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방 대법관 한 명의 인준 문제를 놓고 미국의 진보와 보수 세력이 치열한 ‘내전’에 휩싸일 조짐이다.

민주당 소속인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3월16일, 지난 2월 타계한 앤터닌 스캘리아 연방 대법관의 후임으로 진보적이라고 평가되면서도 중도 성향이 짙은 메릭 갈랜드(63) 워싱턴 D.C. 연방 항소법원장을 지명했다. 공화당은 인준 불가를 외치며 극렬 저항에 나섰다. 게다가 갈랜드 지명자 발표 직후 보수·진보 성향 시민단체들도 이 싸움에 가세하면서, 올가을 대선을 앞두고 가뜩이나 양극화된 미국 사회가 더욱 혼란에 빠져들고 있다.

양 진영이 연방 대법관 자리 하나를 두고 이처럼 사생결단 식으로 나오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새 후보가 대법원의 보수·진보 진영 중 어느 쪽에 합류하느냐에 따라 낙태, 이민, 사회보험, 동성결혼, 총기 규제, 노조, 환경, 정치자금 규제, 투표권 제한 등 미국인의 일상생활에 직접 영향을 주는 쟁점 현안의 최종 운명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판사 9명으로 이뤄진 미국 연방 대법원은 1991년 매우 보수적인 클래런스 토머스 판사가 합류한 이후 보수 5명 대 진보 4명이라는 보수 우위 구조로 고착돼왔다. 그러다 보니 판결도 자연히 보수 쪽으로 기울었다.

하지만 보수 성향의 스캘리아 대법관이 타계하면서 오바마 대통령은 기존의 보수 우위 구도를 진보 우위로 재편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았고, 이번에 갈랜드를 후임으로 지명한 것이다. 〈뉴욕 타임스〉는 “오바마가 새 후보를 지명하면 대법원에 진보 성향의 판사가 다수를 차지하고 그에 따라 미국의 법과 미국인의 삶이 재구성될 것이 거의 확실하다. 이런 측면에서 대법원은 1991년 이후 가장 중요한 이념적 전환기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라고 평했다.

ⓒAP Photo3월16일 새 연방 대법관 후보로 지명된 메릭 갈랜드 워싱턴 D.C. 연방 항소법원장(가운데)이 오바마 대통령과 조지프 바이든 부통령의 박수를 받고 있다.

실제로 대법원 판사진이 진보 우위로 재편되면, 종전의 보수 판례 가운데 상당수가 뒤집힐 가능성이 크다. 단적인 예로, 2010년 오바마 행정부는 억만장자들이 자신의 이익을 옹호하는 정치인에게 무제한으로 자금을 지원하는 폐단을 제거하기 위해 선거제도 개혁을 추진한 바 있다. 그러나 보수 단체인 시민연합이 소송을 걸었고  결국 오바마 측이 대법원에서 5대4로 패했다. 그런데 대법원이 진보 우위로 재편되면 민주당은 다시 선거제도 개혁을 추진할 수 있을 것이다. 일리노이 법대 비크람 아마르 학장은 오는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이 승리하는 경우 보수파가 지배해온 선거제도, 총기 규제 등 6대 핵심 판결이 대법원에서 뒤집힐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하버드 법대 출신인 갈랜드 판사는 2009년 1월 취임한 오바마 대통령이 재임 시 두 번이나 대법관 후보로 고려했을 정도로 두터운 신임을 받아왔다. 그는 1979~1981년 검사로 재직하다 유명한 로펌으로 갔지만, 이후 다시 검사로 복직한 이채로운 경력의 소유자다. 그의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진 계기는 168명이 사망하고 680명 넘게 부상자를 낸 1995년 4월 오클라호마 시청 폭탄테러의 주임검사로 활약하면서다. 민주당 빌 클린턴 대통령은 그런 갈랜드를 1997년 워싱턴 D.C. 연방 순회고등법원 판사로 지명했고, 그는 상원에서 찬성 76 대 반대 23으로 초당적 인준을 받았다. 주목할 점은 당시 찬성표를 던진 76명 가운데 30명이 공화당 상원의원이었다는 사실이다.

오바마가 갈랜드를 지명한 데는 이처럼 그가 과거에 초당적 지지를 받았던 점이 크게 고려되었다는 후문이다. 실제로 오바마는 11월 대선을 앞두고 민주당 대선 후보를 위한 득표 차원에서 갈랜드와 함께 최종 후보로 올라온 아시아계 스리 스리니바산 판사(49)나 흑인 폴 왓퍼드 판사(48) 등 진보 성향이 강한 인사를 선택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공화당 의원들로부터도 지지받을 정도로 중도적 색채를 지닌 갈랜드를 지명한 것이다.

