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격받은 공동체는 선택의 기로에 선다. 2015년을 1월의 〈샤를리 에브도〉 테러로 시작해서 11월의 바타클랑 극장 테러로 끝내야 했던 프랑스가 지금 그렇다. 한편에는 자유·평등·우애를 내걸며 더 많은 관용과 다양성과 통합을 외치는 프랑스가, 또 한편에는 이슬람교와 난민의 물결에 맞서 제도적·심리적으로 장벽을 쌓아올리는 프랑스가 있다. 누군가는 개방적 다원주의 프랑스의 회복력을 신뢰하고, 또 누군가는 이슬람과 아랍 난민을 최대한 차단하는 멸균실 프랑스를 지지한다.

〈시사IN〉은 프랑스 외무국제개발부 초청으로 3월7일부터 12일까지 6일간 프랑스 파리에 머물면서 테러 공세와 난민의 물결을 맞이한 프랑스의 선택을 취재했다. 테러, 난민, 국내 정치, 국제 정치 등 주제마다 프랑스에서 손꼽히는 전문가들을 만났다.

● 적이 원하는 ‘증오’를 차단하라

마르크 에케르는 권위를 인정받는 독립 싱크탱크인 프랑스 국제관계연구소(IFRI)의 안보연구센터 연구원이자, IFRI가 내는 전문지 〈폴리티크 에트랑제르(국제 정치)〉 편집장이다. 한국에서 찾아간 기자들은 그에게 프랑스 정부의 테러 근절책을 되풀이해 물었다. 거의 난상토론에 가까워진 인터뷰 중에 에케르 편집장은 이렇게 말했다. “테러가 일어날 때마다 무언가 새로운 대책을 기대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대책의 인플레이션이 생긴다. 앞으로도 테러는 있을 것이고, 이것은 장기적인 싸움이다. 정부가 다 막을 순 없다. 결국 사회의 회복력을 키우는 게 핵심이다.”

심각한 테러를 겪어본 적이 없는, 그래서 조그마한 테러 위협이라도 멸균하듯 차단해야 한다는 한국 정서에 익숙한 기자에게 “테러를 다 막을 순 없으니 사회의 회복력을 길러야 한다”라는 접근법은 낯선 것이었다. 에케르 편집장은 ‘회복력’을, 마치 파도에 휩쓸린 배가 평형을 되찾듯, 외부에서 충격을 받고도 균형 잡힌 상태로 돌아오는 능력이라는 의미로 썼다.

테러를 억지할 수는 있지만 근절할 수는 없다. 프랑스는 다인종·다문화 국가이고, 여러 아프리카 국가와 식민 지배의 역사로 얽혀 있다. 테러와 같은 ‘값싼 전쟁’(〈시사IN〉 제428호 ‘값싼 전쟁과 마주친 세계’ 기사 참조)은 너무나 저비용이고 비대칭적이어서 근절은 불가능에 가깝다. 이런 현실을 정직하게 설득하지 않으면 대중은 비현실적인 기대치를 갖고 테러가 날 때마다 더 센 대책을 요구하게 된다.

그 귀결은 프랑스의 순수한 정체성을 강조하고 외부자를 배제하는 정치적 극단주의다. 이것이야말로 지하디스트(이슬람 무장 성전주의자)가 원하는 결과다. 정체성과 정체성의 충돌은 테러가 노리는 폭력과 증오의 악순환을 충실하게 배양한다. 그는 “테러로 상대의 리액션(반응)을 일으키자는 것이 지하디스트의 전략이다. 이 함정에 빠지면 안 된다”라고 했다. 테러가 나더라도 사회가 폭력과 증오를 배양하는 대신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는 회복력이 중요하다. 이것은 장기적인 싸움이기 때문에 “함정에 빠지면 안 된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EPA〈/font〉〈/div〉지난해 11월 총기 테러로 5명이 숨진 파리 시내 라 본 비에르 카페는 한 달 만에 다시 문을 열었다.

프랑스는 테러 선동 사이트의 IP를 막을 수 있는 법을 2014년 11월 도입했다. 그런데 지하디스트 선전전의 주 무기는 페이스북과 트위터 등 미국산 SNS다. 에케르 편집장은 “이 법대로라면 트위터도 막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상상도 못할 일이라는 뉘앙스였다. 기자가 물었다. “중국은 그렇게 하고 있는데?” 그는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여긴 프랑스니까. 내가 살아가야 하는 땅이니까.”

