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방이 없어진 건 초등학교 3학년 무렵이었다. ‘과장님’으로 불리던 아버지가 ‘사장님’ 소리 한번 듣고 싶어 시작한 사업이 망해버렸다. 마당 딸린 2층 양옥 세간살이 곳곳에 빨간 딱지가 붙더니 결국 방 두 칸짜리 지하 셋방으로 밀려났다. 버리지 못하고 가져온 장롱이며 책상이며 이불 보따리 따위가 방 한 칸을 다 차지한 통에 네 식구가 남은 방 하나에 모여 살았다. 아버지가 빚쟁이를 피해 도망간 터라 다섯 식구가 같이 살지 않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다섯 명이 살기엔 방이 너무 좁았으니까.

그때 나는 깨달았다. 세상은 두 종류의 사람으로 나뉜다는 걸. ‘집’에 사는 사람과 ‘방’에 사는 사람. 태어나 줄곧 ‘집’에 살던 내가 별안간 ‘’에 사는 처지가 되고 나니 모든 게 달라진 것이다. 좁아진 건 공간만이 아니어서, 나의 생각도 마음도 꿈도 자꾸만 작아졌다. 그렇게 6년에 걸쳐 볼품없이 쪼그라든 뒤에야 간신히 새 집을 구했다. 가까스로 ‘방’을 탈출했다.

내가 단칸방의 낭만을 떠벌리게 된 건 단칸방을 완전히 벗어난 뒤의 일이다. 가난의 추억을 웃으며 이야기하게 된 것도 더 이상 가난하지 않게 된 다음부터다. 영화 〈라스트 홈〉의 주인공 데니스(앤드루 가필드)가 바란 것도 딱 그만큼이었다. ‘방’에서 벗어나는 것. ‘집’으로 돌아가는 것. 생각도 마음도 내 아이의 꿈도 더 이상 쪼그라들지 않는 것. 그리하여 집을 잃고 방에 유배된 현재의 시간을 어서 빨리 지난날의 낭만과 추억으로 만들어 멀리 밀쳐내는 것. 그렇게만 된다면 무슨 일이든 할 각오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 간절한 욕망을 부동산 브로커 릭(마이클 섀넌)이 부추긴다. 다른 사람의 집을 한 채씩 빼앗을 때마다 네가 살던 집에 한 발씩 가까워진다고 속삭인다. 도덕과 정의는 이미 거추장스러운 것이 되어버렸고, 탐욕과 폭력만이 거부할 수 없는 유혹으로 다가오는 시대. 잠시 망설이던 데니스가 결국 릭의 손을 잡는다. 남의 행복을 짓밟는 것으로 자신의 행복을 되찾으려 한다. 더 이상 ‘방’에 사는 사람이고 싶지 않아서. 다시 예전처럼 ‘집’에 사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이후의 삶에 초점

이 영화의 각본을 쓰고 직접 연출한 라민 바흐러니 감독은 최대한 많은 이의 이야기를 수집했다.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당시 허망하게 집을 빼앗긴 이들의 다양한 사연을 모았다. 그렇게 손에 넣은 377개의 비극, 377번의 분노, 377명의 좌절을 하나의 이야기로 압축한 〈라스트 홈〉. 제법 튼튼한 두 개의 바퀴로 굴러가는 이야기라서 쉽게 쓰러지지 않는다. ‘딜레마’와 ‘아이러니’를 모두 장착한 스토리는 언제나 휘청거리지 않는 법이다.

내가 구명보트에 오르려고 남을 바다에 빠트리는 사람이 되고야 말 것인가. 알량한 도덕 때문에 내 아이의 미래를 포기하고 말 것인가. 응원하기도, 비난하기도 쉽지 않은 데니스의 선택. 어느새 관객의 것이 되어가는 데니스의 딜레마. 그에게 ‘방’을 벗어나라고 부추기는 릭은 애초에 그의 ‘집’을 빼앗은 자였으니. 자신을 나락에 빠트린 장본인에게 매달려 자신의 인생을 구원하려 애쓰는 꼴이라니. 부인하고 싶어도 부인할 수 없는, 우리 시대의 흔해빠진 먹이사슬. 슬그머니 관객의 삶 위에 포개지는 데니스의 아이러니.

“100명 가운데 한 명만 방주에 타는 거야. 나머지 99명은 가라앉는 거지.” 릭이 이렇게 말할 때 〈라스트 홈〉은 더 이상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권력과 자본이 공모해 성실한 시민을 벼랑 끝에 세운 사례는 미국에만 있지 않다. 영화를 보면 꼭 우리 이야기 같을 것이다. 흥미진진하고 의미심장한 수작.

기자명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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