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말 주자’ ‘필리핀판 도널드 트럼프’라 불리는 로드리고 두테르테(71)가 5월9일 필리핀 대선에서 압승했다. 두테르테는 이번 대선에서 ‘피도 눈물도 없는 치안정책’을 내세워 필리핀 유권자들을 열광케 했다. 필리핀은 지난해 전체 인구의 26.3%가 빈곤층이었다. 갈수록 절대빈곤층이 늘어나는 추세다. 같은 기간 범죄 발생 건수는 88만5000여 건으로 2014년에 비해 46%나 늘었다. 이를 겨냥해 두테르테는 취임 후 6개월 안에 범죄를 몰아내고 필리핀을 안전한 곳으로 만들겠다고 호언장담했다. 이 치안 공약은 선거전 초반에만 해도 필리핀 남부 민다나오 섬 출신의 군소 후보에 불과했던 그가 마침내 필리핀 대통령으로 선출된 가장 큰 요인으로 꼽힌다.

두테르테는 필리핀 중부 레이테에서 태어나 다바오 시에서 성장했다. 그의 아버지는 1950년대 세부 주 다나오 시장을 지냈고, 사촌이 세부 시장을 맡는 등 비교적 유복한 가정에서 성장했다. 하지만 고교 시절 두 차례나 퇴학당할 정도로 문제아였다. 세 번째 학교에서 간신히 졸업해 산베다 대학 법학과에 진학한 후 변호사가 됐다. 1980년 중반까지 다바오 시에서 검사로 일했고 1988년부터 일곱 차례나 다바오 시장에 당선돼 하원의원과 부시장 재직 기간을 뺀 22년 동안 다바오 시장으로 일했다.

ⓒAFP필리핀 대통령에 당선된 두테르테(위)는 다바오 시장 시절 범죄 연루자를 가차 없이 처형했다.

다바오 시장 재직 시 그는 철권통치를 했다. 다바오 처형단(Davao Death Squad)이라는 범죄 소탕 자경단을 조직해 정치인일지라도 범죄와 연루됐으면 가차 없이 처형했다. 이 자경단은 22년간 다바오에서 운영됐다. 지역 경찰과 과거 공산주의 반군, 청부살인자로 이뤄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조직의 존재에 대해 두테르테는 그동안 부인해왔다. 하지만 지난해 말 “이 조직원의 숫자가 잘못 알려져 있다. 1700명이다”라고 그가 자랑스럽게 말하면서 그 존재가 공식화됐다. 그와 관련한 유명한 일화 중에는 다바오에서 중국인 소녀가 유괴되어 성폭행당하자 직접 권총을 들고 나가 범인으로 추정되는 남성 3명을 총살한 것도 포함돼 있다. 그는 이 사실을 자랑스럽게 말했지만 시장이 직접 즉결 처형까지 했다는 점에서 인권단체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이처럼 두테르테는 다바오 시장으로 재직하면서 범죄 용의자 1000명 이상을 재판 없이 처형했다. 그 때문인지 다바오 시는 필리핀에서 가장 치안이 잘된 도시로 꼽힌다. 폭력단체의 우두머리는 물론이고 반군 지도자들도 그가 무서워서 화해의 손짓을 내밀 정도다. 그 덕에 두테르테는 범인을 끝까지 추적해 사살하는 할리우드 형사물 〈더티 해리〉에 빗대 ‘더티 두테르테’ 혹은 ‘처벌자(punisher)’ ‘디공’이라 불린다.

대통령 선거에 나선 그는 대놓고 ‘독재’를 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과거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를 축출하고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던 필리핀 사람들이 이렇듯 공공연하게 독재를 하겠다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선택했다. 그만큼 필리핀의 치안 상황이 나쁘다는 얘기다.

ⓒEPA필리핀 대선에는 후보가 5명 출마했다. 위는 필리핀 대선 후보 토론회.

필리핀에서는 단돈 몇백 달러(몇십만원)로도 청부 살인이 가능하다. 한국인 희생자만 해도 2012년 6명에서 2013년 12명으로 급증했으며 2014년 10명, 2015년 11명으로 3년 연속 두 자릿수를 기록했다. 한국인들만 죽어나간 것이 아니다. 나라 전반에 걸쳐 살인강도를 비롯해 강력범죄가 만연해 있다. 이 때문에 두테르테의 압승은 치안 부재보다는 오히려 독재가 낫다는 국민들의 선택이란 게 중론이다. 필리핀의 대표적인 빈민가로 꼽히는, 수도 마닐라의 톤도 지역에 사는 실비아 씨(38)는 “우리에겐 두테르테가 마지막 희망이다. 죽이든 고문을 하든 범죄자들을 좀 몰아내주면 좋겠다. 세상이 범죄자들로 들끓는데 어떻게 아이들을 키우고 밥을 먹일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이처럼 필리핀 국민들은 가난과 범죄에 지쳐 범죄만 없애준다면 독재도 감수하겠다는 상황이다.

