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조남진

박종대씨의 아들 방은 각종 문서로 꽉 차 있었다. 모두 세월호와 관련된 자료다. 더 이상 둘 공간이 없어서 되도록이면 프린트하지 않으려고 한다. 각종 재판 자료, 청문회 속기록, 경찰 수사 기록, 세월호 내부 검증조사 녹취록 등 1000쪽이 거뜬히 넘는 파일 수십 개가 교과서 대신 꽂혀 있다. 방의 주인인 수현군은 없다. 그를 둘러싼 흔적만 빼곡히 남았다.

박씨는 선장과 선원들의 재판에 참석해 오가는 말들을 모두 휘갈겨 적었다. 유가족에게는 노트북 지참이 허락되지 않았다. 의원실을 돌아다니고, 다른 배 선장을 만나고, 목격자를 찾으면서 증언을 모았다. 그렇게 손에 쥔 자료가 15만 장에 이른다. 용량만 3테라바이트다. 수만 장의 기록 속에 아들이 죽게 된 진실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홀로 기록더미와 씨름을 하던 그가 재단법인 ‘진실의 힘’을 만났다. ‘진실의 힘’은 군사독재 정권 시절 중앙정보부와 안기부(현 국정원) 등에 끌려가 ‘간첩’으로 조작되었던 생존자들이 재심 재판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은 후 국가로부터 받은 손해배상금의 일부를 출연해 설립한 기관이다. 국가의 책임을 추궁하며 험난한 길을 걸어온  ‘진실의 힘’에서 ‘세월호의 진실’을 길어 올리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세월호 기록팀’이 꾸려졌다. 취업준비생 박다영씨, 대학원생 박현진씨, 〈한겨레21〉 정은주 기자, 박수빈 변호사가 결합했다. 2015년 5월 이후 10개월 동안 기록을 분석하면서 진실의 조각을 꿰었다. 그 결과물이 지난 3월10일 발행된 책 〈세월호, 그날의 기록〉이다. 책의 어디에도 집필진의 약력은 나와 있지 않다. 독자들이 온전히 이 책에 담긴 이야기에만 집중하기를 바라는 염원에서다. 〈세월호, 그날의 기록〉의 마중물이 된 박종대씨, 세월호 기록팀 박수빈 변호사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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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족 박종대씨 “‘왜 안 구했느냐’가 맞다”

2014년 4월16일 오전. 차로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를 냈다. 진도로 향하는 길, 빠른 속도 탓에 휴대전화로 연결한 DMB 화면이 자주 끊겼다. 간간이 앵커의 목소리만 들렸다. 전원구조 오보에 대해 마치 핑계라도 대는 듯한 멘트는 아직까지 생생하다. “파도가 높지 않았다. 날씨가 좋았다. 해경이 가까이 있었다. 선장이 적시에 퇴선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마지막 멘트. “생존자를 구조하기 위해 특공대가 선내 곳곳을 샅샅이 뒤지고 있다.” 박씨는 단순 오보였다면 이러한 사족이 붙지는 않았으리라고 생각한다. ‘누군가가 끊임없이 잘못된 정보를 주었고 언론에서 이걸 그대로 받아쓴 게 아닐까?’

아이가 뭍으로 나온 이후 회사를 휴직하면서 그간의 언론 보도를 정리했다. 6월10일, 이준석 선장 등 세월호 승무원에 대한 재판이 시작되면서 기록도 챙겼다. 그때 아예 사표를 썼다. 운신이 자유로워지자 국회, 전라남도 조도, 동거차도, 부산 해양대 등 전국 각지를 찾아다니며 목격자와 전문가의 증언을 모았다. 4·16가족협의회 진상규명분과장을 맡으면서 박차를 가했다. 어쩌다 한 번 있는 술자리에서는 새롭게 알게 된 내용을 꿰어 맞추고 복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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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박수현군의 방은 각종 문서로 가득 차 있다. 아버지 박종대씨(위)가 모은 세월호 관련 자료들이다.

