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특이한 광경이었어! 건물 옥상에서, 베란다에서, 대로변에서 사람들이 모두 ‘오바마!’와 ‘USA!’를 외치며 열광하는 거야! 게릴라 시위를 하는 ‘하얀 옷의 숙녀들’조차도 웃으며 ‘오바마’를 외쳤어. 오바마는 무슨 록스타 같았어! 아마 아바나가 이렇게 흥분했던 적은 1959년 피델의 혁명군이 입성했을 때 이후 처음일 거야.” 아바나에 사는 나의 친구 일리오 크루즈는 ‘믿을 수 없는 일’이 쿠바에서 벌어졌다며 이메일을 보내왔다.

이와 유사하게 기이한 사건은 20세기 미국에서도 있었다. 미국 내 진보 진영에서 열렬한 지지를 받던 피델 카스트로가 뉴욕을 방문할 때마다 이런 환대를 받곤 했다.

지난 3월20일(현지 시각) 냉전 이후 미국의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쿠바를 방문한 오바마는 대통령 후보 시절부터 쿠바인들의 사랑을 듬뿍 받아왔다. 진보 성향의 흑인 대통령이 2014년 12월17일 쿠바와의 관계 개선을 발표한 날은 쿠바인들에게 쿠바혁명이 시작된 1953년 7월26일처럼 각인되어 있다. 심지어 친한 쿠바인끼리는 오바마가 라울보다 인기가 많다는 농담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그런지 두 정상 간의 공동 기자회견은 마치 선거 후보들 간의 토론을 연상케 했다.

ⓒAFP Photo3월21일 공동 기자회견을 마친 라울 카스트로 의장(오른쪽)이 오바마 대통령의 팔을 들어올리고 있다.

라울 카스트로는 쿠바의 인권에 대한 미국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쿠바의 인권이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쿠바의 모든 인민은 의료복지를 누립니다. 인간의 건강을 지키는 권리보다 더 기본적인 인권이 있을까요? 하나만 더 묻고 싶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같은 일을 하는데 소득의 차이가 있는 것은 정당한가요? 쿠바에서는 소득상 성적 차별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니 인권을 정치화하며 분쟁을 조장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정치범에 대한 비판도 있었지만 카스트로는 부인으로 일관했다. 쿠바는 실제로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들어간 2014년 말 이후 정치범 53명을 석방했다. 그러나 인권단체에 따르면 아직도 양심수 79명이 복역 중이라고 한다. 오바마의 핵심 참모 벤 로즈는 이 사실에 동의하면서도 최근 쿠바의 정치범들이 거의 장기수에서 단기수로 전환됐다고 덧붙였다.

이처럼 쿠바 내 인권 문제를 포함해 미국과 쿠바의 정상 사이에서 거론된 민감한 사안은 크게 세 가지였다. 쿠바 내 인권 문제, 쿠바에 대한 경제제재, 그리고 관타나모 반환. 오바마는 금수조치에 대해서 날짜를 정확히 못 박을 수 없지만 조만간 완전히 풀릴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러나 관타나모 반환에 대해서는 답을 회피했다.

관타나모 반환 문제는 정치적으로 예민하기도 하지만, 쿠바에 대한 미국의 만행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원죄’의 상징이기도 하다. 19세기 말 미국-스페인 전쟁의 일방적인 승리 후 미국은 쿠바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며 관타나모를 영구적으로 ‘장기 임대’할 수 있는 계약을 체결했다. 미국 정부는 1938년에 자신들이 일방적으로 정한 월세 4085달러(약 500만원)를 아직까지 ‘지불’하며 쿠바의 남동부 지역을 군사기지와 감옥으로 사용해왔다.

오바마는 양국의 과거사와 쿠바 인민들이 미국에 대해 느끼는 ‘애증’을 잘 이해하고 있다. 오바마가 미국은 더 이상 쿠바의 체제 변화를 추진할 의도가 없다는 사실을 거듭 밝혀온 것은 단지 협상 대상인 쿠바 정부를 안심시키려는 메시지만은 아니었다.

오바마에 대한 카스트로의 배려도 돋보였다. 미국 대통령에게 쿠바 내 반체제 인사들과의 면담을 주선해주며 카스트로는 오바마가 미국 내 진보 진영에게 체면을 구기지 않을 수 있도록 도와줬다. 동시에 카스트로 정부는 전 세계에 명명백백하게 보여줄 수 있었다. 쿠바는 카리브 해의 북한이 아니라는 사실을.

