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1일 밤 11시께, 미국 재무부가 북한을 ‘자금세탁 우려 대상국’으로 전격 지정한 사실이 알려졌다. 워싱턴발 긴급뉴스를 알리는 〈연합뉴스〉 1보가 밤 10시49분에 떴고, 2보가 10시56분에 나왔다. 지난 2월 미국 정부가 대북제재법을 시행하면서 ‘입법 이후 180일이 지나기 전에 북한을 자금세탁 우려 대상국으로 지정할 필요가 있는지 검토하도록’ 했는데, 그 검토 결과를 발표하는 형식이었다. 국제사회에도 북한과 금융거래를 차단할 것을 공식 촉구하는 조처가 뒤따랐다.

 

발표 시점을 놓고 보면 미국 재무부의 발표는 다소 갑작스런 느낌이다. 바로 전날 5월31일 대니얼 러셀 미국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의 발언과 비교하면 더 그렇다. 러셀 차관보는 이날 정례 브리핑에서 6월6일부터 8일까지 사흘간 베이징에서 북핵 문제를 핵심 이슈로 하는 제8차 미·중 전략경제대화를 개최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미국 측에서 존 케리 국무장관과 제이콥 루 재무장관, 중국 측에서 양제츠 외교담당 국무위원과 왕양 국무원 부총리가 참석한다. 이번 전략대화를 두고, 대북 압박이라는 용어도 구사했지만 중국과 협력해 성과를 거둘 수 있도록 하겠다는 뉘앙스의 얘기도 많이 했다. 북한에 대해서도 “미국이 원하는 결과는 북한을 무릎 꿇리려는 것이 아니라 제정신을 차리게 하는 것(not to bring North Korea to it’s knees but to it’s senses)”이라는 얘기를 꺼내기도 했다. 전반적으로 지난 2월23일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이 왕이 중국 외교부장과 공동 기자회견에서 했던 발언의 맥락과 일치한다. 그다음 날 재무부가 꺼내든 금융봉쇄 및 차단이라는 초강수와는 거리가 있는 발언이었다.

ⓒXinhua6월1일 중국 베이징에서 리수용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왼쪽)과 시진핑 주석이 면담을 가졌다.

 

6월1일 중국 베이징에서 리수용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왼쪽)과 시진핑 주석이 면담을 가졌다.

적어도 러셀 차관보 발표가 있었던 5월31일까지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는 것이다. 겉으로 드러난 흐름 뿐 아니라 물밑의 분위기는 더욱 그랬다. 이날 오전 북한이 판을 흔드는 카드를 내밀었다. 새벽 5시20분 원산에서 또다시 무수단 미사일 발사 실험을 했고 실패했다. 지난 3월15일 ‘핵탄두를 실어 나를 수 있는 미사일 발사 실험을 하라’는 김정은 위원장의 지시 이래 네 번째 실패다. 그리고 베이징 현지 시각으로 오전 9시50분, 리수용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 겸 국제담당 비서가 40여 명에 이르는 대규모 대표단을 이끌고 서우두 국제공항에 모습을 나타냈다. 당일 오후에는 중국 측 파트너인 쑹타오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대외연락부(중련부) 부장을 만났다. 중련부는 발표문에서 “북한이 7차 당 대회 상황을 설명했고 양측이 북·중 간 전통적 우의를 소중히 여기고 양당 간의 교류·협력을 강화키로 했다”라고 밝혔다. 리 부위원장이 북한의 핵·경제 병진전략을 강조했다는 얘기도 흘러나왔다.

 

다음 날인 6월1일 오후에는 시진핑 주석을 면담하며 김정은 위원장의 구두 친서를 전했다. 시진핑 주석이 한 발언은 크게 두 가지다. 먼저 북핵 문제와 관련해 시 주석은 “유관 당사국들이 냉정과 절제를 유지하고 대화와 소통을 강화함으로써 지역의 평화·안정을 수호하기를 희망한다”라고 말했다. 중국의 기존 북핵 기조를 되풀이한 원론적 발언이다. 그다음 북·중 관계다. “중국은 북·중 우호협력 관계를 고도로 중시한다” “북한과 함께 노력해 북·중 관계를 수호하고 돈독히 하고 발전시키기를 희망한다”라고 말했다. 북핵 문제에 비해 매우 적극적인 발언이다. 북·중 우호협력 관계를 ‘고도로 중시한다’는 표현은 처음 등장했다. ‘수호’ ‘돈독히’ ‘발전시키기’ 따위 표현도 최근 북·중 관계를 보면 이례적이다.

 

리수용 방중 직전의 무수단 발사, 핵·경제 병진전략의 강조, 시진핑 주석의 핵 문제에 대한 원론적 발언 등을 들어 대다수 분석은 북·중 관계 재개 가능성은 있으나 북핵 문제로 인해 한계가 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의문이 남는다. 겨우 그 정도의 반쪽짜리 결과를 보자고, 2013년 5월 최룡해 방중 이래 3년 만에 시진핑 주석과 북한 고위급이 면담하는 중요한 이벤트를 양측이 만들었을까? 더군다나 북핵 문제에 진전이 없을 경우 국제 제재 때문에 ‘북·중 우호관계를 고도로 중시하고 발전’시키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것을 모를 리 없는 시 주석이, 양국 관계에 대해 이토록 적극적인 의지를 표현한 것은 어떤 맥락에서일까? 또 북한은 왜 하필 리수용 부위원장이 대규모 대표단을 이끌고 중국을 방문하는 당일 무수단 발사를 감행하고 또 실패했을까? 그다음 날인 6월1일 한 달 전에 있었다는 잠수함 발사 미사일(SLBM) 실험 성공 동영상을 슬쩍 공개한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무수단은 옛 소련의 SLBM 미사일을 모방해 만든 사정거리 3000㎞급의 중거리 미사일이다. 지난 2007년 실험도 하지 않고 실전에 배치할 정도로 무기 체계로서의 안정감에 자신을 보였다. 하지만 벌써 네 번째 실패다.

