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은 아주 부유하고 대단한 산업국이다. 미국은 그런 남한을 도와주고도 공평한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다. 미국은 끊임없이 군함과 전투기를 남한에 보내며 전쟁 훈련을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받는 보상은 전체 비용의 코딱지만큼도 안 된다.”

미국 공화당 지도부의 ‘타도 대상’이면서도 당 대선주자로 선두를 지키는 도널드 트럼프(69)가 3월21일 〈워싱턴 포스트〉 논설위원진과 만나 외교·안보 문제에 관한 얘기를 나누던 중 나온 한국에 대한 불만이다. 그는 한국뿐 아니라 일본·독일·사우디아라비아 등 미국의 우방에 대해서도 동맹관계가 아니라 손익계산에 따른 비즈니스 차원에서 파악하려는 세계관을 드러냈다. 지난해 여름 대선 행보에 나선 트럼프는 미국의 현안들과 관련된 돌출 언행 때문에 공화당 지도부와 주류 세력들로부터 배척당해왔다. 이런 트럼프가 최근 외교·안보 분야에서도 헛발질을 해대면서 워싱턴 외교가의 우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워싱턴 포스트〉 논설진과 한 시간 정도 인터뷰를 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트럼프의 세계관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건 고립주의로의 회귀다. 단적인 사례로, 유럽 집단 안보기구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에 대해 황당한 주장을 내놓았다. 서방국가들이 옛 소련의 위협에 맞서 힘을 합하자는 취지로 만들어진 나토는 냉전 시절이던 1949년 미국 주도로 12개국이 참가해 발족했다. 탈냉전 이후에도 유럽 안보의 중추 구실을 해왔고, 현재 회원국이 28개국까지 늘어났다. 그런데 트럼프의 주된 불만은 유럽 안보를 위해 미국의 비용 부담이 너무 크다는 것이다. 그는 “미국이 압도적으로 많은 재원을 감당해야 하는 현재의 비용 분담 구조를 바꿔야 한다”라며, 자신이 집권하면 나토에 대한 미국의 개입 폭을 상당히 줄일 것이라고 시사했다. 현재 나토의 전체 예산 가운데 미국이 부담하는 비중은 22% 정도다. 독일 14.5%, 프랑스 11%, 영국 10.5% 등에 비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미국이 나토의 재원을 도맡다시피 한다는 트럼프의 주장과는 거리가 있다.

ⓒAP Photo3월21일 AIPAC 회의장 앞에서 트럼프를 반대하는 시민 모임이 항의 시위를 하고 있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미군 주둔에 관해서도 트럼프는 회의적이다. 〈워싱턴 포스트〉 논설위원이 “태평양 지역의 평화 유지를 위해 미군을 주둔시키는 게 미국에도 득이 아닌가?”라고 묻자 트럼프는 “개인적으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라면서 막대한 미군 유지 비용을 꼽았다. 〈워싱턴 포스트〉 측이 “한국과 일본은 비인건비 부문의 50%를 분담하고 있다”라는 사실을 상기시키자, 트럼프는 “고작 50%라고? 왜 100%는 안 되느냐?”라고 반문했다. 트럼프는 “한국은 부유한 나라로 선박은 물론 TV, 에어컨을 비롯해 엄청난 상품을 만드는 어마어마한 산업국”이라며 주한미군 관련 비용 분담 구조에 불만을 토해냈다.

트럼프는 나토는 물론이고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주한·주일 미군까지 비즈니스 손익 차원에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는 미국의 도움을 받던 나라들이 부강한 나라로 변신한 만큼 미국이 더는 이들의 ‘봉 노릇’을 하진 않겠다는 논리를 설파하고 있다.

트럼프의 고립주의적 시각은 역대 공화당 대통령들이 추구한 개입주의 노선과 다를 뿐 아니라 미국의 국제적 고립을 자초할 단견이라는 게 대다수 외교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이를테면 1960년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1970년대 리처드 닉슨에 이어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옛 소련의 팽창주의에 맞서 유럽과 아시아 방어를 위한 적극적 군사개입에 나섰다. 1990년대 탈냉전 시대의 조지 H. 부시 전 대통령은 쿠웨이트를 침공한 이라크 격퇴를 위해 연합군을 이끌기도 했다. 2000년대 들어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도 테러 방지와 민주화 확산을 명분으로 이라크와 아프간에 적극 개입했다.

