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명하고 격렬해졌다. 동일한 곡조를 시소처럼 오르내리는 스트링 세션, 묵직하면서도 흩뿌려지는 톤으로 연출된 극저주파의 베이스 음, 마치 주술사처럼 곡조를 본능적으로 탈 줄 아는 보컬 등, 컴백을 알리기에 이만큼 적합한 곡이 또 있을까 싶다. 영국 록 밴드 라디오헤드는 새 앨범 〈어 문 셰이프드 풀(A Moon Shaped Pool)〉에서 바로 이 곡 ‘번 더 위치(Burn The Witch)’를 첫 싱글로 공개해 대중의 이목을 다시금 끄는 데 성공했다.

〈더 킹 오브 림스(The King Of Limbs)〉 (2011)에서 잠시 주춤했던 그들이 환상적인 음악을 한가득 들고 5년 만에 돌아왔다. 우울함의 끝판왕이라 할 ‘글래스 아이즈(Glass Eyes)’는 처연해서 아름답고, ‘풀 스톱(Ful Stop)’을 통해서는 과거 ‘지그소 폴링 인투 플레이스(Jigsaw Falling Into Place)’에서 들려주었던 기묘한 속도감을 느낄 수 있다. 정밀하면서도 서정적인 사운드 스케이프를 맛볼 수 있는 ‘데이드리밍(Daydreaming)’의 뮤직비디오는 또 어떤가. 저 유명한 영화감독 폴 토머스 앤더슨이 완성해 톰 요크가 노래하는 상실의 감정을 ‘문’이라는 상징으로 형상화해냈다.

그러나 어느 정도는 ‘대중적’이라고 할 수 있을 ‘번 더 위치’는 이런 이유로 예외적인 트랙이다. 이후부터 전개되는 다채로운 소리의 팔레트는 장르를 가리지 않고 무한대로 뻗어나간다. 생각해보자. 1992년에 데뷔했으니 올해로 24년차. 톰 요크가 1968년생이니 어느덧 40대 후반이다. 매너리즘에 함몰될 법도 하건만 그들의 진보적인 자세에는 변함이 없다. 록, 재즈, 일렉트로닉, 클래식 등을 질료로 해체와 재구성을 반복하면서 낯선 세계 하나를 듣는 이들에게 던져준다. 차트 음악만을 수동적으로 쫓는 사람들의 ‘어렵다’는 독후감이 이번에도 계속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AFP영국 록 밴드 라디오헤드가 5년 만에 돌아왔다.

좀 더 깊이 들어가보자. 솔직히 나 같은 라디오헤드의 골수팬에게 〈어 문 셰이프드 풀〉은 그리 난해하게 다가오지 않는 쪽에 속한다. 직접적 원인인 바로 전작 〈더 킹 오브 림스〉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더 킹 오브 림스〉 이후 사람들은 자신들이 느낀 생경함을 라디오헤드가 이제는 지구로 돌아올 생각 없이 우주에서 영원히 둥둥 떠다닐 거라는 식으로 표현했다. 또한 라디오헤드의 디스코그래피 중 아마도 1집을 제외하면 가장 낮은 평가를 받았을 이 음반으로 인해 다음과 같은 공식 역시 처음으로 깨진 바 있다. 트위터에서 누군가가 재미있게 말했던 것처럼 “라디오헤드 신보는 걸작임(아직 안 들어본 게 함정)”이라는 공식 말이다.

돌이켜보건대 〈더 킹 오브 림스〉는 나쁘지 않은 작품이었다. 일렉트로를 기반으로 불규칙하게 운동하는 ‘블룸(Bloom)’ 외에도 폴리리듬의 뼈다귀만으로 곡을 완성한 실험작 ‘세퍼레이터(Separator)’, 라디오헤드 특유의 기타 록과 전자음이 이상적으로 만난 ‘리틀 바이 리틀(Little By Little)’ 같은 좋은 트랙들을 담은 음반이었다.

몇 안 되는 거물급 ‘까방권’ 밴드 중 하나

그러나 사람들은 기도했다. 우주를 향해 신호를 쏘아 올렸다. 이제 됐으니 제발 지구로 돌아와달라고. 이런 간절한 기도를 들었던 것일까. 라디오헤드가 지구로 방향타를 선회한 응답이 〈어 문 셰이프드 풀〉이다. 물론 아직 지상에 착륙한 것은 아니다. 하긴 그들은 〈오케이 컴퓨터(OK Computer)〉(1997) 이후 땅에 발을 디딘 적도 거의 없었다. 비유하자면 드디어 지구궤도 진입에 성공했다고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라디오헤드는 어느새 그들의 앨범에 악평을 하면 그 악평을 한 비평가가 더 손해를 보는 위치에 올랐다.” 해외의 이런 평가처럼 라디오헤드는 현재 대중음악계가 보유하고 있는 몇 안 되는 거물급 ‘까방권(까임 방지권)’ 밴드 중에 하나다. 나에게 손해가 되는 게 겁나서 하는 말이 아니라 〈어 문 셰이프드 풀〉은 진정으로 탁월한 작품이다. 이 앨범이 아니라도 좋다. ‘개취(개인 취향)’ ‘취존(취향 존중)’이라는 만능키만 남발하며 자기 세계에만 갇혀 있지 말고 도전의식을 불태워보기 바란다. 비록 음악의 시대가 아닐지라도, 음악으로 사유하기는 여전히 가능하다. 우리 시대의 핑크 플로이드가 바로 여기에 있다.

기자명 배순탁 (음악평론가∙〈배철수의 음악캠프〉작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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