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유명 인사들 이름이 보이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최근 세계의 전·현직 국가수반 등 저명인사들이 대거 연루된 조세 회피 문건 ‘파나마 페이퍼스’가 공개돼 큰 충격을 던진 뒤 많은 사람들이 갖는 의문이다. 미국 국세청이 2014년 상원에 제출한 보고서에 따르면, 세계적으로 조세회피처를 이용한 세금 탈루 규모가 연간 1500억 달러(약 173조원)에 이른다. 세금 탈루액이 이 정도라면 분명 저명한 미국 거부가 걸릴 법도 한데, 4월13일 현재까지는  그런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사실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가 지난 40년 동안 모색 폰세카(파나마 최대의 로펌)가 조세회피처를 알선한 내용인 1150만 건의 고객 자료를 폭로하면서 드러난 인사들의 면모는 충격 그 자체다. 50개국 이상의 정치인 140명이 연루됐다. 그중에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도 있다. 아이슬란드의 귄뢰이그손 총리는 탈세 사실이 밝혀지면서 결국 사임했다. 아르헨티나의 마우리시오 마크리 대통령은 검찰 수사에 직면했다. 어디 그뿐인가. 주석 취임 후 대대적인 사정운동을 주도해온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전·현직 정치국 상무위원 8명의 친인척이 ‘파나마 페이퍼스’에 연루된 게 확인되면서, 중국 공산당 역시 정치적 곤경에 처했다.

그렇다면 정말 미국인은 단 한 사람도 없을까? 그렇지는 않다. 앞서 언급된 정계 혹은 체육계 인사들처럼 지명도가 없을 뿐이지, 파나마 페이퍼스에는 미국인 이름도 나온다. 시카고에서 투자 자문가로 활동 중인 마리아나 올스제위스키(39)가 대표 사례다. 영국 BBC 방송 보도에 따르면, 올스제위스키는 해외 은행에 가명으로 보관하던 투자금 180만 달러를 모색 폰세카를 통해 회수하려다 이번에 발각됐다. ICIJ는 그녀 외에도 미국에 주소를 둔 211명의 명단을 확보했다고 밝혔다. 이 명단에는 중대한 금융범죄를 저지른 범법자들도 포함되었다. 6500만 달러 규모의 다단계 금융 사기로 13년 징역형을 받은 로버트 미러클, 지난해 증권사기 혐의로 기소된 뉴욕 글로벌그룹의 벤저민 웨이 회장, 2007년 탈세 혐의로 5200만 달러의 벌금을 선고받은 부동산 재벌 이고르 올레니코프 등이다.

ⓒAP Photo4월5일 오바마 대통령이 조세 회피 문제에 대한 연설을 하면서 관련 세법의 개정을 촉구했다.

개인은 그렇다 치더라도 혹시 조세 회피를 도운 금융기관은 없을까? 이번 자료에 따르면 모색 폰세카가 다년간 조세 회피 목적으로 유령회사나 재단, 신탁기금 등을 조성하는 데 관여한 은행과 기업, 로펌 등 중개 기관이 전 세계적으로 약 1만4000개에 달한다. 이들 가운데 617개가 미국에 근거지를 두었다. 하지만 모색 폰세카가 고객을 위해 역외 회사를 세우는 데 가장 크게 조력한  ‘10개 중개 기관’ 가운데는 미국 금융업체가 한 곳도 나타나지 않았다. 미국이 다른 나라보다 깨끗하다는 뜻일까?

이 같은 질문에 대다수 전문가들은 고개를 젓는다. 미국의 많은 거부와 기업들도 세금을 회피하기 위해 해외에 유령회사를 세우거나, 싱가포르·홍콩 같은 나라를 조세회피처로 애용해왔기 때문이다. NBC 방송은, 자료 1150만 건 가운데 아직 검토되지 못한 것이 남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향후 미국 거부들의 이름이 등장할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또는 미국 거부들이 모색 폰세카 외의 다른 로펌을 이용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파나마는 허술한 외환 관리 체계로 인해 한때 미국인들의 조세회피처로 선호됐다. 그러나 1989년 당시 조지 H. 부시 행정부가 미군을 투입해 파나마 군부독재자 마누엘 노리에가를 축출한 뒤, 미국의 거부들이 파나마를 대거 이탈했다.

ⓒAP Photo파나마 로펌 ‘모색 폰세카’가 입주해 있는 한 빌딩의 입주사 명패.

유령회사 만들기 쉬운 델라웨어 주와 네바다 주

파나마에서 빠져나온 미국의 거부들은 어디로 갔을까? 믿어지지 않겠지만, 전문가들은 이들의 조국 미국을 꼽는다. 미국은 영국에 본부를 둔 ‘세금정의 네트워크’가 지난해 가을 선정한 ‘세계의 최고 조세회피처 톱 10’ 가운데 스위스·홍콩에 이어 3위로 선정됐을 정도로 조세 회피의 천국이다.

