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밤의 시도도 허사였다. 며칠째 꿈을 기억하겠노라 다짐하며 잠자리에 들었지만 아침이면 머릿속이 하얘졌다. 고혜경 ‘꿈 작업가’를 만난 자리, 예상했던 질문을 마주했다. “어떤 꿈을 꾸었나요?” 답하지 못했다. 20년 넘게 꿈 일기를 써온 고씨는 잠들기 전 머리맡에 꿈 공책을 두고 눈을 뜨자마자 기록한다. 그녀의 설명에 따르면 꿈은 내면을 비추는 ‘영혼의 거울’이다. 악몽조차 나를 돕기 위한 긍정적 메시지다. 10여 년간 ‘꿈 작업’을 해온 그녀로서는 꿈에 대해 묻고 듣는 게 일상이다.

2013년, 고씨는 일주일에 한 번 두 달간 서울과 광주를 오갔다. 광주 트라우마센터에서 5·18 생존자들과 ‘꿈 투사’ 작업을 벌였다. 3년이 지난 지금에야 당시의 대화를 책으로 냈다(〈꿈에게 길을 묻다〉). 채록에 다시 손대는 게 쉽지 않았다. 작업 속도는 생각보다 더뎠다. 사건의 크기나 연루된 세월만큼 들어가는 에너지가 엄청났다. 그녀의 표현을 빌리자면 당시의 작업은 ‘잃어버린 혼을 불러들이는 현대판 넋들임’이었다.

광주 출신 사람들의 꿈을 다루다 보면 나이와 관계없이 5·18의 흔적이 보였다. 어릴 때 겪었든 어머니 뱃속에서 겪었든 마찬가지였다. “광주 출신 한 분이 박물관에서 전시를 보는데 너무 신기한 게 있는데도 가까이 가질 않았다. 알고 보니 네 살 때였나, 전남대 앞에서 형들과 무언가를 보다가 최루탄에 맞은 기억이 있었다. 무엇이든 너무 가까이 가는 건 위험하다는 인식이 생긴 것이다. 기억이 습관을 만들어낸 거다.” 꿈에는 개인의 무의식, 가족의 무의식, 집단의 무의식이라는 층위가 있다. 직접 겪지 않더라도 큰 사건은 집단의 무의식에 각인되어 대물림된다. 5·18 민주화운동이 대표적이다.

ⓒ시사IN 이명익‘꿈 작업가’ 고혜경씨는 지난 2월 5·18 생존자들의 꿈을 채록한 <꿈에게 길을 묻다>를 펴냈다.

꿈 투사 작업에 참여한 7명 모두 5·18로 인해 삶이 완전히 바뀐 사람들이었다. 슬리퍼 차림으로 집 앞에 나왔다가 일이 벌어져 사건에 뛰어들게 된 이도 있었고, 성묘차 들렀다가 연루된 사람도 있었다. 감금-고문-수배로 이어졌다. “역사적 사건이 봇물처럼 터지면 우린 다 그냥 삼켜지는 것 같다.” 이들을 만나며 느낀 점이다. 공통적으로 악몽과 가위눌림, 야경증, 잠꼬대, 몽유병 등에 시달렸다. 특히 가위눌림 빈도가 다른 집단에 비해 확연히 높았다. 형체가 보이지 않는 검은 물체가 군홧발 소리를 내며 몸 안으로 들어온다든지, 덩치 큰 셰퍼드가 쫓아온다든지 하는 식이었다. 한 참가자는 ‘그날’ 이후 20년간 이틀에 한 번꼴로 자다가 병원에 실려 갔다. 한번 가위눌리면 손발이 굳고 전신마비가 왔다. 누군가 깨워주지 않으면 마비된 채 죽을 수도 있다고 의사는 말했다. 이런 현상은 5월이 가까워올수록 심해졌다.

그룹 단위로 진행하는 꿈 투사 작업은, 고씨의 스승이기도 한 신학박사 제러미 테일러가 처음 시도했다. 1960년대, 마틴 루서 킹 목사가 암살당하는 등 미국에서 인종차별 이슈가 첨예한 시절이었다. 빈민 거주지에서 인종차별 철폐 운동을 하던 그가 꿈에 대해 이야기하자고 제안했다. 꿈을 나누는 동안 운동가들의 무의식에조차 인종차별 의식이 남아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대립의 방식이 아니라, 내면을 들여다보는 자리였다. 이후로도 참전 군인, 성 소수자, 범죄자 등의

ⓒ5·18 광주민주화운동1980년 5월 계엄군이 광주 시민들을 무릎 꿇리고 있는 모습.