정상회담만큼 중요한 기업인들의 만남

오바마와 라울 카스트로는 공통의 목적이 있다. 두 정상 모두 자신의 임기 내에 미국과 쿠바의 관계 개선이 안착되기를 절실히 바란다. 서로의 필요와 입장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둘은 상대의 정치적 명분까지 챙겨주며 신뢰를 다지고 있는 듯하다.

오바마와 카스트로의 기자회견처럼 세계 언론의 집중을 받지는 못했지만, 아바나의 호텔들에서는 훨씬 더 생산적인 만남이 이뤄졌다. 오바마와 함께 온 미국 기업인들은 쿠바의 공기업 책임자들과 유의미한 결실을 맺으며 몇몇은 구체적인 사업계약도 체결한 것으로 전해진다.

ⓒAP Photo3월20일 쿠바 아바나에서 반정부단체 ‘하얀 옷의 숙녀들’이 정치범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하고 있다.

미국의 대표적인 호텔리조트 기업 스타우드(Starwood), 핀테크 기업 스트라이프(Stripe), 네트워킹 장비 기업 시스코(Cisco Systems), 그리고 간판 대기업 제너럴일렉트릭(GE)의 행보를 주목해보면 향후 쿠바 경제의 관광·금융·ICT 산업은 물론이고 전력사업과 의료기기 분야에서 미국 기업들이 어떤 역할을 하게 될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오바마는 이번 쿠바 방문에서 ‘경제 교류를 통한 공존과 공동번영’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그 어젠다를 유심히 들여다보면 영악한 미국 대통령의 연출력을 엿볼 수 있다. 오바마는 미국과 쿠바의 ‘여론’은 본인의 개인기로, 쿠바와의 관계 개선을 반대하는 공화당 강경파는 미국의 기업들로, 그리고 엉망인 국가경제로 허덕이는 쿠바 정부에게는 경제적 선물로 자신의 의도를 관철하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미국 내 반대 여론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피델 카스트로와 면담도 추진하지 않고, 공화당이 다수인 상원에서 임명이 부결돼 정쟁의 불씨만 키울 것이 뻔한 쿠바 주재 미국 대사에 대해 아예 후보조차 거론하지 않는 이유다.

오바마 정부는 효율적이지도 효과적이지도 못한 군사력에 집중하기보다는 경제적 실익을 추구하며 불필요하게 발생할 수 있는 ‘불편한 분쟁’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모든 외교 수단을 동원해왔다. 이는 이란과의 ‘화해’를 통해 중동에서 ‘이이제이’ 구도를 만들어 미국의 군사적 개입을 최소화하고, G2 라이벌인 중국을 기회이자 위협으로 인지하며 우방인 일본에게 적절한 책임과 권한을 위임한 것에서도 잘 드러났다. 이 모든 전술은 21세기의 국제 정세와 에너지 경제에 걸맞게 중동에 지나치게 몰입하지 않고 아시아·태평양, 아메리카와 아프리카로 미국의 관심사를 확장해 나가는 ‘오바마 독트린’의 일부로 읽을 수 있다.

오바마는 떠났지만 아바나의 흥분은 가라앉을 줄 모른다고 친구는 전했다. 진짜 록스타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 카스트로 정부에 의해 자본주의의 퇴폐 문화로 금지됐던 영국의 록밴드 롤링스톤스가 아바나에서 3월25일(현지 시각) 무료 공연을 열었다. 쿠바인에게는 그 짧은 기간 아바나에서 벌어지는 이벤트들이 무슨 공상과학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일들처럼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고 했다.

희망이란 공상과학 영화와 크게 다르지 않다. 둘 다 상상력에서 나온 산물이기 때문이다. 변화는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창의력에서 나온다. 오바마는 자신의 임기를 ‘희망과 변화’라는 약속으로 시작했다. 미국 대통령은 오늘날까지 그 약속을 충실하게 지키며 이행해왔다. 미국인들의 편견에서 나온 두려움을 제거하고 쿠바인들에게 경제적인 신세계를 열어주는 새로운 역사의 시작은 그래서 가능할 수 있었다.

기자명 정승구 (영화감독·작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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