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정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결전(4월19일 뉴욕 경선)을 10여 일 앞둔 버니 샌더스가 교황청으로부터 초청을 받는다. 그는 평소 존경해온 프란치스코 교황이 주관하는 행사에 참석 의사를 밝혔다. 주변에서는 의아해했다. 사활이 걸린 뉴욕 경선을 코앞에 두고 1박2일로 로마에 간다니? 아무리 뉴욕, 펜실베이니아와 메릴랜드에 가톨릭 유권자가 많다지만, 버니의 ‘성지순례’가 표로 환산되리라 전망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며칠 뒤, 교황은 일정상 샌더스를 만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자 언론에서는 일제히 샌더스의 ‘뻘짓’을 조롱했다. ‘투표권도 없는 로마의 신부들에게 유세하러 이탈리아까지 가나? 선거자금 남용 아닌가? 경선에 가망이 없어 보이니까 신의 가호라도 필요한가?’

심지어 지지자들조차도 정치공학적 계산이 안 나오는 로마행에 갸우뚱했다. 그러나 샌더스와 프란치스코는 지난 4월16일(토요일) 오전 6시 교황 관저에서 만났다. 계획되지 않은 면담이라 사진 촬영은 없었다.

요즘같이 ‘인증샷’이 대세인 시대에 사진을 찍지 않은 이유는 명확했다. ‘교황을 정치적으로 활용하지 않겠다’는 샌더스와 ‘미국 내정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교황의 합의된 의전이었다. 샌더스는 인터뷰에서 두 사람의 만남은 교황의 정치적 지지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까지 밝혔다. 교황 역시 “누군가와 인사한 것을 정치적 개입으로 착각하는 이가 있다면 나는 그에게 정신과 상담을 권하고 싶습니다”라고 웃으며 말했다.

ⓒAP Photo4월16일 버니 샌더스 의원이 바티칸 앞에서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유대인 미국 대통령 후보와 가톨릭 최고 수장이 만난 이 역사적인 사건에, 미국 언론은 시큰둥했다. 로마행을 두고 열을 내며 비판하던 기자들조차도 이 뉴스를 비중 있게 다루지 않았다. 그들은 샌더스의 로마행이 민주당 경선에서 큰 변수가 아니라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만약에 클린턴이나 트럼프가 교황을 만났어도 같은 반응을 보였을까? 이게 바로 지난해부터 샌더스의 지지자들이 줄기차게 항의해온 제도권 미디어의 ‘버니 블랙아웃(버니 보도 통제)’ 현상이다.

당파성이 없는 기관들의 조사에 따르면, 힐러리 클린턴에 대한 매체 보도는 샌더스의 두 배 이상이라고 한다. 막말의 지존인 트럼프 관련 보도는 클린턴의 두 배 이상이었다. 이러니 샌더스의 일부 지지자들이 음모론까지 제기하는 것이다.

물론 2015년 클린턴에 대한 보도의 절반 이상은 그녀의 이메일 스캔들과 벵가지 사태(힐러리 클린턴이 국무장관이던 2012년 9월11일 리비아의 벵가지에서 발생한 미국 영사관 테러 사건)와 관련된 부정적 뉴스들이었다. 그러나 ‘버니 블랙아웃’을 제기하는 이들은 단순히 보도의 ‘양’이 아닌 ‘질’의 문제를 지적한다. 주류 언론 매체들은 ‘샌더스가 선전하지만 결국에는 클린턴이 민주당 후보가 될 것’이라는 논조를 유지해왔다. 그래서 최근 들어 두 후보에 대한 보도량이 거의 비슷해졌음에도 불구하고, CNN 앞에는 ‘클린턴 뉴스 네트워크(Clinton News Network)’라는 팻말을 든 시위자를 아직도 볼 수 있다.

문제의 본질은 편향된 시각이다. 이는 미디어 산업이 태생적으로 지닌 한계이기도 하다. 수요자 측면에서는 진지한 다큐멘터리보다는 자극적인 막장드라마를 선호할 수밖에 없고, 권력층 또는 거대 자본과 연결돼 있는 공급자 처지에서는 제도권 내의 관점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제도권 언론은 제한된 시선으로 사회적 흐름을 읽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들은 종종 변화의 본질을 놓치고, ‘샌더스 불가론’ 같은 프레임으로 ‘자기실현적 예언’을 완성시키는 것이다.

