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갖 막말과 기행, 당 정책과 이념에 맞지 않는 주장으로 지탄받아온 미국 공화당 도널드 트럼프(69) 대선 후보가 이번엔 주류 언론들과 충돌했다.

최근 인디애나 주 예비 경선을 계기로 사실상 공화당 대선 후보로 확정된 트럼프의 선거캠프는 유세 기간 내내 언론을 적대적으로 대해왔다. 보수·진보 성향을 가리지 않았다. 폭력적 해프닝도 종종 터졌다. 지난 3월 트럼프 경호팀은, 시사주간지 〈타임〉의 기자가 유세장의 정해진 자리를 이탈했다는 이유로 그의 목을 조른 뒤 바닥으로 내던졌다. 비슷한 시기, 트럼프 선거대책위 본부장인 코리 르완도스키는 기자회견장에서 보수 매체 소속 여성 기자를 폭행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사실 트럼프 선거캠프에서 언론에 대한 적대감을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장본인은 트럼프 본인이다. 언론에 대해 “부정직” “쓰레기” 따위 표현들을 동원하면서 혐오감을 공개적으로 나타냈다. 지난 2월 텍사스 주에서 열린 집회에서는 “당선되면 명예훼손법을 고치겠다. 의도적으로 엉터리 기사를 쓰는 기자들에게 소송을 걸어 큰돈을 받아낼 수 있을 것이다”라며 노골적으로 언론을 위협했다.

ⓒAP Photo트럼프는 미국 언론에 대해 “부정직” “쓰레기” 따위 표현을 동원하며 혐오감을 나타냈다.

현재 트럼프가 가장 앙심을 품은 언론은 수도 워싱턴에서 발행되는 유력지 〈워싱턴 포스트〉다. 〈워싱턴 포스트〉는 트럼프가 대선 가도에 뛰어든 뒤 기사는 물론 사설과 칼럼까지 동원해 대선 후보로서 트럼프의 언행 불일치와 자질 부족 문제를 다른 어떤 매체보다 집중 부각해왔다. 지난 5월13일에도 트럼프의 우스꽝스러운 과거 행적을 폭로했다. 1991년 유력 잡지 〈피플〉의 수 카스웰 기자는 트럼프의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 ‘트럼프 대변인’이라는 사람과 인터뷰했다. 대변인은 일관되게 트럼프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았다. 이혼 및 재혼에 대한 해명에서 “트럼프는 절대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워싱턴 포스트〉가 입수한 14분20초 분량의 녹음 기록에 따르면 “목소리 톤이나 자신감 넘치는 말투 등 딱 듣기만 해도(〈워싱턴 포스트〉 보도)” 그 대변인이 트럼프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트럼프는 NBC 방송을 통해 “내 목소리를 흉내 내는 사람이 아주 많은데 이번 사건도 그런 사기극의 하나로 보인다”라고 반박했다. 그러나 트럼프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 중론이다.

트럼프는 지금까지 비판적 보도에 대해서는 그냥 부인하거나 모르쇠로 일관해왔다. 하지만 앞으로는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을 듯하다. 탐사 보도로 정평이 난 〈워싱턴 포스트〉가 무려 20명에 달하는 취재진을 꾸려 본격적인 ‘트럼프 해부’에 돌입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취재 사령탑은 1972년 당시 리처드 닉슨 공화당 대통령의 부정 재선 기도 음모를 일컫는 ‘워터게이트 스캔들’을 끈질기게 파헤쳐, 닉슨의 하야를 이끈 미국 언론의 살아 있는 ‘전설’ 밥 우드워드(73) 대기자이다. 보수 언론 〈워싱턴 이그재미너〉에 따르면, 우드워드는 5월11일 워싱턴 D.C.에서 열린 전국부동산중개인협회에 참석해서 “기자 20명을 투입해 트럼프를 취재 중이다. 트럼프 삶의 모든 측면에 관한 기사를 준비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우드워드 자신도 트럼프의 뉴욕 부동산 거래 내역을 취재 중인데, “뉴욕 부동산 세계가 중앙정보국(CIA)보다 더 복잡하더라”고 말하기도 했다.

ⓒAP Photo제프 베조스(위)가 이끄는 <워싱턴 포스트>는 밥 우드워드 대기자를 사령탑으로 한 ‘트럼프 해부’ 취재팀을 꾸렸다.