50개 주로 이뤄진 미국의 경우, 연방 차원의 조세 회피 방지법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조세 회피의 핵심 수단인 유령회사에 대한 규제가 주마다 다르다. 어떤 주에서는 유령회사를 설립하는 일이 매우 쉽다.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버클리 캠퍼스(UC 버클리)의 개브리엘 주크먼 교수(경제학)는 〈폴리티코〉와의 인터뷰에서 “이번 모색 폰세카 문건에 이름난 미국인들이 눈에 띄지 않는 것은 그다지 놀랄 일이 아니다. 불행히도 델라웨어 주나 네바다 주 등 여러 주에서 익명의 유령회사를 설립하는 게 너무 쉽기 때문에 굳이 먼 파나마까지 갈 필요가 없었다”라고 설명했다. 델라웨어 주의 경우, 금융기관이 고객 계정의 진짜 주인을 확인할 의무가 없다. 즉, 유령회사를 설립해서 금융기관에 계정을 만들어놓아도, 실소유주의 정체가 발각될 가능성이 크지 않다. 단적인 예로 델라웨어 주 윌밍턴 시내 중심부의 한 건물은 전 세계 28만5000개 유령회사의 주소로 등록되어 있을 정도다.

조세 회피 문건이 공개된 뒤 미국 정부가 민감한 반응을 보인 것도 그래서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이번 문건은 어느 한 나라에 국한된 게 아닌 범세계적 문제다”라며 의회에 관련 세법의 개정을 촉구했다. 이번 사건이 터진 직후, 미국 재무부는 미국 기업들의 탈세를 막기 위한 새로운 규정을 발표했다. 미국의 법인세율(35%)은 세계적으로 높은 편이다. 그래서 미국 기업들은 아일랜드·스위스·바하마 등 저세율 국가의 기업에 인수된 것처럼 서류를 꾸민다. 이렇게 국적을 바꿔버리면, 미국의 높은 법인세율을 적용받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 국세청에 따르면, 이런 방법에 따른 미국의 탈세 규모가 연간 1300억 달러에 달한다.

미국 재무부는 또한 모든 금융기관이 자사에 계정을 둔 유령회사의 지분 25% 이상을 소유한 인사의 실명을 공개토록 의무화할 것으로 알려졌다. 유령회사의 경영에 영향을 미치는 자의 실명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당초 미국 재무부가 이 같은 탈세 차단 법안들을 제안한 것은 2014년 8월인데,  드디어 마무리 단계에 들어선 듯하다.

다만 이런 규정들이 현실에서 효과적으로 탈세를 차단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예컨대 금융기관들이 자행 계좌 실소유자의 신원을 확인하도록 의무화되었다고 치자. 실소유자를 다른 사람으로 바꿔서 등록할 방법은 무궁무진하다. 금융기관들에게 이런 속임수까지 간파해서 사실 여부를 확인하라고 의무화하기는 힘들다. ‘지분 25% 이상 소유자 실명 공개’도 마찬가지다. 여러 사람 명의로 지분을 분산하면 어렵지 않게 실명을 감출 수 있다.

더욱이 ‘개혁의 적’이 매우 강력하다. 바로 미국 금융업계다. 집요한 로비로 금융업계에 불리한 법률의 제·개정을 무력화해왔다. 미국 의회는 지난 2014년 7월, 해외 금융기관들에게 해당 업체의 미국인 계정을 미국 국세청에 공개하도록 의무화한 법률(외국 계정 세금준수법)을 통과시킨 바 있다. 미국인들이 해외에 돈을 은닉해 탈세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다른 나라 금융기관의 계좌 정보를 보려면, 미국 금융기관에 개설된 다른 나라 부호의 계정을 해당국 정부에 넘겨줄 수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미국 금융기관이 ‘고객의 비밀 엄수’ 운운하며 거부해버리면 그만이다. 물론 미국 정부가 법률 제정을 통해 미국 금융기관에 정보 공개를 강제할 수 있다. 그러나 금융권이 의회(공화당과 민주당)에 강력히 로비해서 관련 법률 제정을 차단해버린다. 올해처럼 선거가 낀 해는 더욱 그렇다. 막대한 돈이 드는 선거에 금융권의 ‘실탄’은 공화·민주 후보에게 더없이 든든한 자산이다. ‘파나마 페이퍼스’ 스캔들에 따른 자성의 목소리가 공염불로 전락해버릴 가능성이 큰 이유다.

기자명 워싱턴∙정재민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