지난해 11월 테러 이후 파리 시민들은 거리의 카페에서 사진을 찍어 ‘나는 테라스에 있다’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SNS에 올렸다. 테러의 위협에 일상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이 강력한 메시지는 테러 반대를 상징하는 구호가 되었다. 테러에 대한 프랑스의 응답은 공격에 반응해 멸균실을 만드는 게 아니라 회복력을 과시하는 것이었다.

● 프랑스인에게 통합 유럽은 ‘계륵’

테러가 한 번에 들이닥치는 암초와 같은 충격이라면, 시리아 정권 붕괴 이후 꼬리를 무는 난민의 물결은 한순간도 쉴 틈 없이 배의 무게중심을 흔드는 파도와 같다. 프랑스의 엘리트 정치학 교육기관인 파리정치대학(시앙스포) 산하 국제문제연구소 카트린 비틀 드벤덴 소장은 국제 이주 문제에서 손꼽히는 전문가다. 드벤덴 소장은 “이주 문제가 유럽 통합의 기본정신인 연대(solidarity)의 위기를 불러오고 있다. 이것은 유럽 통합의 위기다”라고 말했다.

난민 문제는 유럽 통합의 현주소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이 문제는 유럽 차원의 공동 대응이 필요하지만, 근본적으로는 각국의 주권 문제여서 유럽연합(EU)은 사실상 권한이 없다. 유럽연합의 공간적 통합 수준은 높은데 정치적 통합 수준은 그보다 한참 처진다. 그 격차를 정확히 찔러 들어온 것이 난민 문제다. 일단 난민이 유럽연합 역내로 들어오면 국경을 출입국 심사 없이 넘나들 수 있다. 유로화와 더불어 유럽 통합의 중요한 버팀목인 솅겐 조약은 회원국끼리 심사 없이 국경을 통과하도록 보장한다.

난민 문제가 솅겐 조약을 후퇴시킬까. 일부 국경 통제가 강화되었지만, 전면 폐지까지 가지는 않으리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국경 개방과 공간적 통합의 경제효과는 아주 커서 국경의 부활은 유럽의 지도자들이 선택하기 쉽지 않은 옵션이다. 프랑스 정부 산하 국가전략 싱크탱크 ‘프랑스 스트라테지’는 솅겐 조약을 폐지할 경우 향후 10년간 솅겐 조약 영역 내의 GDP 손실액이 1100억 유로(약 144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AP Photo〈/font〉〈/div〉마케도니아 남부 게브겔리야 인근 기차역에서 열차를 타려는 난민들. 난민은 유럽 통합이 맞이한 최대 도전이다.

하지만 변수는 있다. 반(反)이민 극우파가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 드벤덴 소장은 “국경 검문을 주장하는 민족주의가 전 유럽에 고조되고 있다. 유럽은 개별 국가를 통제할 힘이 없고, 각국 정부는 일관된 난민정책 없이 여론을 뒤쫓는다”라고 말했다. 민족주의의 부활은 통합 유럽이라는 오랜 목표를 뒤흔든다.

프랑스의 정치가 로베르 쉬망(1886~1963)은 2차 세계대전 이후 폐허가 된 유럽 정치무대에서 통합 유럽이라는 아이디어를 제안한 선구자다. 그를 기리는 싱크탱크 로베르 쉬망 재단은 유럽 통합 연구를 목적으로 1991년 수립됐다. 로베르 쉬망 재단의 이사장 파스칼 조아넹은 “난민은 유럽 통합이 맞이한 최대의 도전이다. 이주 문제 때문에 유럽에 반(反)통합 포퓰리즘이 증가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조아넹 이사장은 통합 유럽의 꿈이 거대한 도전에 직면했다고 보면서도, 근본적으로는 낙관파다. “지난해 7월 그리스의 국민투표는 유럽연합이 부과한 개혁안도 싫지만, 그럼에도 유로존 탈퇴는 안 된다는 메시지였다.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브렉시트) 투표도 큰 차이는 아니겠지만 결국 부결될 걸로 본다. 통합이 가져다주는 이익이 외면하기에는 너무나 크다.” 통합 유럽의 회복력을 떠받치는 핵심은 통합이 유발하는 경제효과라는 얘기다.