“외교·안보는 삼류 참모진으로는 거의 불가능”

미국의 핵심 외교 노선인 자유무역과 관련해서도 트럼프의 생각은 독특하다. 자유무역 때문에 미국이 덕 보기는커녕 오히려 피해를 보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중국이 그의 주된 공략 대상이다. 트럼프는 〈워싱턴 포스트〉 인터뷰에서 “중국은 도저히 믿지 못할 정도의 야심을 가진 나라다. 중국은 미국에서 엄청난 돈을 빼내어 나라를 재건했다. 미국이 없었다면 중국엔 공항·철도·교량 등이 건설되지 못했을 것이다”라며 황당한 주장을 펼쳤다. 그는 지난해 11월에도 중국을 ‘환율조작국’이라고 맹비난하면서, 향후 협상의 주도권 확보를 위해 중국산 수입품에 45%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위협해 빈축을 사기도 했다.

ⓒAP PhotoAIPAC 총회에서 연설하고 있는 트럼프. 중동 현안에 관한 견해를 밝혔지만 후한 점수를 받지는 못했다.

트럼프가 이 같은 고립주의와 반자유무역주의적 시각을 드러내면서 그동안 누가 그의 외교·안보 자문을 맡고 있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를 의식한 듯 트럼프는 인터뷰 도중 외교·안보 자문위원 5명의 이름을 밝혔다. 이에 워싱턴 외교가는 ‘김이 빠졌다’는 반응이다. 키스 켈로그, 카터 페이지, 조지 파파도풀로스, 왈리드 파레스, 조지프 슈미츠 등 그가 밝힌 자문진 5명 가운데 그럴듯한 평판이나 지명도를 가진 인사는 하나도 없었다.

그나마 눈에 띄는 이가 2012년 대선 때 공화당 밋 롬니 후보의 중동 문제 자문을 맡은 바 있는 왈리드 파레스 국방대학 교수다. 반이슬람주의자이자 테러 문제 전문가인 그는 “오바마 행정부 내에 이집트 무슬림형제단과 공조해 미국의 대외정책에 영향을 주려는 인물이 있다”라고 주장해 구설에 오른 바 있다. 조지프 슈미츠는 조지 W. 부시 행정부 1기 당시 고위 관리들의 비리를 감싸려다 국방부 감찰실장직에서 불명예스럽게 물러난 인물이고, 예비역 중장인 키스 켈로그는 2003년 11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이라크 주둔 연합군 임시사령부의 고위직을 맡으면서 이라크 재건사업에 관여했지만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다. 카터 페이지는 현재 에너지 기업의 중역으로 과거 메릴린치 모스크바 지사 개설에 관여했다. 이 같은 러시아와의 인연 때문인지, 그는 ‘오바마의 러시아 정책이 지나치게 도발적’이라고 주장해왔다. 페이지와 함께 트럼프의 에너지 분야 자문관인 조지 파파도풀로스는 2009년 대학을 졸업한 신출내기로 한때 허드슨 연구소에서 일했고, 최근 도중하차한 벤 카슨의 선거 참모로도 활동했다.

트럼프는 〈워싱턴 포스트〉 인터뷰에서 자신의 외교·안보 자문진을 극구 칭찬했다. 그러나 외교가 인사들의 평가는 다르다. 전직 국무부 관리로 현재 스탠퍼드 대학 부설 후버 연구소 연구원인 코리 세이크는 〈포린 폴리시〉와의 인터뷰에서 “내가 아는 이가 아무도 없다. 국가 안보는 일류 참모진의 조언으로도 잘하기가 어려운데 삼류 참모진으로는 거의 불가능하다”라며 이들을 혹평했다. 트럼프는 인터뷰 당일 저녁, 미국 최대의 친이스라엘 압력단체인 ‘미국·이스라엘 공공문제위원회(AIPAC)’ 연례회의에 참석해, 이란 핵협상 타결 및 팔레스타인 문제 등 중동 현안에 관한 나름의 견해를 밝혔는데, 여기서도 후한 점수를 받지는 못했다.

공화당 지도부와 주류 세력은 오는 7월 하순 대선 후보 선출을 위한 전당대회 전에 트럼프를 강제 낙마시키기 위한 ‘100일 작전’에 돌입한 상황이다. 그동안 국내 문제에서 ‘천박하다’는 평가를 받아온 트럼프로서는 〈워싱턴 포스트〉 인터뷰, AIPAC 연설 등을 통해 그간의 ‘망나니’ 이미지에서 벗어나 대통령 후보의 핵심 자질인 외교·안보 분야의 식견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실패했다는 것이 워싱턴 정치 분석가들의 중론이다.

기자명 워싱턴∙정재민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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