 

무수단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SLBM 동영상을 보여준 것이라는 일부의 시각도 충분히 타당하다. 반면 애초부터 무수단은 발사 성공에 목적을 둔 것이 아니라 의지만 보여주는 이벤트용으로 국한하고, SLBM을 통해 기술 수준을 보여주는 ‘고도의 테크닉’을 구사했다는 지적도 있다. 무수단 발사에 성공하면 또다시 국제 제재를 받으니, 그 자체가 국면 전개의 방해물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북한이 중국을 통해 미국에 ‘북·미 군사대화에 응할지 말지 6월 상순까지 대답을 해달라’고 최후 통첩성 압박을 가했다는 주장(〈시사IN〉 제455호 ‘미국 떠보려 회담 열자고 했나’ 기사 참조)을 대입해보면, 이런 정황이 이해된다. 리수용 부위원장이 갑자기 대규모 대표단을 이끌고 베이징에 나타난 것은 중국의 중재가 먹혔다는 뜻이다. 즉 군부 채널을 통한 미·중 간 대화에서 그동안 미국 군부는 북한과의 군사대화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표명했다고 한다. 다만 내부 협의와 조정을 위한 시간을 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미국 재무부는 왜 갑자기 초강수를 뒀나

 

북한은 계속 기다려왔고 너무 지체된다 싶어서 6월 상순까지 답을 달라고 최후통첩을 보냈다. 여기서 6월 상순의 구체적인 날짜는 6월10일이다. 6월6일부터 8일간 베이징에서 북핵 문제를 핵심 의제로 하는 미·중 전략경제대화 일정이 그 뒤 발표됐다. 왜 6월10일을 데드라인으로 삼았는지 이유가 분명해졌다. 미·중 전략경제대화보다 나흘 앞서 갑자기 리수용이 대규모 대표단을 이끌고 베이징을 다녀가는 일정이 잡혔다. 이 두 가지 이벤트 사이에 숨어 있는 점선을 실선으로 잇는 것이 바로 중국 중재 외교의 ‘신의 한 수’였던 것이다. 즉 리수용의 대규모 대표단에 국방위원회 인사들이 묻어왔다고 한다. 그들은 리수용이 예정된 사흘의 방중 일정을 마치고 돌아간 뒤에도 계속 남아 있다가 6월6일부터 시작하는 미·중 전략경제대화 대표단에 묻어 들어오는 미국 국방부 인사들과 조우할 예정이었다는 것이다. ‘5월 말 제3국에서 북·미 군사대화 가능성이 있다’는 〈시사IN〉의 보도는 6월 상순 베이징을 무대로 북·미 군사당국자대화로 현실화할지 모를 상황이었다.

 

ⓒEPA지난해 6월24일 제7차 미·중 전략경제대화 당시 존 케리(맨 오른쪽)와 양제츠가 악수하고 있다.

지난해 6월24일 제7차 미·중 전략경제대화 당시 존 케리(맨 오른쪽)와 양제츠가 악수하고 있다.

이런 구도에서 보면 의문점들이 하나하나 풀려간다. 무수단 발사 실패와 SLBM 동영상은 아직 미국과 대화를 시작한 것이 아니므로 한 번 더 압박을 하되 실력만 보여준다는 식의 퍼포먼스로 해석될 수도 있다. 쑹타오 부장과 만나 핵·경제 병진전략을 주장하고, 시진핑 주석과는 북핵 문제에서 원론만 반복한 것도 당연한 일이다. 북핵의 대화 상대가 중국이 아니기 때문이다. 중국은 북한과 미국의 군사당국자대화를 위한 판을 깔아주는 구실을 했을 뿐이다. 그러나 북·미 양쪽 사이 조율 과정에서 양측의 입장을 파악하는 것은 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나름 낙관적으로 봤기 때문에 그 다음 북·중 우호관계를 끌어올릴 수 있겠다는 시진핑 주석의 판단이 나올 수 있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미국 재무부는 왜 갑자기 초강수를 둔 것일까. 북측이 리수용 부위원장의 방미 당일 무수단 발사 실험을 하며 압박을 병행했듯이 미국도 군사회담을 앞두고 벼랑 끝 전술을 구사한 것일까? 아니면 중국에 통보했다는 북·미 군사대화에 대한 미국의 입장이 애초부터 기만적인 것이었고, 중국이 보기 좋게 뒤통수를 맞은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미국 국무부가 주도했던 2005년 9·19 공동성명 다음 날 미국 재무부가 마카오 방코델타아시아 은행의 북한 자금을 동결하며 9·19 성명을 휴지 조각으로 만들어버렸던 사건의 재판인가?

 

미국의 본심이 어느 쪽인지 아직은 알 수 없다. 9·19 공동성명의 주역 크리스토퍼 힐 차관보는 나중에 “당시 미국에는 두 개의 정부가 있었다”라고 회고한 바 있다.

기자명 남문희 대기자 다른기사 보기 bulgot@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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