15만 장에 이르는 자료가 쌓였다. 지난해 3월부터 4개월간 꼬박 자료만 보았다. 새벽 3시에 눈뜨자마자 기록을 살폈다. 아침 식사를 하고 나면 기록을 읽고, 산책 후 또 읽었다. 잠들기 전까지 읽고 또 읽었다. 이렇게 하루 200장이 넘는 자료를 눈에 넣었다. 저절로 외워질 정도였다. 초여름이 되자, 한 장씩 자료를 넘기던 왼쪽 엄지손가락에 경련이 왔다. 손가락을 펴는 게 어려웠다. 앉아만 있었던 탓에 몸무게가 10㎏이나 늘었다.

밤낮으로 읽던 것을 멈추고 4·16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에 제출할 조사신청서를 썼다. 그간 읽은 것을 바탕으로 의문이라고 생각했던 점을 정리했다. ‘국정원’ ‘청와대’ ‘에어포켓’ ‘가족 사찰’ ‘해경 통화 내역’ ‘초기 수사 개입’ 등 38개 키워드로 분류했다. 분류 내 세세한 의문 사항까지 나누면 150건에 이른다. 그는 조사신청서를 쓰면서 네 가지 원칙을 세웠다. ‘제일 먼저 낼 것, 제일 마지막까지 챙길 것, 가장 많은 질문을 낼 것, 최고 질 좋은 질문을 낼 것.’

그가 쓴 조사신청서의 사건 발생 일시는 ‘2014년 4월16일 08:48경∼현재’다. 박씨에게 2014년 4월16일은 현재진행형이다. 가해자 난에는 대통령 이름 ‘박근혜’를 적었다. 그가 보기에도 ‘가해자’ 처벌 가능성은 요원하다. 박씨가 기록을 향해 달리는 동안 특조위의 움직임은 더디기만 하다. 정부와 여당의 방해를 뛰어넘지 못하는 현실에 대해 “대단히 아쉽다”라고 그는 나지막이 말했다. 특조위에서 해경 상황실과 수뇌부까지만이라도 진상이 규명될 수 있기를 빈다. 하지만 특조위 활동 기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아무 성과 없이 끝난다면 유가족의 한 사람으로서 특조위를 욕할 수밖에 없다”라는 그의 말에 한탄이 배어 있었다.

박씨가 〈세월호, 그날의 기록〉을 보면서 아쉬운 건 딱 한 가지다. “2부의 ‘왜 못 구했나’는 ‘왜 안 구했느냐’가 맞다. 당연히 구해야 하는데 안 구했다. 할 수 있는데도 안 구했다.” 그는 4·16가족협의회 진상규명분과장직을 내려놓았다. 장기전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지난 2월1일 재입사했다. 기록 읽기는 멈추지 않는다. 새벽 5시에 일어나 출근 전까지 자료를 보고, 저녁 6시에 일을 마치면 자료를 읽다 밤 10시께 귀가한다.

박수빈 변호사 “맥락을 알면 의미가 달라진다”

그녀에게 세월호는 변호사로서 맡은 첫 ‘사건’이다. 2015년 초, 로스쿨을 졸업하고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 앞으로 평생 법조계에 종사하겠지만 ‘첫’ 사건은 한 번뿐이다. 어떤 일로 시작하면 좋을까 고민하던 참에 ‘진실의 힘 세월호 기록팀’ 소식을 접했다. 중요한 자료가 흩어져 있기만 한 데 놀랐다. “세월호 관련 자료가 엄청나게 많다. 다 보고 정리를 해보자.” 변호사이기도 하지만 기회가 주어졌을 때 맡은 바 일을 다하는 게 시민으로서의 책무라고도 생각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본다.” 그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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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기록팀에 합류한 박수빈 변호사에게 세월호는 변호사로서 맡은 첫 사건이다.