‘프랑스 스트라테지’의 장피사니 페리 소장은 신중한 태도로 여론의 추이를 들려줬다. “유로존 전체에서 1인당 GDP가 2007년 대비 떨어졌다. 이런 현상은 2차 대전 때나 있었던 일로, 70년 만에 처음이다. 프랑스인들이 불만을 느끼는 건 당연하다. 여론조사를 해보면, 유로존을 좋아하느냐고 물으면 아니라고 하는데, 그렇다고 탈퇴를 원하느냐 하면 또 그것도 아니라고 한다.” 불만은 높은데 가야 할 길에 대한 확신은 없다.

● ‘도긴개긴’ 지겨워 판 엎을까

“내년 5월 대선에서 마린 르펜은 이미 결선 후보 한 자리를 예약했다. 상대가 누구냐가 문제일 뿐이다.” 파리정치대학 브뤼노 코트레스 교수는 한국에서 온 기자들에게 이런 말로 충격을 주며 인터뷰를 시작했다.

극우 정당 국민전선을 이끄는 마린 르펜이 대선 결선투표에 진출한다면, 2002년 대선 당시 그녀의 아버지 장마리 르펜의 결선 진출 이후 15년 만의 사건이다. 중요한 차이도 있다. 2002년 장마리 르펜의 결선투표 진출은 거의 예상하지 못했던 벼락같은 사건이었다. 2017년 그의 딸은 한 자리를 예약해두다시피 했다. 35% 안팎의 지지율을 유지하는 국민전선은 지지 기반만 놓고 보면 프랑스 제1당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민전선은 세계화와 유럽 통합 때문에 삶이 나빠졌다고 믿는 사람들의 지지를 받는다. 비정규·저숙련·저교육 노동층이 지지층으로 대거 유입되었다. 교육·의료 분야의 하위 공무원은 역사적으로 사회당의 굳건한 지지 기반이었는데 이제는 상당수가 국민전선에 투표한다. 국민전선 지지층은 난민 유입에도 매우 적대적인데, 마린 르펜은 난민 중에 테러리스트가 섞여 있다고 주장한 첫 번째 정치가다. 완벽한 거짓은 아니나 심각한 과장이었다.

코트레스 교수는 “좌파·우파가 교대로 정권을 잡아도 문제를 해결하는 세력이 없더라는 환멸이 두텁다. 2차 대전 이후 정립된 정치 시스템이 세계화와 유럽 통합에 제대로 대응을 못했다”라고 말했다. “국민전선은 극우 정당이지만 복지를 주장한다. 단 이들의 노선은 복지 쇼비니즘(국수주의)이다. 복지국가는 좋지만 복지는 프랑스인에게만 주어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운다.” 전후 유럽 체제의 합의 중 하나이자 대체로 좌파의 의제였던 복지국가 시스템은 이렇게 해서 극우파의 배타적인 정체성 정치와 결합했다.

2차 대전 이후 서구 세계의 정치는 좌·우파의 이념이 가운데로 수렴하는 추세를 보여주었다. 좌파는 국유화를 포기하고 시장경제를 받아들였고, 우파는 완전한 시장 자유 대신 일정한 정부 개입과 사회안전망의 필요성을 인정했다. 이념 노선과 정책 수단에서 좌·우파는 무게중심을 어디에 두는가만 다를 뿐 큰 틀에서 합의를 이루었다. 이 수렴 현상은 2차 대전 이후 서구 정치를 규정하는 중요한 특징이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AP Photo〈/font〉〈/div〉프랑스 극우 정당 국민전선의 마린 르펜 대표는 내년 대선 결선투표 진출이 유력하다.

그런데 이것이 흔들리고 있다. 세계화와 유럽 통합이라는 새로운 물결은 경제의 규모를 더 키워낸 반면 전에 없던 탈락자도 양산해냈다. 이들은 전후 합의의 범위 안에 머무르는 좌·우파를 공히 불신한다. ‘합의 밖’에 있던 세력이 위력을 떨친다. 그것이 좌파일 수도 우파일 수도 있지만(그리스와 스페인에서는 좌파였다), 어쨌든 합의의 틀 밖에서 새로운 세력이 떠오르는 흐름은 세계적인 현상이다. 그리고 프랑스는 그 흐름이 오른쪽으로 쏠렸다.