트럼프 주변 여성 50명 인터뷰한 〈뉴욕 타임스〉

더욱이 〈워싱턴 포스트〉의 ‘트럼프 취재진 구성’은 우드워드 선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바로 〈워싱턴 포스트〉 발행인 제프 베조스가 직접 지시한 것으로 보인다. 베조스는 세계 최대 전자상거래 업체인 아마존의 최고경영자다. 2013년 경영난에 허덕이던 〈워싱턴 포스트〉를 인수했다. 그는 민주당 지지자다. 우드워드에 따르면, 베조스는 “〈워싱턴 포스트〉는 공화·민주 양당의 후보가 어떤 사람인지 15회든 16회든 20회든 연속으로 집중 기사화해야 한다”라고 역설하고 있다.

베조스의 발언을 좀 더 분석해보면, 민주·공화 양당의 대선 후보 모두를 집중 취재의 대상으로 삼기는 하지만 트럼프 쪽에 무게가 더 실려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우드워드 역시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후보에 대해서는 “우리는 그녀의 ‘본질적 부분’만 취재할 것이다”라고 밝혔다. 힐러리는 과거 국무장관 재직 당시 자신의 개인 서버로 국가기밀이 담긴 이메일을 주고받은 일이 폭로되어 정치적 곤경에 처했다. 그러나 우드워드는 “누구도 힐러리가 특정 의도를 가지고 안보를 위태롭게 하는 방식으로 기밀 정보를 흘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트럼프는 〈워싱턴 포스트〉 발행인 베조스에게 인신공격을 퍼붓고 있다. 자신이 집권하면 아마존이 엄청난 타격을 입을 것이라고 베조스가 생각한다는 것이다. 초국적 대기업인 아마존은 시장독점이나 납세 같은 부문에서 많은 약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5월12일 보수 성향 방송 〈폭스 뉴스〉에 출연한 트럼프는 “베조스는 아마존을 보호하기 위해 헐값에 장난감으로 매입한 〈워싱턴 포스트〉를 정치적으로 악용하고 있다”라고 비난했다.

트럼프와 베조스는 이미 지난해 12월에 SNS에서 격돌한 바 있다. 〈워싱턴 포스트〉의 비판 보도에 격분한 트럼프가 베조스를 겨냥해 ‘아마존의 세금을 낮추기 위해 〈워싱턴 포스트〉를 인수한 거 아니냐’는 취지로 비아냥대자, 베조스는 다음과 같이 응수했다. “블루 오리진(제프 베조스가 설립한 민간 우주기업) 로켓에 한 자리 비워놓을게….” 트럼프를 로켓에 태워 우주로 날려버리겠다는 의미였다.

〈뉴욕 타임스〉 역시 〈워싱턴 포스트〉 못지않게 트럼프를 줄기차게 공격해왔다. 5월14일 보도에서는, 과거 트럼프와 인연을 맺은 여성 50명을 집중 인터뷰해 성희롱·성차별 등 부적절한 언행을 폭로했다. 격노한 트럼프는 자신의 트위터에서 〈뉴욕 타임스〉를 맹공했다. “언론의 마녀사냥이자 허위 보도다. 망해가는 〈뉴욕 타임스〉는 클린턴과 그의 여인들에 관한 진실이나 보도하기 바란다. 부정직한 언론 같으니라고!”

이 같은 핵심 주류 언론의 ‘트럼프 때리기’는 올가을 대선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역대 미국 대선에서 특정 후보에 대한 언론의 비판적 보도가 당락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는 명백한 증거는 없다. 하지만 지난 1월 하버드 대학 부설 니먼 재단에서 나온 〈언론은 대선에 얼마나 영향력을 미쳤나〉라는 보고서에 따르면, 후보 지지율과 언론 보도 빈도의 상관관계는 매우 크다. 이미 ‘트럼프 해부’에 본격 돌입한 〈워싱턴 포스트〉와 〈뉴욕 타임스〉, 나아가 다른 매체들까지 가세하면 트럼프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가 급속히 확산될 수 있다는 의미다. 그렇게 되면 지지율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워싱턴 포스트〉의 경우, 대선 직전 시기에 치밀하게 준비한 ‘트럼프 해부’ 시리즈를 내보낼 수도 있다.

이에 맞선 트럼프도 언론에 적대적 대응을 바꾸지 않으리라 보인다. 시러큐스 대학의 로이 구터먼 자유언론센터 소장은 트럼프의 이런 심리를 오도된 언론관에서 찾는다. 그는 〈포천〉과 인터뷰하면서 “트럼프는 언론에 맞서 유세를 벌이고 있다. 심지어 언론과의 적대적 관계를 노골화해서 대중을 부추기는 흐름까지 보인다”라고 지적했다. 언론을 상대로 한 트럼프의 이 같은 오기가 그에게 행운이 될지 재앙이 될지, 오는 11월이면 판가름 난다.

기자명 워싱턴∙정재민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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