마음속 상흔을 들여다보는 프로그램이 이어졌다. 고씨 역시 꿈을 공부하고 돌아온 2005년부터 본격적인 꿈 작업을 시작했다. 일반인을 비롯해 성매매 여성, 성 소수자 등을 만났다. 집단의 트라우마 치유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연구자들은 ‘트라우마 악몽’과 ‘일반 악몽’을 구분한다. 전자는 꿈에서 트라우마 상황이 재현되는 특징이 있다. 상징과 은유보다 사실적인 표현이 두드러진다. 세월호 참사 생존자의 꿈이 대표적이다. “배가 기울어지는데 친구는 못 나오고 물은 무섭고 나는 뛰어들어야 하는 상황이 계속 반복되는 식이다.” 30여 년이 지난 시점이라, 5·18 생존자들의 꿈은 트라우마 악몽과 일반 악몽이 혼재되어 있었다. 어떤 학자는 트라우마 악몽을 예외로 두지만, 기본적으로 꿈은 성장을 돕기 위한 거라는 공감대가 있다. “계속 고생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과거는 지나갔는데 거기에 멈춰 있으니까 나아가라고 얘기하고 싶은 거다.”

치유가 집단으로 이루어진다는 점도 참가자들에겐 의미가 있었다. 양상은 다르지만 유사한 깊이의 고통을 겪었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일부는 어디에선가 군홧발 소리를 듣거나, 큰 소리가 나면 엎드리는 등의 행동을 보이기도 했다. 다른 데서라면 정상적이지 않은 행동이다. 이들 사이에선 공감이 되는 이야기라 조심할 필요가 없다. 상대의 꿈을 ‘내 꿈이라면’ 하면서 1인칭으로 접근하는 게 핵심이다. “놀라운 건 이분들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분들이 아닌데, 그럼에도 꿈 이야길 아주 잘했다. 수면의 질이 안 좋아서 낮에 자주 잠에 빠지기도 하고 육체적으로도 오랫동안 못 견디는 상황인데 매주 세 시간씩 작업을 해냈다.”

5·18 이전, 청년기의 꿈도 등장한다. 동시에 모든 게 ‘그날’과 관련된 꿈이기도 했다. “꿈은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우리가 경험한 어떤 사건이 경험하지 못했던 다른 영역과 섞인다. 번역기를 돌린다고 해야 하나, 발효시킨다는 말이 맞을 것 같다. 날것은 잘 안 나오고 숙성된 형태다.”

그간 ‘운동’하는 사람들이 날것 그대로 폭로하는 방식의 이야기를 하는 데 대한 불편함도 있었다. “자기 작업으로서는 중요한 가치가 있을지 모르지만 출판물로 보면 폭력적인 느낌이 들기도 한다. 개인적으로는 그런 데 취약한 편이다. 악몽이든 기쁜 꿈이든 꿈은 한 번 걸러진, 일종의 ‘아트’ 작업이다.” 때로는 날것보다 직접적이기도 하다. 한 참가자의 꿈이 대표적이다. 우물에서 물이 넘치는데 핏물이었다. 구멍을 막아도 다른 자리에서 계속해서 피가 나왔다. 물은 생명의 젖줄이다. 오염을 막기 위해 엄청나게 애를 쓰는 한편, 허사가 될지도 모른다는 좌절감이 한데 담겨 있었다. 상징적이면서도 사실적이다.

ⓒ광주트라우마센터 제공5·18 생존자들의 가위눌림 빈도는 다른 집단에 비해 확연히 높았다. 위는 2013년 ‘꿈 투사’ 작업 모습.

꿈 투사 작업의 최대 위기는 ‘꿈 연극’을 할 때다. 꿈을 꾼 사람이 연출가가 되고, 나머지 사람들이 가위눌린 사람을 연기하는 방식이다. 연출가를 맡은 이가 천장에서 뭔가가 내려와 목이나 몸 전체를 누르는 자신의 꿈속 장면을 직접 재연했다. 당사자는 꿈을 묘사하는 것만으로도 몸을 뒤틀고 식은땀을 흘렸다. 그렇게 사투를 벌이는 동안 그 상황을 연기해야 할 대부분의 사람들은 코를 골면서 자고 있었다(꿈에 대한 연기라 잠드는 건 예사지만 이날은 특히 심했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외로움과 싸우고 있는데 어떻게 자지? 개인적으로 화도 나고 그랬는데 그게 이들의 상황이라는 걸 알게 됐다. 이미 자기 것도 차고 넘쳐서 더 받아들일 여지가 없는 거다. 그렇게 자신을 방어하는 것도 살아갈 수 있는 이유다.” 그런 가운데 한 사람이 깨어나 그걸 연기하고 다뤄냈다. 그게 다른 사람한테도 영향을 주었다.

