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억2300만 달러(약 1조3000억원) 대 10억190만 달러(약 1조2000억원). 미국 대선 역사상 가장 돈이 많이 들었다는 2012년 선거운동 당시, 민주당 버락 오바마 후보와 공화당 밋 롬니 후보가 각각 사용한 선거자금 액수다. 그렇다면 오는 11월 치러질 대선은 2012년 대선과 달리 ‘돈 선거’란 오명을 걷어낼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럴 가능성이 별로 없다. 공화·민주 양당의 대선 주자로 사실상 확정된 도널드 트럼프와 힐러리 클린턴이 맞붙을 이번 대선은 4년 전 대선 못지않은 사생결단식 선거 양상을 띠고 있다. 해당 후보들이 각각 최소 10억 달러 이상 규모의 선거자금을 사용할 것으로 추산된다.

문제는 이런 천문학적 규모의 자금을 후보가 독자적으로 마련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당 차원의 조직적인 지원은 물론 일종의 모금 후원단체인 ‘팩(PAC:정치행동위원회)’이 우후죽순 생겨나기 마련이다. 여기에 미국 정치의 최대 허점이 도사리고 있다. 막대한 선거자금을 조달하기 위해선 불가피하게 무제한 선거자금을 걷을 수 있는 ‘슈퍼팩(Super PAC)’과 거물 로비스트들에게 의존해야 한다는 점이다.

진보 성향 주간지인 〈더 네이션〉에 따르면 2014년 현재 수도 워싱턴 D.C.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로비스트는 1만2281명. 하지만 아메리칸 대학 정치학자인 제임스 서버 교수의 최근 추산에 따르면 실제 활동 중인 로비스트가 10만명에 육박한다. 로비 업계가 매년 벌어들이는 액수만도 90억 달러에 달한다.

ⓒAFP힐러리 클린턴.

현재 다급한 쪽은 힐러리에 비해 모금액이 한참 뒤진 공화당 트럼프 후보다. 그는 불과 얼마 전까지도 특정 이익집단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기 돈으로 선거자금을 조달할 것이라고 큰소리쳤다. 그러면서 그는 상대 후보들을 향해 특정 이익집단과 거부의 기부액에 의존하는 ‘꼭두각시’라며 맹공을 퍼부었다. 그 덕분에 자신은 ‘깨끗한 정치인’이란 이미지를 심는 데 성공했다. 실제로 그는 지난해 6월 대선 출마 선언 이후 지난 3월까지 4700만 달러를 사용했는데 그 가운데 3600만 달러를 자체 조달했고, 나머지는 소액 기부자들로부터 기부받았다.

하지만 트럼프는 5월 들어 선거자금 조달 방식을 완전히 바꿨다. 자체 조달 방식을 포기하고 슈퍼팩의 로비 자금은 물론 당 차원의 조직적인 모금 지원을 받기로 결정한 것이다. 특히 그를 돕는 슈퍼팩 가운데 눈에 띄는 건 지난 1월 이후 120만 달러를 모금한 ‘위대한 미국 PAC’이다. 또한 트럼프가 최근 영입한 베테랑급 로비스트 가운데는 과거 외국 정부를 위해 다년간 활약한 폴 매너포트와 그의 전직 사업 파트너 릭 게이츠, 상원의원 보좌관에서 로비스트로 변신한 존 매슈번, 베테랑 공화당 로비스트 더그 데번포트 등이 포함돼 있다. 트럼프는 5월 중순에는 공화당전국위원회(RNC)와 담판해 ‘트럼프 승리’와 ‘위대한 미국 재창조 트럼프 위원회’라는 모금위원회 2개를 구성하기로 하고 본격 활동에 들어갔다. 현행 선거법상 그가 지지자 1인당 받을 수 있는 돈은 2700달러로 제한돼 있다. 하지만 당 차원의 모금 활동이 시작되면 지지자 한 사람에 최대 44만9000달러까지 받을 수 있다.

당 차원의 도움 외에도 트럼프는 자체적으로 공화당 거액 기부자와 로비스트에게 잔뜩 기대를 걸고 있다. 그는 5월23일 프로 축구팀 뉴욕 제츠의 오너이자 공화당의 ‘큰손’으로 통하는 우디 존슨을 만나 ‘트럼프 승리 기금’의 부의장으로 앉히는 데 성공했다. 트럼프 스스로 모금 활동에 적극 나선 가운데 주목을 끄는 행사가 있다. 바로 ‘트럼프 후보를 위한 10억 달러 운동’이다. 이 운동은 1980년대 트럼프와 부동산 투자업계에서 인연을 맺은 거부 토머스 바락이 주도하고 있다. 5월 말 로스앤젤레스에서 일련의 모금 행사를 시작으로 공식 출범한다. 바락은 거액 기부자들을 위한 연회를 최대 50회까지 개최해 목표액을 채울 계획이다.

