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3일 오전, 이집트 카이로 서쪽의 알렉산드리아 방향 고속도로 변에서 변사체 한 구가 발견됐다. 시신은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던 28세의 이탈리아 청년 줄리오 레제니. 그는 1월25일 카이로 광장에서 열린 이집트의 봄 5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했다가 실종되었다. 그리고 1주일여 만에 시신으로 발견된 것이다.

시신 상태는 매우 좋지 않았다. 갈비뼈 7개가 부러졌고 몸 곳곳에 날카로운 흉기에 찔린 상처와 구타 흔적이 있었다. 주요 신체 부위에 전기 충격을 가한 정황도 포착되었다. 담뱃불로 지진 자국도 많았다. 이집트와 이탈리아의 인권단체들은 그간 이집트에서 행해진 고문의 흔적들이라고 주장했다. 레제니의 시신은 그의 조국 이탈리아로 옮겨져 재부검이 이뤄졌다. 이탈리아 부검 관계자는 일간지 〈라 리푸블리카〉와의 인터뷰에서 “부검 결과는 살인을 감행한 팀이 그를 스파이로 믿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라고 말했다.

레제니가 살해당한 이집트에서는 비밀경찰의 불법 체포와 고문의 역사가 아주 길다. 30년(1981년 10월~2011년 2월)에 걸친 호스니 무바라크의 철혈 통치 기간에도 이집트 비밀경찰의 잔인한 고문은 악명 높았다. 무바라크 정권은 이들을 높은 보수로 길들이면서 정치범 억압은 물론 여성 시위자에 대한 성폭행까지 서슴지 않는 독재 정권의 사조직으로 만들었다.

ⓒAP Photo줄리오 레제니.

이집트 비밀경찰의 악행이 잠시 잠잠했던 시기는 2011년 민주화 혁명(‘아랍의 봄’)이 터진 직후다. 그러나 군인 출신인 엘시시 대통령이 취임하자 다시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이집트 안팎의 인권단체들은 2013년 무함마드 무르시 이집트 대통령이 군부에 축출당한 이후, 민간인에 대한 경찰의 공권력 남용에 주목해왔다. 이집트의 한 일간지 기자는 “비밀경찰에 의해 고문당한 사례는 차고 넘친다. 고문으로 죽은 다른 시신과 레제니 시신의 상처가 너무나 똑같다”라고 말했다.

카이로 인권단체 ‘권리와 자유를 위한 이집트 위원회’는 지난해 8~11월, 레제니처럼 비밀경찰에 연행된 것으로 추정되는 실종자가 미성년자 11명을 포함해 340명에 이른다고 밝혔다. 그 시기는 이집트에서 반테러법이 통과된 시기와 맞물린다. 이집트 정부는 테러 방지라는 명분하에 반정부 인사 수만명을 적법한 절차 없이 외부에 공개되지 않은 강제수용소에 감금했다. 수감자들은 변호사를 선임하거나 접견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이렇게 수감자들이 고립되어 법적인 보호를 받을 수 없는 사이에 잔혹한 고문이 가해지는 것이다. 비밀경찰은 심지어 수감자들의 가족까지도 불법 연행한 뒤 고문한다. 이탈리아 정부와 국민들 역시 ‘레제니는 이집트 반테러법의 희생양이며 비밀경찰의 고문으로 사망했다’고 믿는다.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던 레제니가 연구하던 주제는 이집트 노동조합과 노동운동이었다. 이집트의 노동조합과 노점상 등이 그의 연구 대상이었다. 당연히 거리 시위도 주요한 관찰 대상이다. ‘경제 및 사회적 권리를 위한 이집트 센터’에서 활동 중인 호다 카멜 씨는 AP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내가 레제니를 여러 차례 노점상과 노조 활동가들에게 소개해주었다”라고 말했다. 레제니는 변사체로 발견되기 이전 지인들에게 ‘집회에 참석한 이후 감시당하고 있다’고 말했다. 실종 직전에는 실제로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다. 이집트 경찰은 레제니에게 “테러 단체로 지목된 무슬림형제단이나 반정부 시민단체인 ‘4월6일 청년운동’ 관련자들과 접촉하지 않았느냐”라고 집중 추궁했다고 한다. 결국 이집트 정부가 싫어하는 인사들을 수시로 만나고 다녔던 외국인 청년이 실종된 뒤 변사체로 발견된 것이다.

ⓒEPA지난 2월25일 이탈리아 로마의 이집트 대사관 앞에서 줄리오 레제니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을 철저히 밝혀줄 것을 촉구하는 시위가 열렸다.