ⓒEPA4월16일 프란치스코 교황(위)은 관저에서 버니 샌더스 의원을 5분 정도 만났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미국 대선과 같은 대형 이벤트는 여러 집단의 이해관계가 엮여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 그런 판에서 무소속 출신에 비주류인 민주적 사회주의자 후보가 불리한 것은 당연한지도 모른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구상 현존하는, 아니 중세 이후로 가장 영향력 있는 종교 지도자 중 한 명이다. 샌더스와 교황은 사회적 관점과 철학에서 많은 부분 공감한다. ‘도덕 경제’(창조가 아닌 도덕)와 환경문제 등에 대한 견해에서는 서로 빼닮았다. 하지만 두 사람의 동일한 주장은 많은 이들에게 전혀 다른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종교 지도자의 이상적인 강론에는 지배 계층과 기득권도 고개를 끄덕이지만, 같은 내용을 대통령 후보가 설파하면 불편해하고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다. 제도적 의무에서 발생하는 엄청난 경제적 희생과 비용을 반기는 이는 흔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너무나 영악하고 냉소적이다. 그래서 샌더스 같은 사람이 나타나면 불을 자꾸 꺼버려서 ‘블랙아웃’이 발생하는 것이다. 제도권 내에서 샌더스의 의견에 동조하더라도 그는 부담스러운 존재인 셈이다.

샌더스와 프란치스코는 5분 정도 만났다. 만남 후 곧바로 교황은 난민들을 만나기 위해 그리스로, 미국 대선 후보는 경선을 치를 뉴욕으로 향했다.

샌더스 이후의 미국 정치는 다르다

4월19일 뉴욕에서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경선에서 샌더스는 클린턴에게 패했다. 당원으로 등록된 유권자들만 참여할 수 있는 뉴욕 민주당의 클로즈드 프라이머리(closed primary) 경선의 문제점은 한둘이 아니다. 뉴욕에서 샌더스에게 필요했던 것은 신의 은총보다는 공정한 경선 규정이었다. 많은 이들은 대세를 굳힌 클린턴을 위해서, 또 민주당의 통합을 위해서 샌더스가 하차하기를 바라는 눈치다. 하지만 샌더스는 그럴 의사가 없어 보인다.

샌더스는 대통령병 환자가 아니다. 그는 사회정의를 추구해온 운동가다. 지난 반세기 동안 일관된 신념으로 살아온 그에게는 대통령 당선보다 훨씬 더 중요한 가치와 목적이 있다. 이미 그가 미국 정치판에 불어넣은 활력으로 일어난 변화들이 이를 잘 보여준다.

이제 미국의 일반인들은 비상식적인 선거자금법과 경제적 불평등에 대해 가볍게 생각하지 않는다. 차기 정권에서는 정치자금 관련 개정법안이 더 이상 외면되기 힘들 것이다. 월스트리트 출신이 재무장관으로 버젓이 임명되는 일 역시 없을 것이다. 특히 정치에 무관심하던 젊은 유권자들을 투표장으로 끌어내며 샌더스는 시민 참여 정치를 부활시켜 미래를 향한 미국 사회의 궤도를 바꿔놓았다. 향후 민주당의 대권 주자로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 같은 진보 정치인들이 많은 힘을 받게 될 것이다.

왜 샌더스는 정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경선을 앞두고 바티칸에 갔을까? 왜 교황은 예정에도 없던 면담을 했을까? 왜 교황은 트럼프를 대놓고 ‘디스’하면서 샌더스를 공개 지지하지는 않았을까? 이런 의미 없는 질문들의 답을 찾는 것이야말로 진짜 ‘뻘짓’일 것이다. 샌더스의 언행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하나하나 정치공학적으로 분석하려 드는 것 자체가 시간 낭비다.

민주적인 절차를 무시해도 선거에만 승리하면 만족하는 정치 문화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샌더스의 업적들이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명확한 사실은 원칙을 갖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어내는 운동가는,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일관성도 없는 권모술수로 움직이는 정치인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샌더스가 즐긴 짧은 ‘로마의 휴일’에는 공주가 나오지도 않았고, 세간의 관심을 끌 만한 극적인 이야기나 근사한 사진 한 장 없었다. 원래 소중한 만남은 그런지도 모른다. 진정한 성지순례에는 요란한 치장이 필요 없는 법이다. 순례자는 성지로 가는 고달픈 과정에서 깨달음을 얻고 성장한다. ‘사회적 정의’라는 성지를 찾아 버니 샌더스와 함께 여정에 나선 많은 순례자들 역시 그렇다. 그래서 세상은 샌더스가 퇴장한 후에도 그를 아주 오랫동안 기억할 것 같다.

기자명 정승구 (영화감독·작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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