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아이가 친구들 틈에 서 있다. 카메라가 아이 얼굴만 클로즈업하고 있어서 주변이 잘 보이질 않는다. 오가는 대화로 짐작하건대 초등학교 운동장인 것 같다. “가위바위보. 이겼다. 이 우리 편!” 무슨 게임을 하려는 모양이다. 양 팀 대표가 차례차례 자기편을 고르는 분위기다.

여전히 한 아이의 얼굴만 좇는 카메라. 가위바위보 소리가 들릴 때마다 설레는 얼굴로 좌우를 살피는 아이. 하지만 계속 다른 아이들 이름만 불린다. 줄곧 좌우를 살피던 아이가 흘끔흘끔 땅을 내려다보는 횟수가 늘었다.

어느 편도 데려가기를 원치 않아서 마지막까지 남은 한 사람이 되었을 때, 그때 이 아이의 얼굴 위로 잠깐 스쳐가는 표정. 마지못해 자신을 데려간 팀 대표가 “선이 너네 가져”라고 말할 때, 그때 정말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서 쭈뼛쭈뼛 서성이는 이 아이의 몸짓. 상대 팀 대표가 “됐어, 너나 가져”라고 대꾸할 때, 그땐 결국 슬금슬금 뒷걸음질 쳐 바닥에 그어놓은 선 밖으로 물러난 이 아이의 마음. 그렇게 연이어 맞닥뜨린 유년의 가혹한 ‘그때’들마다, 카메라에 오롯이 담겨버린 열한 살 소녀 선(최수인)의 모든 것.

10분 남짓한 이 오프닝 장면만으로 나는 영화 〈우리들〉의 세계로 완벽히 빠져들고 말았다. 그리고 속으로 혼자 이렇게 소리치고 있었다. ‘대체 애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왜 이렇게 연기를 잘해? 아니, 왜 이렇게 연기를 안 해? 너무 자연스럽잖아!’

첫 장편영화의 예사롭지 않은 첫 장면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집요하게 한 아이의 얼굴을 좇는 10분의 클로즈업만으로, 어떻게 우리 모두를 저마다의 열한 살 ‘그때’로 데려다놓을 수 있을까? 처음 만든 장편영화의 첫 장면부터 예사롭지 않은 비결을, 나는 감독 윤가은이 직접 쓴 ‘연출의 변’에서 찾아냈다.

“어린 시절, 한 몸같이 사랑했던 친구의 배신으로 혹독한 시절을 보낸 적이 있다. 외로움에 아파하고 분노하고 슬퍼하다가 다시 그리워했고, 어떻게든 진심을 전하려 끝없이 노력했지만 결국 끝없는 상처만 주고받다 끝이 났다. 나이를 먹어도 크게 달라지는 건 없었다. 만나는 사람의 수만큼이나 제각각인 관계들은 여전히 낯설었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기 일쑤였다. 그러다 나 역시, 대부분의 어른들처럼, 더 이상의 피곤한 노력은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그럴수록 상처와 아픔은 더욱 깊어졌다. 부딪히고 넘어져 깨지면서도 한 뼘 두 뼘 앞으로 나아가려던 어린 나의 발자취를 스스로 지우는 부끄러운 어른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영영 누구에게도 진심을 전하지 못하는 불구로 변해갔기 때문에.”(〈우리들〉 보도자료)

이런 글을 쓰는 감독이라면, 이런 생각을 하는 감독이라면 그런 장면을 만들어낼 만하다. ‘오프닝이 전부인 영화’가 아니라 ‘오프닝은 시작에 불과한 영화’를 완성하는 게 당연하다. 선이의 손톱을 예쁘게 물들인 봉숭아물처럼, 올해 본 한국 영화 가운데 내 마음을 가장 예쁘게 물들인 〈우리들〉을 보는 내내, 나는 열한 살이었다. ‘부딪히고 넘어져 깨지면서도 한 뼘 두 뼘 앞으로 나아가려던 어린 나의 발자취’를 따라 선이와 함께 걷는 90분이었다. 오프닝만큼이나 대단한 라스트신까지 다 지나고 나서야, ‘영영 누구에게도 진심을 전하지 못하는 불구로 변해’버린 부끄러운 어른으로 돌아왔다.

“이 영화는, 이렇듯 현재의 나처럼 무기력과 자포자기 뒤에 숨어버린 어른들과, 과거의 나처럼 가슴을 쥐고 아파하면서도 용기 내어 전진하는 아이들 모두를 위한 위로와 응원의 편지다.” 감독의 말을 듣고 나니 이제야 알겠다. 영화 제목을 〈아이들〉이 아니라 〈우리들〉로 지은 이유. 극장을 나서면서 괜히 뿌듯하고 왠지 힘이 나던 까닭.

기자명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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