“레제니 죽음은 갱단 소행이다”

레제니가 사라지던 날 그는 페이스북 메신저로 여자친구에게 “하사네인 박사를 보러 간다”라는 마지막 메시지를 남겼다. 하사네인은 이집트 노동운동 전문가다. 레제니는 같은 날 오후 7시20분부터 20분간 이탈리아 친구와 통화한 직후 연락이 끊겼다. 이탈리아 경찰은 레제니가 이 시점에 비밀경찰에 납치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로이터 통신은 이탈리아 검찰 소식통을 인용해 “레제니의 부검 결과는 그가 살해당하기 전 약 5~7일 동안 심문받았다는 것을 강하게 시사한다”라고 보도했다. 사체 부검 결과에 따르면, 고문자들은 일정한 시간 간격을 두고 담뱃불로 레제니의 신체를 지졌다. 이는 이집트 비밀경찰의 특유한 심문 방식이라고 한다.

이탈리아 정부는 이집트 정부에 진상 규명을 요구하며 강력히 항의했다. 레제니의 모친은 지난달 이탈리아 의회에서 “살해된 아들의 모습이 거의 알아볼 수 없는 상태였다”라며 고문의 참상을 폭로했다. 국제앰네스티도 이탈리아 전역에서 레제니 살해 사건의 진실 규명을 촉구하는 캠페인을 펼치고 있다.

이쯤 되니 이집트 정부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사건 초기에 이집트 경찰은 레제니가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 뻔뻔한 발표는 이탈리아 시민들의 분노에 기름을 붓는 효과로 이어졌다.

급기야 압델 파타 엘시시 이집트 대통령이 나서서 ‘철저한 수사’를 약속했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 문제 해결 의지를 밝힌 지 열흘쯤 흘렀을 때 경찰이 ‘진상’이란 것을 발표했다. 레제니의 시신이 발견된 지 50일 만이었다. 카이로 북부에 있는 한 범죄 조직의 근거지를 급습해서 총격전을 벌인 끝에 ‘진범’을 색출했다고 한다. 이집트 내무부의 발표는 대충 다음과 같다.

‘범죄 조직과 교전 끝에 4명을 사살했다. 사망자 중 1명의 집에서 레제니의 붉은색 가방을 발견했다. 가방 안에는 이탈리아 국기, 여권, 케임브리지 대학 학생증, 휴대전화, 지갑 등이 들어 있었다. 사망자들은 경찰을 사칭하며 자국민과 외국인 납치·강도를 일삼아온 것으로 밝혀졌다.’ 레제니의 죽음은 갱단의 소행으로, 이집트 정부나 비밀경찰과는 어떤 관계도 없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유가족들은 이집트 경찰이 레제니를 고문·살해한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터무니없는 조작 결과를 내놓았다는 의견이다. 이탈리아 검찰도 고문 흔적과 범죄 조직의 연관성이 불분명하다며 레제니가 이동한 지역의 CCTV 영상과 휴대전화 기록을 요구하면서 이집트 정부에 맞섰다. 하지만 무스타파 술레이만 이집트 부검찰총장은 통화 기록을 외국 정부에 넘기는 것은 “헌법에 위배되는 범죄행위”라는 이유를 들어 수사에 협조하지 않고 있다. 파올로 젠틸로니 이탈리아 외무장관은 〈라 리푸블리카〉와의 인터뷰에서 “이탈리아 정부는 이집트 당국의 불명확한 정보를 수용하지 않을 것이며 정의를 회복할 때까지 모든 수단을 취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탈리아 야당 “이집트와 단교해야”

이런 공방이 이뤄지는 동안 이집트와 이탈리아의 외교 관계는 급격히 나빠졌다. 결국 지난 4월8일 이탈리아 정부는 마우리치오 마사리 이집트 주재 이탈리아 대사를 소환했다. 이탈리아에서 시민 수천명이 살인자들 단죄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는 와중이었다. 이탈리아 야당들은 이집트와의 단교를 촉구했다. 파올로 젠틸로니 이탈리아 외무장관도 이집트가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면 즉각적이고 적절한 조치로 대응할 준비가 돼 있다고 경고했다. 이탈리아는 경제 제재, 여행 제한 등 다양한 보복 방안을 검토 중이다.

그동안 이집트와 이탈리아는 지중해를 사이에 둔 친밀한 이웃이었다. 마테오 렌치 이탈리아 총리는 2014년 취임 이후 주요 시책으로 이집트와의 관계 강화를 추진해왔다. 이집트와 다수의 무역 및 투자협정을 체결하고 리비아 사태와 대테러 및 이민 문제에서 공조를 취하는 등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지금 레제니 살해 사건으로 양국의 외교 갈등이 경제 제재로까지 번지고 있다. 이집트 반테러법이 국경을 넘어 외교 관계 파탄까지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기자명 김영미 국제문제 전문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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