2015년에 나온 미셸 우엘벡의 소설 〈복종〉은 2022년 이슬람 정당이 프랑스 대통령을 배출한다는 논쟁적인 내용으로 프랑스를 넘어 세계를 강타했다. 소설은 전후 합의의 붕괴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2022년 대선에서 이슬람 정당과 결선에서 맞붙는 당은 국민전선이고, 기존 좌우 정당은 아예 결선에도 오르지 못한다. 대선 토론을 지켜보던 주인공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몇 년 전부터 국민과 국민의 이름으로 말하는 자들 사이의 간극이 점점 커져가고 있으며 돌이킬 수 없는 심연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치인들이나 기자들이 좀 더 혼란스럽고 폭력적이며 예측 불가능한 무언가를 추구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프랑스의 선거제도는 결선투표제다. 국민전선의 권력 장악을 이 결선투표제가 위태롭게 방어하고 있다. 국민전선 후보가 결선투표에 올라가면 기존 좌우 정당 지지자들이 반(反)극우파 연대 투표를 한다. 이 때문에 국민전선이 최종 당선자를 내기는 쉽지 않다. 파리 테러 직후 치러진 2015년 지방선거에서 국민전선은 1차 투표에서 압승하고도 결선투표에서 참패했다.

그러나 이런 식의 걸러내기는 또 다른 심각한 위기를 일으킨다. “대선 5주 후에는 총선이 있다. 총선에서도 비슷한 패턴, 예를 들어 국민전선 후보가 1차 투표에서 35%를 얻고 결선투표에서 우수수 낙선하는 상황이 벌어진다고 해보자. 그러면 유권자 35%의 지지를 받는 정당이 극단적으로 말해 의석은 한 석도 얻지 못할 수 있다. 이런 모순을 프랑스 국민이 과연 용인할까?” 프랑스의 민주주의 시스템이 정당성 위기에 처할 수 있다고 예고하는 질문이다.

거센 물결 위로 항해하는 배가 그려진 파리 시의 문장은 지금 프랑스의 상황에서 의미심장하다.

● 불안하다고 배 안 띄우랴

중세의 파리는 상인 조합의 도시였다. 파리 시를 상징하는 문장(紋章, 아래 그림)에는 거센 물결 위로 항해하는 배가 그려져 있다. 배 아래로 ‘FLVCTVAT NEC MERGITVR’라는 슬로건을 쓴다. ‘흔들릴지언정 가라앉지 않는다’라는 의미의 라틴어다. 2015년 파리 테러 직후 시민들이 이 슬로건을 외쳐 세계에 알려지기도 했다. 프랑스의 오늘을 이 문장만큼 잘 나타내주는 말도 흔치 않다. 배를 뒤흔드는 강한 압력이 있고, 가라앉지 않고 평형을 회복하겠다는 의지가 있으며, 배를 띄우지 말고 항구에 두면 가라앉지 않는다며 불안한 이들을 상대로 인기몰이를 하는 세력도 있다.

테러 이후 프랑스는 빠르게 일상으로 돌아오며 회복력을 과시했다. 개방과 통합을 지지하는 엘리트의 목소리는 더 단호해졌다. 세계는 파리 시민의 ‘나는 테라스에 있다’ 사진에 찬사를 보냈다. 하지만 현실은 그보다는 조금 더 복잡했다. 세계화와 유럽 통합의 와중에 버림받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외부에서 온 이주자와 이슬람에 책임을 돌리며, 그들과 나 사이에 울타리를 쳐주길 원한다. 이민자 가정 출신이 저지른 테러는 이 ‘외부의 적’ 서사에 결정적으로 힘을 실어주었다. 이들은 극우 정당에서 자신의 대변자를 발견했다. 기존 좌우 정당의 결선 경쟁에 최적화된 선거제도는 이 새로운 도전을 어느 정도 걸러내겠지만 곧 과부하가 걸릴 수 있다.

프랑스 공동체의 회복탄력성이 진정한 시험대에 섰다. ‘흔들릴지언정 가라앉지 않는다’는 그래서 더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배를 띄우고 앞으로 나가려는 이들에게 흔들림은 필연이다. 대안은 배의 회복력을 높이는 것이지 물결 없는 항구로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파리의 토대를 닦았던 중세 상인들은 잘 알고 있었다.

기자명 천관율 기자 다른기사 보기 yu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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