다만 기록이 그저 소비되어선 안 된다는 절실함이 있었다. 진지한 태도로 접했다. 세간에 퍼지는 음모론에 답을 하기 위한 건 결코 아니었다. ‘익사당했다’ ‘구조하지 않았다’는 추상적인 말은 금방 잊힌다. 구체성을 담고 싶었다. ‘국가기관 및 여러 주체가 만든 자료, 배 안에서 피해자가 경험한 기록을 합쳐보면 좀 더 진실에 가까운 이야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2015년 5월 ‘세월호 기록팀’은 서울 종로구 진실의 힘 사무실에서 합숙하다시피 했다. 모든 자료를 한 번씩 훑는 데만 3∼4개월이 걸렸다. 이미 본 자료를 보고 또 보았다. “해경 멘트가 이상한데요?” “이 시간 해경 기록을 본 적 있어요?” 토론은 밤낮없이 이어졌다. 세월호 안팎의 상황을 머릿속에 그리는 데 6개월이 소요됐다. 세월호의 기울기와 승객·해경·선원의 움직임 얼개가 서서히 맞춰졌다.

활자는 때때로 감정의 요동을 일으켰다. 읽어야 할 자료가 쌓인 와중에도 피해자의 두려움이 그대로 엄습할 때가 있었다. 전체적인 상황을 이해하고 나서 이전에 본 동영상을 다시 보자, 전에 없던 무서움이 와락 일었다. ‘배가 얼마만큼 기울었을 때구나’ ‘선내에 갇힌 채 해경의 소리를 들었겠구나’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책을 탈고한 뒤 다시 읽는 게 겁이 났다. 박 변호사는 〈세월호, 그날의 기록〉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했다. “하나로 집대성해서 맥락을 읽을 수 있도록 했다. 맥락을 알면, 사건의 의미가 달라진다.”

〈세월호, 그날의 기록〉에서는 시간 오차를 바로잡았다. 작성 주체에 따라, 기록물에 따라 실제 시각이 최소 1분30초에서 최대 12분까지 차이가 났다. 이에 따라 세월호의 변침 시각과 관계자의 교신 시각 등을 ‘바로잡았다’. 행위가 발생한 시각을 알아야 그 당시 ‘말’이 나온 배경을 알 수 있어서다.

기록팀은 세월호의 ‘마지막 교신’ 내용을 찾았다. SSB 통신(어선에서 사용하는 무선 시스템) 기록에서 1등 항해사 신 아무개씨가 제주 운항관리실과 통신한 음성파일을 발견했다. 4월16일 오전 9시40분께 승객을 버리고 도주하기 직전, 선원이 남긴 목소리였다. “지금 승객이 450명이라서 지금 경비정 이거 한 척으로는 부족할 것 같고, 추가적으로 구조를 하러 와야 될 것 같다.”

세월호 선원이 해경 경비정으로 승객을 구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인식한 상태에서 도주했다는 사실을 밝혀낼 단서였다. 하지만 대법원이 이미 세월호 선장에게만 살인죄를 적용하고 간부 선원에게는 살인의 고의가 인정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뒤였다.

박 변호사는 ‘자기 역할을 하지 않은 나태와 무능’이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원인이라고 보았다. 선원은 선원으로서, 해경은 해경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다. 맡은 바 책임을 다했다면 304명이 수장되는 참사에 이르렀을까? 〈세월호, 그날의 기록〉에는 해경, 선원, 청해진해운 임직원 및 세월호 사건과 직무상 관련된 공직자들이 실명으로 표기돼 있다.

세월호에 승선했던 다섯 살 권 아무개양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구조되었다. 배 안으로 바닷물이 쏟아져 들어오자 단원고 학생과 승객이 손을 모아 난간 밖으로 권양을 밀어 올려보냈다. “애기요, 애기!” 당시 이 광경은 책임자가 자기 먼저 구조돼버린 처참한 상황을 지켜보기만 했던, 비탄에 빠진 국민에게 커다란 울림을 주었다. 박 변호사는 “〈세월호, 그날의 기록〉은 언젠가 권양이 이 책을 읽을 때를 생각하며 부끄럽지 않을 만큼 정성스럽게 만들었다”라고 말했다. 권양의 오빠와 아빠는 여전히 ‘미수습’된 상태다. 울컥 솟구치는 눈물에도 책을 덮어버릴 수만은 없는 이유다.

기자명 송지혜 기자 다른기사 보기 song@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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