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로 트럼프를 잡는다? 오는 7월 당 대선 후보를 뽑는 전당대회를 앞두고 공화당 지도부와 주류 세력이 선두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69)를 낙마시키기 위해 총력전을 전개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트럼프 최대의 적이 공화당 주류의 압력이 아니라 사실은 트럼프 자신의 사기 혐의라는 관측이 부쩍 힘을 얻고 있다. 특히 테드 크루즈, 마르코 루비오 등 경쟁 후보들이 최근 일련의 텔레비전 토론회에서 이 문제를 집중 부각시키면서 트럼프의 사기 혐의는 뜨거운 이슈로 떠오른 상태다.

문제의 사기 혐의란, 부동산 투자로 천문학적인 부를 거머쥔 트럼프가 자신의 이름을 브랜드 삼아 2005년 설립한 ‘트럼프 대학’과 직결돼 있다. ‘트럼프 대학’은 말이 ‘대학’이지 실은 부동산 투자에 관심이 있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온라인 강의와 세미나를 제공하는 돈벌이 회사다. 이 회사는 트럼프라는 이름을 전면에 내세우며 미국 전역에서 수많은 수강생을 끌어모은 뒤 이런저런 명목으로 적지 않은 수강료를 챙겼다. 하지만 상당수 수강생들이 강의 내용과 강사진이 원래 광고와 달라 돈만 날렸다면서 트럼프를 사기 혐의로 제소했고, 현재 진행 중인 집단소송만 3건이다.

이런 분위기에 불을 지르는 사건이 벌어졌다. 뉴욕 주 검찰은 2013년 8월, 트럼프 대학 피해자들을 대리해서 트럼프에 대한 소송을 제기한 바 있다. 손해배상액이 무려 4000만 달러(약 480억원)에 달하는 재판이다. 이에 맞서 트럼프 측 변호인은 법원 측에 해당 소송에 대한 기각을 요청했다. 그러나 3월1일 뉴욕 주 대법원 항소부는 트럼프 측의 기각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최종 결정을 내렸다. 3월1일은 공교롭게도 트럼프가 11개 주에서 동시에 치러진 경선에서 압승한 날이기도 했다. 에릭 슈나이더만 뉴욕 주 검찰총장은 “이번 결정은 트럼프와 트럼프 대학이 수천명의 수강생들에게 사기극을 벌인 책임을 묻기 위한 우리의 노력이 분명한 승리를 거둔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결정에 따라 뉴욕 주 검찰은 사기 피해자의 구제 시점을 2007년까지 소급할 수 있게 됐다. 이에 따라 새롭게 손해배상을 요구할 사람들도 눈덩이처럼 불어날 전망이다.

ⓒREUTER3월3일 열린 <폭스 뉴스> 주최 토론회에서 ‘트럼프 대학’ 사건이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왼쪽에서 두 번째가 도널드 트럼프.

실제로 트럼프 대학 비리와 관련된 검찰의 조사 결과를 보면 일반 유권자들은 물론 트럼프 지지자조차 분노할 만한 내용이다. 트럼프는 ‘트럼프 대학’ 출범 당시 홍보 영상에 직접 출연해 “트럼프 대학에선 성공을 가르친다. 오직 그것뿐이다. 당신도 성공할 수 있다”고 선전했다. 부동산 투자로 40억 달러의 거부가 된 트럼프가 직접 세일즈에 나서면서 미국 전역에서 수강생들이 몰려들었다. 최초 무료 강좌만 약 8만명이 수강했다. 이들 가운데 부동산 투자 기법과 관련한 사흘간의 세미나 비용으로 1495달러(약 180만원)를 낸 사람이 무려 9200명이다. 트럼프가 선정한 투자 전문가와의 개별 상담, 부동산 현장 실습, 트럼프식 투자 기법 강연 등이 포함된 3만5000달러(약 4200만원)짜리 ‘골드 엘리트’ 패키지 상품도 800여 명에게 팔았다.

하지만 이런 광고를 그대로 믿고 등록한 수강생 가운데 실망한 사람들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강의 내용이 대부분 인터넷에서 무료로 검색할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강사진 가운데 부동산 전문가로 분류될 만한 사람도 많지 않았다. 피해자 밥 길리오 씨는 아들과 함께 등록해 3만6000달러를 썼지만 ‘배운 건 거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ABC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강의 내용 대다수가 인터넷의 부동산 전문 웹사이트에서 공짜로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첫 세미나가 끝난 뒤 사기당했다는 걸 직감했다”라고 말했다. 뉴욕 주 검찰은 이런 피해자들의 진술을 토대로 작성한 기소장에 “트럼프 대학은 대학이 아닌데 대학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 자체부터 사기였다. 수강생들에게 미끼를 던진 뒤 물면 돈을 챙기는 전형적인 미끼 수법을 이용했다”라고 썼다. 트럼프가 “이런 식의 불법적인 사기 행태에 직접적으로 개입했다”는 것이 검찰의 핵심 주장이다. 기소장에 따르면 트럼프는 이런 사기 행태로 약 500만 달러(약 60억원)를 챙겼다. ‘트럼프 대학’은 뉴욕 주 교육청으로부터 대학 인가를 취득하지 못하자 2010년 ‘트럼프 기업가 이니셔티브 LLC’로 개명했지만 결국 2011년 문을 닫았다.