그런데도 공화당 지도부는 인준 여부는 고사하고 오바마의 대법관 임명 자체에 시비를 거는 모양새다. 미치 매코널 상원 원내대표는 오는 11월 대선으로 선출된 새 대통령이 대법원 판사를 지명해야 한다며, 오바마가 “(선거 국면을 민주당에 유리하게 이끌) 정치적 속셈으로” 갈랜드를 지명했다고 비난했다. 인준청문회 개최 권한을 쥔 상원 법사위원회 척 그래슬리 위원장(공화당)도 같은 견해이다. 매코널, 그래슬리 두 사람이 계속해서 강경하게 버틴다면, 갈랜드가 대법원 판사로 인준받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대법관 인준 지연에 따른 역풍 거세질 수도

문제는 공화당 지도부의 방해 전략이 얼마나 지속될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정치분석가들은 공화당 지도부가 지금은 초강경 방침이지만 11월 대선을 고비로 태도가 변할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공화당의 대표적 온건파인 수전 콜린스 상원의원이 “만일 힐러리가 당선돼 중도파 갈랜드 대신 다른 사람을 지명할 경우 훨씬 더 진보적인 후보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우려를 표시한 것도 그래서다. 그럴 바에야 갈랜드를 인준하는 게 훨씬 낫다는 생각이다. 특히 당 정강과 이념에 맞지 않는 좌충우돌 언행으로 지탄을 받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가 공화당 대선 후보로 확정될 경우 본선에서는 힐러리에게 패할 가능성이 크다는 측면에서, 적지 않은 공화당 의원들 역시 콜린스 의원의 우려에 동감을 표시한다.

또 하나의 변수는 이번 대선과 함께 치러지는 의회 중간선거에서 백중지세를 보이고 있는 일부 공화당 상원의원들의 태도다. 현재 여론은 공화당의 인준 지연 행태에 상당히 부정적이다. 최근 〈워싱턴 포스트〉와 ABC 뉴스의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 중 63%가 인준청문회 개최를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현재 낙선 위기에 처한 공화당 의원은 뉴햄프셔 주의 켈리 아요테, 위스콘신 주의 론 존슨, 일리노이 주의 마크 커크, 펜실베이니아 주의 팻 투미, 오하이오 주의 랍 포트먼 등인데 이들은 인준 지연에 따른 여론의 역풍이 거셀 경우 지도부에 인준청문회의 조기 개최를 요구할 가능성도 있다.

이처럼 공화·민주 양당이 첨예한 대치 국면을 맞고 있지만 실은 이들보다 보수·진보 시민단체들 간의 전쟁이 한층 격렬할 것으로 보인다. 이미 오하이오 주를 비롯한 6개 주에서는 양측 간에 100건 이상의 집회가 예정돼 있다. 텔레비전 광고는 물론이고 트위터·페이스북 등 SNS에서도 여론 전쟁이 격렬히 진행되고 있다. 보수 진영에선 사법위기네트워크(JCN), 전국총기협회, 프리덤워크스 재단, 헤리티지 액션 등 보수 단체가 공화당 상원의원들에 대한 로비와 함께 텔레비전·라디오 광고에 수백만 달러를 투입해 인준 불가의 당위성을 적극 홍보하고 있다.

이에 맞서 진보 진영에선 헌법책임 프로젝트, 정의연맹, 민권 및 인권 지도자회의 등이 인준 지연에 동참한 공화당 의원들을 겨냥한 총력 작전에 돌입했다. 해당 지역 유권자들을 설득해서 공화당 의원을 압박하는 방법이다. 정의연맹의 낸 애런 대표는 〈워싱턴 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갈랜드에게 공평한 청문회 기회를 줘야 한다는 유권자들의 소리가 공화당 의원들에게 쏟아지면, 그들 역시 태도를 바꾸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라고 낙관했다. 정의연맹은 1987년 당시 공화당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극우 판사인 로버트 보크를 대법관에 지명하자 다른 진보 단체들과 함께 반대운동을 주도해 결국 낙선시킨 단체다.

대다수 정치 분석가들은 공화당이 갈수록 커져가는 트럼프 악재에다 아무 명분도 없는 인준 지연 문제까지 끌고 갈 경우 올가을 대선은 물론 중간선거 결과까지 악영향을 받을 것으로 내다본다. 실제로 민주당과 진보 단체들은 지난 7년간 오바마 행정부와 사사건건 부딪쳐온 공화당에 대해 이번 인준 지연 건을 계기로 ‘국정 방해세력’이란 프레임을 씌울 태세다. 이번 대선과 함께 치러지는 의회 중간선거에서 아예 유권자의 심판을 구하겠다는 것이다. 대법관 한 명을 임명하는 문제가 미국을 뒤흔드는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기자명 워싱턴∙정재민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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