “육로로 운반하는 것의 어려움은 우마(牛馬)의 수고뿐이니, 사람이 죽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느냐?” 하고 대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험한 육로는 느리고 불편했다. 조운선 침몰은 태조 때부터 고종 때까지 계속됐다.

정조 시절에도 전국에서 조운선이 침몰하는 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한다. 〈정조실록〉 정조 1년 3월8일 네 번째 기사에는 조운선 침몰에 대한 임금의 하교가 기록되어 있다. “북쪽 백성을 구하려다 도리어 남쪽 백성을 해롭게 한 것이니, 내가 딱하고 마음이 아파 차라리 죽어 몰랐으면 싶다. 배들이 연이어 패선(敗船)된 것이 모두 배가 완전하지 못한 탓이라고 말을 하니, 자신이 독운(督運)하는 임무를 맡은 사람은 잘 점검하여 살피지 못한 죄를 면할 수 없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박영희 그림〈/font〉〈/div〉

정조는 이 사고와 관계된 관리들을 처벌한다. “내가 딱하고 마음이 아파 차라리 죽어 몰랐으면 싶다”라는 대목에서 백성을 생각하는 임금의 마음을 알 수 있다. 정조 시절의 조운선 침몰 사고에 대한 이야기는 소설가 김탁환이 〈목격자들〉(민음사, 2015)에 담은 바 있다. 이 소설의 부제는 ‘조운선 침몰 사건’이다. 소설의 주인공 홍대용·김진·이명방은 사건을 조사하며 부패한 나라의 민낯과 마주친다. 소설 속에서 김진은 이렇게 탄식한다. “이렇게 썩었을 줄은 몰랐네. 나라 전체가 푹푹 썩은 배로군.”

2014년 4월16일, 세월호가 침몰했다. 대통령은 해경을 엄벌하겠다며 해경을 해체했다. 대통령은 말했다. “조사할 것이고 원인 규명도 확실하게 할 것이고 거기에 대해서 반드시 엄벌에 처할 것”이라고 했다. 해양경찰청은 국민안전처 산하의 해양경비안전본부로 자리를 바꿨다. 해체는 없었다. 세월호 구조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의 처벌은 없었고 오히려 책임자들은 승진했다고 한다. 이들은 체계도 없이 구조수색 작업에 임했고 심지어 책임도 떠넘기려고 했다. 이춘재 당시 경비안전국장은 해양경비안전조정관 전담직무대리로 올라 ‘넘버 2’로 불리고 있고, 세월호 참사 당시 대변인이었던 고명석 장비기술국장은 서해해양경비안전본부장으로 승진했다. 사고에 대한 대처 능력이 전혀 없음을 확인했음에도 국가는 그들을 신뢰하고 승진까지 시켰다.

“내가 딱하고 마음이 아파 차라리 죽어 몰랐으면 싶다”

세조 때, 조운선 54척이 침몰하자 임금은 관찰사를 불러 생존자를 “끝까지 수색하여 구원”하라며 아래와 같이 유시한다. “이제 충청도 관찰사의 계본(啓本)을 보니, 전라도의 조운선 54척이 본월 3일 태안의 안흥량을 지나다가 바람을 만나 혹은 선척 전체가 파손되어 침몰하였거나, 혹은 향방을 알지 못한다 하니, 내 이를 몹시 진려하는 바다. 먼 섬이나 포구에서 비록 언덕을 의지해서 살아난 자가 있어도 먹을 것이 없으면 반드시 굶어 죽을 것이니, 그 여러 고을로 하여금 선척과 식량을 갖추고서 끝까지 수색하여 구원하게 하고, 또 연해의 민가로 하여금 육지에 내려 먹을 것을 구하는 자를 만나거든 이르는 대로 음식을 먹이도록 하라.” 세월호에 탑승한 476명 중에서 295명이 사망했고 아직 9명을 찾지 못했다. 그리고 세월호는 인양 작업을 하고 있다. 슬픔이 계속된다.

기자명 백상웅 (시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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