ⓒAP Photo트럼프에 대한 소송을 제기한 뉴욕 주 검찰의 에릭 슈나이더만 총장.

‘트럼프 대학’의 설립 및 운영 비리와 관련해 트럼프가 언론에 노출된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그러나 이 사건이 비상한 관심을 끄는 까닭은 한창 진행 중인 대선 예비후보 유세 과정에서 트럼프에게 정치적 타격을 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트럼프는 최근 수천만 유권자들이 지켜본 가운데 벌어진 공화당 후보들 간의 텔레비전 토론회에서 집중 공격의 대상이 됐다. 이를테면 2월25일 CNN 주최 토론회에서 크루즈 후보는 “만일 이런 사람이 공화당 후보가 되면 자기가 저지른 사기 혐의에 관해 법정에서 심문을 받아야 할 텐데, 주류 언론이 얼마나 난리를 치겠는가?”라고 공격했다. 루비오 후보는 “3만6000달러를 내고도 수강생들이 얻은 건 고작 트럼프 모형과 사진 한 번 찍은 것이다”라며 트럼프를 ‘사기꾼’으로 몰아붙였다. 이들의 공격은 3월3일 〈폭스 뉴스〉 주최 토론회에서도 반복됐다.

트럼프에게 부담스러운 향후 재판 일정

물론 트럼프는 자신을 둘러싼 사기 혐의에 대해 극구 부인한다. 수강생 가운데 98%가 만족감을 표시했고, 미국 경영개선협회(BBB)에서 A등급을 받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 경영개선협회는 성명을 통해 “트럼프 대학이 늘 A등급을 받은 건 아니다. A에서 D등급까지 다양한 성적을 기록했다”고 트럼프의 주장을 반박했다. 또한 기소장에 적시된 수강생들의 진술에 따르면 이들은 수료증을 받으려면 만족도 설문에 응해야 했고, 담당 강사로부터 ‘호의적인 평가를 해주면 트럼프가 다른 프로그램에 초대할 것’이란 얘기에 혹해서 좋게 평가한 것이지 진심은 아니었다고 한다. 트럼프 측 변호인 앨런 가튼은 CNN과의 인터뷰에서 “수업을 듣고도 실무에 적용하지 않는 수강생들까지 우리가 도와줄 순 없지 않는가?”라고 반문하며 절대다수인 98%에 이르는 수강생들은 만족감을 표했다고 강변했다. 실제로 트럼프 변호인단은 수업에 만족감을 표시한 수강생 15명으로부터 받은 진술서를 법원에 제출해 향후 치열한 법정 다툼이 벌어질 예정이다.

관심사는 이제 검찰의 수사 카드가 향후 트럼프 지지층의 이탈에 얼마나 영향을 줄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실제로 트럼프는 자신의 사기 혐의가 널리 알려진 이후인 3월 첫 경선(캔자스 등 4개 주)에서 승기가 한풀 꺾이기도 했다. 네 지역 중 두 곳에서 패했다. 그러나 트럼프는 3월8일 치러진 4개 주 경선에서 미시간 주를 비롯한 3곳에서 승리해 대세론에 다시 불을 지핀 형국이다.

주목할 것은 반(反)트럼프 전선으로 결집한 각종 정치조직들이 텔레비전 광고를 통해 이 문제를 집중 부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실례로 ‘우리의 원칙’이란 보수 단체는 100만 달러를 투입해 트럼프의 사기 혐의와 관련한 내용을 60초짜리 광고로 만든 뒤 플로리다와 오하이오 주 등 4개 주 경선이 치러지는 3월15일에 맞춰 CNN과 〈폭스 뉴스〉 등을 통해 미국 전역에 내보낼 예정이다. 이와 별도로 ‘미국 미래기금’이라는 보수 단체는 수백만 달러를 투입해 트럼프 대학 피해자들의 육성 증언을 담은 TV 광고 3편을 집중적으로 내보내고 있다.

향후 심리 일정도 트럼프에겐 부담이다. 당장 6년 전 캘리포니아 주에서 제기된 ‘트럼프 대학’ 사기 혐의 소송과 관련한 예비심리 기일이 5월6일로 잡혔기 때문이다. 이날 트럼프가 참석할지가 언론의 큰 관심거리다. 공식 재판은 8월 중으로 예정돼 있지만 담당 판사는 가급적 재판 기일을 당기고 싶어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트럼프는 담당 판사가 자신에게 적대적인 유권자들이 대다수인 히스패닉계라며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다.

기자명 워싱턴∙정재민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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