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7일 북한이 영변 원자력발전소에서 5메가와트(㎿) 폐연료봉을 꺼내 재처리에 착수했다. 〈로이터 통신〉은 “사용후 핵연료를 빼내 식힌 다음 재처리 시설로 옮기는 작업을 되풀이하고 있다”라며 미국 국무부 고위 관리의 말을 긴급 타전했다.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미·중 전략경제대화 마지막 날이었다. 5㎿ 원자로는 6자회담을 통해 북핵 불능화 조치를 담은 2007년 2·13, 10·3 합의를 계기로 가동이 한때 중단됐다.

하지만 2013년 2월 3차 핵실험과 3월31일 핵·경제 병진전략을 발표한 뒤인 4월2일, 북한은 원자로 재가동을 전격 선언했다. 원자로를 1년 가동하면 핵무기 2개를 만들 수 있는 약 6㎏의 플루토늄을 생산한다. 이제 가동한 지 3년 됐으니 핵무기 6개를 제조할 수 있는 약 18㎏의 플루토늄을 추출한 셈이다. 선전포고는 없지만 엄중한 상황이다.

북·중 양국의 원래 구상대로라면 6월6~7일 베이징 미·중 전략경제대화 직후에 북·미 군사대화가 열렸어야 했다. 5월31일부터 6월2일까지 베이징을 방문한 리수용 방중단에 묻어온 북한 국방위원회 팀과 미·중 전략경제대화 팀에 합류할 것으로 기대된 미국 국방부 팀 사이의 대화 채널이다. 리수용 방중단은 실제 이 시나리오대로 움직였다. 5월31일 평양을 출발해 베이징에 체류할 때까지도 미국 측의 거부 의사가 전달된 바 없기 때문이다.

ⓒAFP6월7일 베이징에서 열린 미·중 고위 경제전략대화 회의에 참석한 양국 대표단. 이 대화 직후 예상된 북·미 군사 회담은 미국 측의 거부로 무산됐다.

정통한 외교 소식통에 따르면, 6월3일 미국 측은 중국 측 군부 채널에 “북한과의 군사대화에 응하지 않겠다”라고 최종 통보했다. 리수용은 사흘간의 방중 일정을 끝내고 북한으로 돌아가고, 베이징에는 국방위원회 팀만 남아 있을 때다. 미국 재무부가 북한을 자금세탁 우려 대상국으로 지목해 발표한 6월1일과 이튿날 미국 상무부가 중국 화웨이 사의 대북 거래를 조사하겠다고 발표할 때까지도 북·중 양국은 정식 통보를 받지 못한 상태였다.

여러 가지 억측이 흘러나왔다. 북한 핵 동결에 관심을 가진 미국 군부에 재무부 등이 ‘고춧가루를 뿌리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제기됐다. 현재도 이 의구심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다만 6월3일 통보가 오바마 정부 내 합의에 따른 것이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백악관 안보회의(NSC) 결정 사항이라는 것이다. 대화의 실익이 없고 여론이 좋지 않으며, 자칫하면 중국이 깔아놓은 판에 말릴 우려가 있다는 게 대화 불응의 이유였다고 한다.

하지만 설득력이 떨어진다. 그 정도 이유라면 지난 4월 이래 두 달 가까이 이 문제를 끌고 와서는 안 되었다. 북·미 군사대화 움직임은 4월 초 북한이 중국에 제안하면서 시작했다. 황병서 군 총정치국장이 5월 말쯤 방미할 용의가 있으니 미국과 대화를 주선해달라는 것이었다. 북측은 먼저 핵동결과 비확산을 통해 북·미 관계를 개선하고 북·미 평화협정과 비핵화로 나아가는 로드맵을 제시하려 했다고 한다. 5월 7차 당 대회에서 핵 비확산을 사실상 선언한 셈이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 건지 논의가 필요했다. 중국 역시 미국이 말로는 북한 비핵화를 주장하지만 내심 비확산과 동결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방침인 것으로 보고 선뜻 대화를 주선하고 나섰다.