ⓒAP Photo도널드 트럼프

공염불에 그치는 선거자금 개혁안

하지만 나쁜 뉴스도 있다. 최근 〈뉴욕 타임스〉에 따르면, 전통적으로 공화당 대선 후보에게 거액의 기부를 해온 50대 기부자들 가운데 트럼프를 혐오하는 사람이 많다. 2012년 대선 때 2800만 달러를 기부한 폴 싱어, 3000만 달러를 기부한 조 리케츠, 헤지펀드 거부인 윌리엄 오번도프 등 10여 명은 기부에 부정적이고, 나머지도 명시적 기부 의사를 표현하지 않은 상태다. 950만 달러 이상을 기부한 벳시 디보스는 “미국을 살리기 위해 차라리 트럼프보다는 힐러리에게 돈을 주겠다”라고 공언할 정도다. 설상가상 이들 가운데는 트럼프에게 기부하느니 대선과 함께 치러질 상·하원 선거에 나선 공화당 후보를 지원하겠다는 사람도 있다.

트럼프와 달리 작년부터 일찌감치 모금을 시작한 민주당의 대선 후보 힐러리 클린턴은 다소 느긋하다. 클린턴은 토니 포데스타, 스티브 엘멘도프, 데이비드 존스 등 언제든 거액을 모을 수 있는 쟁쟁한 로비스트 10여 명을 두고 있다. 에너지·금융·기술 및 정보통신 등 핵심 업계의 이익을 대변하는 거물 로비스트로 평가받는 인물들이다.

특히 클린턴은 지난해 8월 민주당 전국위원회와 미국 전역 32개 주에 모금위원회 및 ‘클린턴 승리 기금’을  설치하기로 합의한 뒤 조직적이고 대대적인 모금에 나선 덕에 지난 4월 말까지 무려 2억1300만 달러를 모았다. 이와 별도로 자신을 후원하는 ‘팩’을 통해서 걷은 모금액도 6700만 달러를 넘는다.

하지만 힐러리 클린턴 역시 ‘명분 없는 돈’을 받아서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예컨대 특정 업계의 대규모 사업에 대해 환경 훼손 같은 명분으로 반대하다가 그 업계로부터 선거자금을 챙긴 경우다. 클린턴은 무려 65개에 달하는 원유 및 천연가스 업계로부터 700만 달러를 받아 국제 환경보호단체 그린피스로부터 난타당했다. 클린턴의 경쟁자인 버니 샌더스 민주당 후보는 그녀를 향해 ‘부패한 정치인’이라며 맹공을 퍼부었다. 그러나 이런 샌더스 역시 전국탄광협회 등 이익단체를 대표하는 로비스트들에게 적지 않은 기부금을 받았다.

사실 선거 때만 되면 활개 치는 로비스트와 ‘슈퍼팩’의 난맥상은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돈 선거’ 관행을 뿌리 뽑고자 1970년대 이후 의회와 행정부 차원에서 선거자금 개혁안이 끈질기게 제기돼왔고, 마침내 2002년 무제한 선거자금을 규제하는 내용의 ‘매케인-파인골드 법’이 발효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법안은 보수 단체의 위헌 소송으로 무력화되었다.

오바마 역시 2012년 자신의 재선 유세 때 로비스트 활동을 제한하겠다고 약속했고, 일부 관련 조치를 시행해 로비스트들의 활동을 상당히 위축시키기도 했다. 그런데 정작 민주당에서 로비스트 규제를 다시 완화했는데, 그 수혜자는 당연히 힐러리 클린턴 후보가 되었다.

이름난 로비 회사 홀랜드앤드나이트의 사장이자 클린턴 지지자인 리치 골드는 〈월스트리트 저널〉과 인터뷰하면서 “올해 대선에서 이기려면 최고·최상의 정치 활동가들의 지지를 얻는 게 핵심이다. 이런 사람들 가운데 일부가 로비스트인 것은 불가피하다”라고 말했다. 특정 이익단체와 로비스트의 활동 금지를 골자로 한 선거개혁은 공염불이 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기자명 워싱턴∙정재민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