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2등은 기억하지 않는다”라며 학생들을 다그치는 교수님께 신입생이 말했다. “서커스의 사자도 채찍이 두려워 의자에 앉는 걸 배웁니다. 하지만 그런 사자를 잘 ‘훈련’받았다고 하지, 잘 ‘교육’받았다고 하진 않습니다.” 인도 영화 〈세 얼간이〉(2009)의 한 장면을 새삼 떠올린 건 영화 〈4등〉을 보고 나올 때다. “난 수영이 좋은데 꼭 1등만 해야 해요?” 청량한 물빛 영화 포스터에 새겨진 카피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잠시 그 앞을 서성이면서다. “여보, 난 솔직히 준호가 맞는 거보다 4등 하는 게 더 무서워.” 나지막했던 엄마의 고백이 쉬이 잊히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초등학생 준호(유재상)는 어려서부터 수영을 좋아했다. 남보다 빨리 헤엄치는 재능도 있었고 어제보다 오래 잠수하는 발전도 보였다. 그래서 수영 선수가 되었다. 수영 대회에 나가는 걸 즐겼다. 채찍이 없어도 스스로 의자에 오르는 사자와 같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즐겁기만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엄마가 보기엔.

“야! 4등! 너 웃음이 나와?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어 지금?” 잔뜩 화가 난 엄마(이항나) 앞에서 눈치 보며 딴청 피우는 게 일상이 되어버린 아이. 매번 4등만 하는 준호를 엄마는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 시상대에 오르지 못하면 다 소용없기 때문이다. 4등이나 40등이나 똑같은 패자일 뿐이다. 그래서 실력 좋은 코치를 찾아다닌다. 내 아이를 제일 높은 자리에 우뚝 서게 해줄 사람. 채찍을 들어서라도 아이를 1등으로 만들어줄 사람.

“내가 자기한테 그 사람 소개해주고서 벌 받는 거 아닌가 몰라.” “언니 왜 그러세요. 우리 준호 메달 따야 돼요.” “자기 애가 상처 받을까봐 그래.” 망설이는 교회 언니 앞에서 마침내 엄마가 털어놓은 진심. “언니, 나 그 상처… 메달로 가릴 거예요.” 그렇게 준호는 국가대표 출신 수영 코치 광수(박해준)를 만난다.

다그치고 윽박지르는 코치가 무서워서 죽기 살기로 헤엄친 덕에 난생처음 2등이란 걸 하게 되었다. 가족 파티가 열렸다. 오랜만에 아빠도 일찍 퇴근했다. 그때 동생 기호가 눈치 없이 물었다. “정말 맞고 하니까 잘한 거야? 예전에는 안 맞아서 맨날 4등 했던 거야, 형?” 표정이 굳어진 아빠. 변명하느라 바쁜 엄마. 차라리 물속으로 숨어버리고픈 준호.

정지우 감독이 내놓은 참 멋진 성장 영화

영화 〈4등〉에는 아픈 장면이 수두룩하다. 늘 웃던 아이가 광수를 만난 뒤 서서히 웃음을 잃어가는 모습. 차가운 새벽 수영장 물에 아이 얼굴의 미소가 씻겨 나가는 순간들. ‘4등이어도’ 해맑던 아이를 ‘4등이라서’ 시무룩하게 만든 어른들. 그래서 아프고 미안한 장면이 수두룩하다. 하지만 영화 〈4등〉에는 또한 예쁜 장면이 한가득이다. 새파란 물빛이 스크린을 가득 메우고 그 안에서 준호가 마음껏 헤엄치는 모습. 준호를 연기한 아역 배우 유재상이 눈을 반짝이며 세상을 둘러보는 표정. 그러니까, 아이가 가장 아이답게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순간들. 아프고 미안한 현실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참 예쁘고 근사한 장면이 한가득이다.

“더 빠르게”만 외치는 어른들을 비웃듯, 준호가 헤엄치는 장면에 헨델의 〈라르고〉(느리게)를 입힌 영화 〈4등〉이 모든 어른에게 묻는다. 우리 아이들은 지금 ‘훈련’을 받는 걸까, ‘교육’을 받는 걸까? 내 아이는 준호와 다르다고, 나는 절대 준호 엄마가 아니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해피엔드〉 〈사랑니〉 〈모던보이〉 〈은교〉를 만든 정지우 감독이 내놓은 참 많이 멋진 성장 영화. 누가 내게 ‘좋은 영화’가 뭐냐고 묻는다면, 지금은 망설이지 않고 〈4등〉!

기자명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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