미국의 북·미 대화 불응이 중·러에겐 ‘기회’

그런데 왜 틀어졌을까? 워싱턴 내부 사정에 밝은 소식통에 따르면, 리수용 방중 과정부터 꼬이기 시작했다. 중국이 미국에 리수용 방중을 통보하면서 대표단에 국방위원회 인사를 대동케 할 테니 비공식 군사대화를 할 의향이 있는가 타진했다. 미국이 검토해보겠다 했고 실제 검토한 것도 맞다. 문제는 엉뚱한 데서 불거졌다. 중국은 리수용의 방중을 중국 공산당과 북한 노동당 간의 당 대 당 교류라고 설명했다. 미국 측은 이를 ‘국가 대 국가’의 공식 외교관계가 아닌 당 사이 교류이므로 소규모의 비공식 방문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우리 외교부 역시 리수용 방중에 대한 첫 번째 브리핑에서 ‘당 대 당의 교류’라고 밝혔던 점을 상기하면, 한국과 미국이 같은 인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중국 외교부가 리수용 방중에 대해 정식 브리핑을 하면서 판이 커졌다. 급기야 방중 다음 날인 6월1일 시진핑 주석과의 면담이 잡혀 있다는 사실이 미국 정보망에 포착됐다. 미국은 이를 충격으로 받아들였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고, 시진핑 면담은 곧 김정은 위원장과의 북·중 정상회담을 염두에 둔 포석이기 때문이다. 5월 당 대회 때 김정은이 노동당 위원장에 추대되자 시진핑 주석이 즉각 축전을 보낸 행보의 연장선인 셈이다.

ⓒXinhua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오른쪽)이 6월1일 리수용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왼쪽)과 면담했다.

또 하나의 움직임이 포착됐다. 리수용 방중단과 비슷한 규모의 북한 대표단이 조만간 러시아에도 갈 것이라는 정보가 미국 정부 안테나에 잡힌 것이다. 중국과 러시아는 지난 3월 유엔 대북 제재 결의 2270호에 동참해왔다. 한국이 개성공단마저 포기해가며 국제 여론을 선도하고 중국과 러시아까지 동참해 미국이 할 수 있는 최고의 대북 제재망이 구축됐다고 자부해왔다. 하지만 미국의 착각이었다. 중·러가 동시에 미국의 제재 틀을 벗어나 ‘마이웨이’를 선언하려 하는 것이다.

미국 재무부가 북한을 돈세탁 우려 대상국으로 전격 지목한 날이 바로 시진핑 면담이 있었던 6월1일이다. 이튿날인 6월2일에는 화웨이의 대북 거래를 조사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둘 다 북한뿐 아니라 중국까지 겨냥하는 조처라는 공통점이 있다. 수면 아래 잠복해 있던 사드 배치 문제가 급부상한 것도 중국뿐 아니라 러시아까지 겨냥한 경고의 의미인 셈이다.

잇단 경고는 오바마 행정부가 남은 임기 동안 대북정책 기조를 제재 쪽으로 굳힌 데서 원인을 찾는 시각도 있다. 지난 2월 미국 상·하원 합동으로 대북제재법을 통과시킨 이후 행정부의 재량권이 축소되었다고 한다. 북한이나 중국과 대화할 수는 있지만 들어보는 수준(level of touch)이지 외교 수준(level of diplomacy)은 아니라는 것이다.

북한이 무수단 미사일 발사를 거듭 실패한 것도 패착이라는 지적이 있다. 모호한 상태로 놔뒀거나 발사에 성공했다면 미국 군부가 대화에 적극 나섰을 텐데, 의도된 실패든 기술적 결함으로 인한 실패든 미국 군부 처지에서는 서두를 이유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이제 변수는 중국과 북한의 대응이다. 북·미 군사대화가 이뤄지면 좋았겠지만, 미국이 거부해 성사가 안 된 지금이 오히려 중국에는 기회일 수도 있다. 중국 주도의 북핵 해법을 전개할 명분이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중국이 북·중 정상회담, 민생 지원, 경협, 안전보장 제시와 북한의 핵동결 및 비확산 선언을 빅딜함으로써 대담한 국면 전환을 시도할 것이라는 예측도 나온다. 미국이 사드 배치나 금융제재 등으로 압박하면 할수록 북·중 정상회담 시기가 당겨질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미국이 대화에 불응한 지금이 중국뿐 아니라 러시아에도 국면 전환의 기회일 수 있다. 북한이 5차 핵실험이라는 또 한 번의 헛발질을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기자명 남문희 선임 기자 다른기사 보기 bulgot@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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