작업 막바지, 참여자들의 가위눌림이 눈에 띄게 완화되었다. 그중 한 참가자가 들려준 꿈이 감동적이었다. 5·18 항쟁 당시 기동타격대로 시민군 활동을 했던 친구 세 사람이 죽었다. 둘은 새로 조성된 5·18 국립묘지에, 한 명은 망월동 시립묘지(‘구묘역’)에 묻혔다. 평상시에도 가끔 찾아가곤 하는데 꿈에서 네 사람이 함께 묘역에 앉아 술을 마셨다. 친구 중 한 명이 미안하다며 울었다.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에서 벗어나 화해가 일어난 순간이었다.

‘그 일’을 겪고도 살아남은 힘이 내 안에 있다

두 달은 고씨 개인에게도 쉽지 않은 시간이었다. 다녀오면 몸살이 났다. 집단의 트라우마로 들어가는 일이라 무게감을 감당하는 게 과제였다. 버텼다. 참가자들의 현재는 어떨까. 가족이 곁에 있었던 생존자는 많이 좋아졌다. 직장도 생기고 꿈 역시 제자리를 찾았다. “한 분은 집에 있다가 빨간색 체육복을 입고 나왔는데 빨갱이라며 끌려갔다. 학교를 못 다녔는데 애국가 4절을 불러보라고 했을 때 그걸 못 불러서 고문을 당했다. 당시 작업을 마치고 나서 한글을 배워 사이가 나빴던 아내에게 편지도 쓰게 됐다.” 돌아갈 자리가 없는 일부 참가자의 꿈자리는 다시 뒤숭숭해졌다.

고씨는 5·18 항쟁과 그로 인한 트라우마를 분리하자고 말한다. “트라우마 희생자의 가장 큰 문제는 지금도 1980년을 살고 있다는 점이다. 지나갔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았다. 그걸 겪고도 살아남게 한 내 힘은 뭔지 봐야 하는데 5·18에 비중을 두면 볼 수 없다. 진상 규명같이 역사적 과제로서 해야 할 일과는 분리해야 한다. 트라우마는 5·18에 있는 게 아니라 그걸 경험하고 난 뒤, 사람의 신경계에 있다.”

30년 이상 지속된 트라우마인 만큼 치유되려면 최소한 30년은 치유 작업에 매진해야 한다는 게 고씨의 생각이다. “내면 작업을 일컫는 용어는 이너워크(inner work)다. 왜 작업(work)이란 말을 붙였을지 생각해보자. 우리가 눈에 보이는 생산적인 것만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안을 다스리는 것도 일이다. 개인에게 각인된 국가 폭력의 상흔에 집중해 상처를 다루는 데 익숙하지 않다. 세월호 참사도 마찬가지고 국가적 차원의 힐링 매뉴얼이 없다.” 꿈 작업의 장점은 잠만 자면 꿈을 꿀 수 있다는 데 있다. 어느 날 갑자기 ‘내 안’의 일을 알려면 방법이 없는데, 꿈은 영혼을 꾸준히 비추어왔다는 것이다. 기록해보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그 자체로 올라오는 에너지를 보듬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꿈 작업가’로 활동한 지 10년. 고혜경씨는 크리스천 치유상담대학원대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본격적으로 꿈 공부를 하려는 이들을 위해 ‘신화와 꿈 아카데미’를 운영 중이다. 참여연대에서 진행하는 고씨의 강좌는 7년째 인기를 끌고 있다. “직간접으로 NGO 활동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오는데 이 사회의 미운 오리 새끼들이라 꿈이 기발하고 재밌다. 이를테면 시험지를 받았는데 정답이 다 체크되어 있을 때 기분 나빠서 자기 답을 새로 쓰는 식이다.”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꿈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다짜고짜 꿈을 해석해달라는 요청도 많지만 중요한 건 해몽이 아니라 내면의 성찰이다. 그녀는 지금도 두 달에 한 번씩 꿈 작업을 하기 위해 광주에 들른다. 올해도 ‘그날’이 다가오고 있다.

기자명 임지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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