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북 인생이다. 철 지난 〈태양의 후예〉에 이제야 빠졌다. 〈태양의 후예〉는 지난 4월14일 종영됐다. 1회부터 16회까지를 폭식했다. 뒤늦게 드라마 속 군대 말투를 따라 하다 왕따를 자초하고 있다. 그러면 또 이렇게 대답한다. “고백할까요? 사과할까요?”

작심하고 보게 된 건 〈태양의 후예〉를 제작한 사람이 아는 사람이란 걸 알게 된 후부터다. NEW의 김우택 대표다. NEW는 〈변호인〉과 〈연평해전〉을 만든 콘텐츠 회사다. 김우택을 처음 만난 건 2000년이었다. 당시는 영화가 산업이 되면서 스마트한 비즈니스맨들이 영화계로 유입되던 시기였다. 그때부터 변신에 변신을 거쳐 드라마까지 영역을 확장했다. 김우택은 21세기 들어 가장 성공한 엔터테인먼트 비즈니스맨 중 하나다. 그가 만든 첫 번째 드라마라면 보고 싶었다.

〈태양의 후예〉의 주인공 유시진(송중기)이 특전사 대위라는 게 기이했다. 제아무리 ‘태양의 후예’라지만 그동안 안방극장에서 명멸해온 세속적 로맨스 드라마의 후예일 뿐이다. 당대의 여심을 자극할 만큼 이상적인 남자 주인공은 필수다. 당연히 남자 주인공의 직업은 당대의 세속적 선망을 반영한다. 실장님이나 이사님으로 불리는 재벌 후계자쯤은 돼야 한다. 세속적 사랑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돈 많고 예뻐서 서로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고 말하면서 돈 많고 예쁜 서로를 사랑한다. 이게 대중의 본심이다. 그런데 유시진은 군인이었다. 군인이 이 시대의 선망 직종이 아니란 건 현실이다. 기이하게도 대중은 군인한테 열광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박영희 그림〈/font〉〈/div〉

〈조선비즈〉에 실린 김우택 대표의 인터뷰를 읽고 나서야 조금 납득이 갔다. “군인이 나라에 충성하고 의사가 사람을 살리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에요. 저는 개인적으로 유시진 대위가 국가에 관해 얘기할 때, 강모연이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할 때 이 드라마를 잘했다고 느껴요.” 〈웰컴 투 동막골〉에 투자한 낙관주의자 김우택다웠다.

여자 주인공 강모연(송혜교)은 자신이 일하는 병원의 이혼남 이사장과 로맨스를 기대할 만큼 충분히 세속적이다. 정작 이사장은 부자답게 천박하다. 반면 유시진은 군인답게 명예롭다. 결국 강모연은 유시진을 선택한다. 강모연이 선택하는 건 군인이 아니다. 명예다. 김우택의 표현대로라면 “기본”이다.

배우 송중기나 작가 김은숙의 대사보다 어쩌면 이게 진짜 흥행 포인트일지도 모른다. 주인공이 살면서 얻은 성취나 물려받은 유산이 아니라 주인공이 살아가는 태도와 지키려는 가치가 선망의 대상이다. 속물적일 수밖에 없는 안방극장에서 이런 주인공을 보는 건 이례적이다. 이런 식의 드라마 독법이 ‘〈연평해전〉적’일 수도 있다. 보수적이란 말이다. 〈연평해전〉을 내놓았을 때 NEW는 진보적인 〈변호인〉에 투자한 영화사가 애국주의를 조장하는 영화를 만들어서 줄타기를 한다고 비난받았다. 그래도 드라마의 최근 트렌드 속에서 〈태양의 후예〉를 바라보면 조금 너그럽게 읽힌다.

사랑, 거의 닫혀버린 계층 간 이동의 마지막 판타지

〈태양의 후예〉는 ‘군에서 온 그대’다. 〈별에서 온 그대〉는 외계인을 등장시켜서 재벌과 신데렐라라는 식상함에서 탈피했다. 재벌 위에 외계인이었다. 〈태양의 후예〉는 외계인보다는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해서 〈별에서 온 그대〉를 넘어선다. 임무에 충실하고 명예를 지키는 군인 유시진을 사랑하게 되면서 강모연도 변한다. 진짜 의사가 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안방극장 사랑 드라마는 대중적 아편이다. 사랑은 거의 닫혀버린 계층 간 이동의 마지막 판타지다. 우린 이제 불평등이라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해결하겠다는 혁명이나 개혁을 믿지 못한다. 그래도 사랑만은 쉽게 포기하지 못한다. 생각할수록 달콤한 데다 아주아주 드물게는 실현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온 나라가 주기적으로 거국적 사랑 드라마에 빠져드는 이유다. 고백한다. 〈태양의 후예〉에 빠졌다. 〈태양의 후예〉는 달랐다. 사과할까요?

기자명 신기주 (〈에스콰이어〉 기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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