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4일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조세피난처 파나마의 로펌 ‘모색 폰세카’의 내부 자료를 입수, 분석한 자료를 공개했다. 이른바 ‘파나마 페이퍼스’다. 이 문건에는 1977~2015년 모색 폰세카의 도움을 받아 세계 각지의 조세피난처로 돈을 빼돌린 유명 인사들의 명단과 수법이 담겨 있다.

‘파나마 페이퍼스’에 등장하는 세계 유명 인사들 이름 중에는 시그뮌뒤르 다비드 귄뢰이그손 아이슬란드 전 총리(41)도 포함되어 있다. 귄뢰이그손 전 총리의 재산 빼돌리기는 아이슬란드가 국가부도 위기를 맞아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받아야 했던 2008년 직전에 시작되었다. 이미 2007년에 모색 폰세카의 도움으로 영국령 조세피난처 버진아일랜드에 ‘윈트리스’라는 페이퍼컴퍼니를 등록한 것이다. 귄뢰이그손이 이 페이퍼컴퍼니를 통해 감춘 돈은, 부인이 부친(아이슬란드의 도요타 자동차 수입업체 오너)으로부터 상속받은 자금이었다. 귄뢰이그손은 2009년 4월 의원에 당선될 때나 2013년 총리 취임 시에도 버진아일랜드에 숨겨둔 돈은 일절 신고하지 않았다. 세금을 내지 않기 위해 조세피난처로 빼돌린 돈이니, 신고했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아이슬란드의 수도 레이캬비크에서 작은 서점을 운영하는 데비드 씨(39)는 “아이슬란드가 국가부도 직전까지 몰리는 과정에서 전 국민이 허리띠를 졸라매며 고통을 감수해왔다. 총리 자리에까지 오른 유력 정치인이 이런 시기에 재산을 빼돌린 것 아닌가. 미친 짓이고 용서할 수 없다”라며 분노했다.

ⓒEPA4월4일 아이슬란드 시민들이 의회 앞에서 파나마 페이퍼스에 거명된 귄뢰이그손 총리의 사퇴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 규모는 1만명에 달했다.

화난 아이슬란드 시민들은 4월4일 저녁 의회 건물 앞으로 모여들었다. 시위대 규모는 1만명에 달했다. 아이슬란드는 전체 인구가 33만명 정도인 작은 섬나라다. 시민들은 귄뢰이그손의 총리직 사퇴를 촉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야당도 총리 불신임 투표를 요구했다. 귄뢰이그손은 처음엔 자신의 혐의를 부인했다. 그러나 결국 시민들의 분노에 굴복해 의회의 불신임 투표를 앞두고 자진 사임하고 말았다. 귄뢰이그손이 몸담았던 집권 진보당은 수세에 몰렸다. 아이슬란드 정부는 4월6일 잉기 요한슨 농업장관(진보당)을 후임 총리로 임명했다. 그러나 새 정부는 오는 가을로 총선을 앞당겨 국민에게 신임을 물어야 할 형편이다. 정권이 교체될 가능성도 크다.

파나마 페이퍼스 앞에 ‘안전한’ 나라는 없다

파나마 페이퍼스는 귄뢰이그손보다 훨씬 강력한 권력을 가진 유럽의 다른 총리도 사면초가로 몰아넣었다. 영국의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다. 캐머런 총리의 작고한 부친 이언 캐머런이 조세피난처인 바하마나 저지 섬(프랑스 노르망디 해안에 있는 영국 군주령으로 조세피난처) 등에 투자 펀드를 설립해 운용해왔다는 내용이 파나마 페이퍼스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언 캐머런이 바하마에서 펀드를 운용한 것은 당연히 세금을 내지 않기 위해서다.

문제는 영국의 최고 지도자인 캐머런 총리가 아버지의 부정한 재산으로부터 혜택을 입었는지다. 당초 캐머런 총리는 ‘조세피난처에 등록된 금융자산(역외신탁·역외펀드)을 갖고 있지 않다’는 식으로 얼버무렸다. 영국 시민들은 “확실히 털어놓든지, 닥치고 있든지(put up or shut up)”라고 비웃었다. 이와 관련해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위험에 처한 총리’라는 제목의 기사(4월5일)에서 “캐머런 총리가 여러 의혹 중 극히 일부에 대해서만 해명하고 있다. 핵심은 총리의 아버지가 바하마에 세운 회사로부터 총리의 다른 가족들이 혜택을 입었는지 여부다”라며 캐머런을 몰아붙였다.

ⓒEPA자신의 혐의를 부인하던 귄뢰이그손 총리(위)는 4월5일 자진 사임했다.

결국 캐머런 총리는 4월7일, 취임 직전 조세피난처에 등록된 금융자산을 팔아치웠다고 실토했다. ITV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캐머런 총리는 부인과 공동으로 부친이 바하마에 등록한 투자펀드 ‘블레어모어 홀딩스’의 주식을 보유한 바 있다고 고백했다. 다만 총리 취임 넉 달 전인 2010년 1월에 약 3만 파운드(약 5000만원)를 받고 매각했다는 것이다. 사태의 추이를 지켜봐야겠지만 총리에 대한 영국 국민들의 배신감은 극에 달한 상황이다.