“범죄자 10만명 처형해 물고기 밥으로 주겠다”

두테르테는 당선 후 ‘범죄자 10만명을 처형한 뒤 마닐라 만에 던져 물고기 밥이 되게 하겠다’고 말했다. 범죄자를 처벌하는 데 법 따위는 잊으라는 것이다. 그는 자기의 길을 막으면 의회도 해산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새로운 국가’를 만들려는 자신의 프로그램을 의회가 지지하지 않는다면 혁명 정부를 선포하겠다는 경고도 서슴지 않는다.

범죄와의 전쟁을 위해 두테르테가 당장 하겠다고 나선 건 경찰관을 3000명 늘리는 일이다. 경찰관의 급여를 두 배로 올리고, 군인이나 경찰이 범죄 소탕 과정에서 직권남용으로 기소되면 대통령 권한으로 사면하겠다고 공언했다. 그는 또 미성년자에 대한 통금조치 도입을 고려 중이다. 다바오 시장 시절 이미 18세 이하 청소년은 오후 10시가 넘으면 성인과 동반하지 않는 한 거리를 다닐 수 없도록 한 바 있다. 대통령 당선이 확정되자마자 두테르테의 대변인 피터 라비나는 “두테르테 당선자가 오후 10시 이후 보호자 없이 다니는 미성년자에 대해 통금조치를 도입할 예정이며, 논의 절차와 법률 검토 과정을 거친 뒤 다바오처럼 특정 시간에 주류 판매를 금지하는 조치 또한 고려 중이다”라고 말했다. 다바오에서는 자정부터 오전 8시 사이 공공장소에서 술을 팔지 못하게 되어 있다. 마약과의 전쟁도 예외는 아니다. 두테르테는 “악과 싸우는 독재자가 될 것이다. 내각을 포함해 경찰, 군인 등 모든 정부 당국자가 부패를 멈춰야 한다. 누군가 나를 살인자라고 하더라도 마약과의 전쟁을 치르겠다”라고 말했다. “필리핀은 감옥보다 장례식장을 더 많이 지어야 한다”라는 말도 덧붙였다.

두테르테가 정권을 잡자 세계는 트럼프에 버금가는 막말 주자가 필리핀을 대표하는 대통령이 되었다는 사실에 당혹스러워했다. 특히 오스트레일리아 정부와 언론은 더욱 경악했다. 1989년 다바오에서 발생한 교도소 폭동사건 당시 수감자들에게 집단 성폭행을 당한 뒤 살해된 오스트레일리아 출신 여성 선교사 사건과 관련한 나쁜 기억 때문이다. 지난달 두테르테는 이 사건을 언급하며 “그녀가 성폭행을 당했다는 사실에 매우 화가 났지만 그녀는 매우 아름다웠다. 나는 ‘시장인 내가 먼저 (강간)했어야 하는데’라고 생각했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의 이 발언에 오스트레일리아 정부와 미국 대사가 강하게 항의했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의 대사는 입을 닥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내가 대통령이 된다면 (두 나라와 외교관계를) 끊어버리겠다”라고 되받았다. 한 오스트레일리아 외교관은 “두테르테가 당선된 것은 외교가 최악의 시나리오다. 앞으로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정말 골치 아프다”라고 곤혹스러워했다. 필리핀의 한 일간지 기자는 “그는 외교에 관한 한 백지 상태다. 관례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막말로 전 세계에 스트레스를 줄 게 뻔하다”라고 말했다.

선거 기간에 두테르테가 내놓은 경제 공약이 거의 없었다는 점도 특이하다. 그는 경제에 대해서는 “돈 많이 주고 뛰어난 경제 전문가를 고용해 조언자로 쓰면 된다”라고 말해왔다. 그의 당선에 필리핀 내 외국인 투자자들은 불안해한다. 그의 인기가 치솟은 지난 1개월간 외국인 투자자가 필리핀 증시에서 빼간 돈이 3400만 달러에 이른다. 증시는 3월 고점 대비 5% 하락했다. 필리핀 페소화 가치는 달러 대비 약 2% 떨어졌다. 필리핀 경제의 핵심 축인 관광산업의 전망도 밝지는 않다. 두테르테의 말대로라면 범죄자 10만명을 처형하느라 피의 전쟁이 벌어질 텐데 그 어떤 외국인 관광객이 편안하게 휴가를 즐길 수 있겠는가. 악을 소탕한다는 목적을 내걸어놓고 두테르테 자신이 어느새 악당을 닮아가고 있다.

기자명 김영미 국제문제 전문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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