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1월9일이다. 계산해보니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2016년 5월5일로부터 대략 반년 전 날짜다. 먼저 반성의 감정이 엄습해온다. “지난 6개월 동안 나는 대체 뭘 한 것인가.” 참회의 시간을 가진 뒤에 찾아오는 건 불꽃같은 결심이다. 그리하여 나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세상을 향해 이렇게 외쳐보는 것이다. “그래. 아직 늦지 않았어.”

먼저 포털 사이트 ㄴ사의 ‘온스테이지’라는 카테고리를 찾아보기 바란다. 지금에야 늦게 소개하는 이 주인공의 라이브가 올라와 있을 것이다. 밴드의 이름은 루드 페이퍼. 동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루드 페이퍼는 레게를 전문으로 하는 공동체다. 멤버는 총 3명. 원래 쿤타와 리얼드리머(RD) 이렇게 2명이었는데, 기타리스트 케본(Kevon)이 합류하면서 트리오로 팀을 개편했다.

한국에 레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김건모라는 이름이 떠오를 것이고, 임종환의 ‘그냥 걸었어’나 룰라 같은 그룹이 레게라는 장르를 통해 상업적 성공을 거뒀다. 그러나 이 가수들로 대표되는 레게는 결정적인 핵심이 빠져 있다. 뒷박에 강세가 실리는 레게의 특징적인 박자와 외피만 빌려왔을 뿐,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레게라고 말하기에는 부족했다는 의미다.

ⓒ한국예술원 제공루드 페이퍼(위)는 레게 음악 전문 밴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인디 신을 중심으로 등장한 ‘진짜 레게’ 가수·밴드들을 하나둘 호출해야 한다. ‘하하’와의 듀엣으로 유명한 스컬, 윈디 시티의 김반장, 솔로로 활동 중인 엠타이슨 등이 바로 그들이다. 또 레게와 같은 장르라 할 스카 전문 밴드들인 스카웨이커스, 킹스턴 루디스카, 사우스 카니발 등도 있다. 이러한 뮤지션들과 함께 한국의 레게는 조금씩 성장하며 명맥을 유지해왔다.

레게의 고향에 가서 녹음해온 걸작 앨범

그 중심에 있는 밴드 가운데 하나가 바로 루드 페이퍼다. 그들은 레게의 고향인 자메이카까지 날아가 이 앨범 〈디스트로이 바빌론(Destroy Babylon)〉을 녹음했다. 그래서일까. 음반에 담긴 곡들은 정말이지 한글 가사 정도를 제외하면 자메이카의 그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음악적인 성취를 이뤘다.

명심해야 할 점이 있다. 이 찬사는 그들이 단지 자메이카에서 레코딩 작업을 했기에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동시에 본토의 오리지널을 정확하게 모사했기에 받는 찬사도 아니다. 그러니까, 루드 페이퍼가 ‘발명’한 것은 바로 ‘지금·여기·우리’의 레게다. 순서대로 하면 시간축·공간축 그리고 정체성이라는 측면에서 그들은 다른 누구도 아닌 루드 페이퍼만의 레게로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의 풍경’을 노래한다.

‘꿈이라도 좋아’에서 드러나는 빼어난 서정미는 물론이요 절망적 현실에 맞서는 찬가인 ‘We Are So Dangerous’, 물질 만능주의를 비판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Rootsman’, 밥 말리가 그러했던 것처럼 자유라는 가치에 대해 노래하는 ‘Sons of Liberty’ 등, 방점이 찍혀 있지 않은 곳이 없는 앨범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비판적인 시선으로 묘사하면서도 그것을 참 ‘잘’ 들리게 만든 음반이기도 하다. 단지 과거의 레게를 답습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여러 현대적인 사운드를 끌어온 덕분에 동작은 날렵하면서도 리듬에서는 믿음직한 무게감이 느껴진다.

당신은 혹시 레게라는 장르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 밥 말리라는 전설로 인해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 레게는 댄스뮤직 같은 쾌락과는 실상 거리가 먼 음악이었다. 도리어 레게는 극심한 가난으로 고통받던 자메이카 국민을 위로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해주었다. 대표적인 곡이 바로 저 유명한 ‘No Woman, No Cry’다. 아주 먼 옛날 영어에 익숙하지 못한 국내 디스크자키들이 “여자가 아니면 울지 않는다”라고 어처구니없는 번역을 했던 바로 그 곡 말이다(정확한 번역은 “안 돼 여자여. 울지 마오” 정도가 된다).

진짜 레게가 무엇인지 알고 싶은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이 앨범 〈디스트로이 바빌론〉을 들어라. 나처럼 나중에서야 참회의 시간을 갖지 말고.

기자명 배순탁 (음악평론가∙〈배철수의 음악캠프〉작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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