현재 대대적인 반부패 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중국 시진핑 주석도 매형의 이름이 파나마 페이퍼스에 등장해 스타일을 구겼다. 큰누나 치차오차오(67)의 남편 덩자구이(65)가 버진아일랜드에 ‘엑설런스 에포트 프로퍼티 디벨로프먼트’라는 유령회사를 설립했던 것이다. 2008년 3월 설립 당시 덩 씨는 이 회사의 대표이자 대주주(지분 50% 보유)였다. 그는 또한 2009년 9월 역시 버진아일랜드에 ‘베스트 이펙트 엔터프라이즈’ ‘웰싱 인터내셔널’ 등의 페이퍼컴퍼니를 추가로 등록했다. 이처럼 매형이 해외로 재산을 빼돌리는 동안 시진핑은 국가부주석, 공산당 중앙당교 교장 등의 요직을 맡고 있었다. 시진핑은 저우융캉 전 정치국 상무위원 등 부패한 당원 75만명을 강력하게 처벌하면서 정작 자신의 가족을 포함한 당 고위 인사들 비리에는 눈감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의 중국 정치 전문가 윌리 램은 〈월스트리트 저널〉과의 인터뷰에서 “파나마 페이퍼스가 시 주석의 반부패 운동에 대한 일반 시민과 당원의 냉소를 키울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 공산당은 당원들이 조세피난처에 회사를 설립하거나 혹은 이런 회사에 투자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하지만 중국 건국의 아버지 마오쩌둥의 손녀사위인 천둥성, 후야오방 전 총서기의 아들 후더화까지 스캔들에 휘말렸다. 이번 파나마 페이퍼스 파문으로 중국 고위 관료층의 부정부패에 대한 대중의 불신과 분노는 더욱 심화될 것으로 보인다.

타이완에서도 총통 당선자인 차이잉원 민진당 주석의 오빠 차이잉양이 모색 폰세카를 통해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한 사실이 드러났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요르단,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UAE, 수단 등의 지도자들의 이름도 파나마 페이퍼스에서 거론되고 있다. 한편 아제르바이잔, 시리아, 이집트, 코트디부아르 등의 국가 지도자 가족과 더불어 한국에서는 노태우 전 대통령의 장남 노재헌씨가 영국령 버진아일랜드에 3곳의 유령회사를 설립한 사실을 인터넷 언론 〈뉴스타파〉가 확인했다.

현재 파나마 페이퍼스 파장은 정계를 넘어 연예계와 스포츠계로 확산되고 있다. 홍콩 영화배우 청룽과 FC 바로셀로나 소속 축구 선수 리오넬 메시, 영국 유명 음반 제작자 사이먼 코웰, 거장 영화감독 스탠리 큐브릭, 유명 골프선수 닉 팔도 등도 파나마 페이퍼스에 언급되었다. 브라질 국가대표 축구 선수인 윌리안은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첼시로 이적하고 한 달 뒤인 2013년 9월 버진아일랜드에 유령회사를 설립했다. 이 밖에 스페인의 영화 거장 페드로 알모도바르를 비롯해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의 아들 마크 대처와 앤드루 영국 왕자의 전 부인 새러 퍼거슨, 비틀스 멤버 폴 매카트니의 전 부인 헤더 밀스 등도 포함되었다. 후안 페드로 다미아니 국제축구연맹(FIFA) 윤리위원을 비롯해 축구계에도 상당한 파장이 예상된다. 이쯤 되면 파나마 페이퍼스는 ‘까도 까도 나오는 양파’처럼 후폭풍이 어디까지 확산될지 예측하기 힘들 정도다.

단지 도덕적 비난에 그치지 않고 법적인 처벌로 이어질 수도 있다. 브라질 검찰은 파나마 페이퍼스에서 거론된 오데브레시 같은 건설업체는 물론 에두아르두 쿠냐 하원의장 등 유력 정치인들도 수사하기로 했다. 캐나다 국세청도 세금 탈루 의혹을 받는 자국민을 수사하기 위해 ICIJ에 자료를 요청했다.

국제금융건전성기구(GFI)가 지난해 말 발표한 〈개발도상국의 불법자금 유출〉 보고서에 따르면, 2004년부터 2013년까지 10년간 조세피난처 등으로 유출된 개발도상국 자금(누적액)이 7조8000억 달러에 달한다. 이로 인해 손상되는 것은 민주주의라는 가치다. 〈뉴욕 타임스〉는 “(자금 빼돌리기로 인한) 세입 손실보다 민주주의와 지역 질서의 파괴가 훨씬 위험하다”라고 보도했다. 노재헌씨 외에 한국인 195명도 파나마 페이퍼스에 이름을 올린 것으로 알려진다.

기자명 김영미 국제문제 전문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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