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ver Trump!”(트럼프 절대 불가!)는 결국 신기루였을까? 도널드 트럼프(69)가 대선 후보로 확정될 경우 당의 정체성 상실은 물론 백악관을 민주당 후보에게 자진 헌납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트럼프 절대 불가’를 외쳐오던 공화당이 패닉 상태에 빠졌다. 남부와 북부 11개 주에서 경선이 동시 실시돼 ‘슈퍼 화요일’이란 별칭이 붙은 3월1일, 트럼프가 압승하며 공화당 대선 후보 자리에 성큼 다가섰기 때문이다. 선두 후보인 트럼프를 퇴출시키려는 해괴한 일이 벌어지는 공화당과 달리, 민주당은 힐러리 클린턴(68)이 사실상 당 후보로 확정될 조짐이 보이자 벌써부터 트럼프를 공화당 후보로 가정해 대응 전략을 마련하느라 분주하다.

공화당 지도부는 지난해 6월 출마 선언 이후 온갖 막말과 돌출 행동으로 당의 신뢰도와 이미지를 떨어트린 트럼프를 낙마시키고자 그동안 온갖 노력을 펼쳤지만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히스패닉 불법 이민자들에 대한 막말은 물론이고 자당의 대선 후보까지 지낸 존 매케인 상원의원에 대한 폭언, 낙태 문제를 포함한 주요 현안과 관련해 공화당 정책과 상반되는 주장을 펴는 등 당 안팎에서 거센 비난을 받았어도 트럼프는 끄떡하지 않았다. 특히 그는 슈퍼 화요일 이틀 전에는 백인우월주의 집단인 KKK의 전 지도자 데이비드 듀크가 자신에 대한 공개적 지지를 표명했음에도 어정쩡한 태도를 보이면서 언론의 집중포화를 맞기도 했다.

ⓒAP Photo공화당 경선 후보인 트럼프도 ‘슈퍼 화요일’ 경선에서 11개 주 가운데 7개 주에서 압승을 거뒀다.

이처럼 누가 봐도 최악의 조건에서 슈퍼 화요일을 맞이했으나, 트럼프는 11개 주 가운데 7개 주에서 압승을 거뒀다. 공화당 지도부는 큰 충격을 받았다. 트럼프의 지지층은 주로 워싱턴 중앙정치와 경제적 불평등에 불만을 품은 계층이다. 탈이념적이고 고졸자가 많으며 3명 중 1명은 연 5만 달러 미만의 저소득층으로 추정된다. 이미 트럼프는 앞서 승리한 뉴햄프셔, 사우스캐롤라이나 주까지 합해 대의원 316명을 확보했다. 당 후보 지명에 필요한 1237명 가운데 23%를 수중에 넣은 셈이다. 그의 전적은 2위인 테드 크루즈 후보(226명)는 물론 당 지도부가 공식적으로 밀고 있는 마르코 루비오 후보(106명)를 압도한다. 일부 공화당 전략가들은 트럼프가 후보 지명권을 획득하려면 7월 전당대회까지 가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뉴욕 타임스〉는 현재의 약진 추세로 볼 때 오는 5월 하순이면 트럼프가 후보 지명에 필요한 대의원 수를 확보할 것으로 내다본다.

민주당의 경우 게임은 일찌감치 힐러리 클린턴으로 기우는 분위기다. AP 통신 집계에 따르면 힐러리는 지금까지 11개 주 가운데 텍사스 주를 비롯한 7개 지역을 석권해 대의원 544명을 확보했다. 여기에 당내 비선출 대의원을 일컫는 ‘슈퍼델리기트(Superdelegate)’ 가운데 그녀를 지지하는 인사까지 포함하면, 3월2일 현재 힐러리가 확보한 대의원은 모두 1001명에 달한다. 민주당 대선 후보직을 따내기 위해선 2383명이 필요한데 절반 가까이를 이미 손에 넣은 셈이다. 힐러리가 흑인과 히스패닉 등 자신을 지지하는 유권자들이 많은 플로리다·오하이오·일리노이·미주리·노스캐롤라이나 등 대형 5개 주가 동시에 경선을 치르는 3월15일에도 연승을 거두면 사실상 민주당 대선 후보직을 거머쥐게 된다.

이처럼 민주당 대선전이 비교적 싱겁게 끝날 조짐인 데 비해 공화당은 지금 혼돈 그 자체다. 당 지도부의 유일한 희망 마르코 루비오(44) 후보가 죽을 쑤고 있기 때문이다. 슈퍼 화요일 경선에서 루비오는 공무원과 지식인 계층이 많고 유권자 의식도 높아 승리가 유력시되던 버지니아 주에서조차 패했다.

ⓒAFP3월1일 ‘슈퍼 화요일’ 경선이 끝난 후 민주당 경선 후보인 힐러리가 지지자들의 환호에 답하고 있다.

〈워싱턴 포스트〉의 베테랑 정치 전문기자 댄 발즈는 “트럼프를 저지할 수 있는 기회의 창은 슈퍼 화요일 밤을 기해 거의 닫혔다”라고까지 진단한다. 실제로 오는 3월15일까지 당 지도부가 트럼프를 저지하지 못할 경우 ‘트럼프 절대 불가’ 구호도 끝장이다.

정치 분석가들은 이런 상황에서 공화당 지도부가 택할 수 있는 옵션을 대략 네 가지로 파악한다. 우선은 각 주자들이 자신의 아성에서 반드시 승리해 더 이상 트럼프에게 대의원을 내주지 않는 것이다. 그러려면 루비오는 지역구인 플로리다 주에서, 존 케이식은 오하이오 주에서 승리해야 한다. 특히 3월15일부터는 1표라도 더 얻은 후보가 대의원을 모두 갖는 승자독식제가 적용되기에 중요성은 더하다. 플로리다의 경우 대의원 99명, 오하이오는 66명이 걸려 있다.

두 번째는 후보 단일화다. 크루즈는 당 지도부가 아예 조정 대상에서 제외한 상태다. 당 지도부는 후보 단일화 중재안이 트럼프를 꺾을 수 있는 현실적이고 최상의 해법이라고 간주한다. 단일 후보가 일대일로 트럼프와 맞붙어 7월에 열릴 당 후보 지명 전당대회까지만 끌고 갈 경우 규칙 변경 등을 통해 트럼프를 축출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당 지도부가 기자회견을 통해 트럼프를 당 후보로 지지하지 않겠다는 뜻을 공개적으로 천명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시나리오는 공화당 소속 폴 라이언 하원 의장이 “누가 당 후보가 되든 지지할 것”이라고 이미 선언해버려서 실현 가능성이 희박하다.

끝으로 당 지도부가 지금의 경선 구도를 수수방관하는 것이다. 트럼프를 저지할 만한 마땅한 수단이 없는 상황이라면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가 ‘운 좋게’ 본선에서 대통령이 될 경우 각종 인사 등을 통해 공화당의 가치에 충실하도록 압박하자는 것이다. 공화당 지도부가 이 가운데 어떤 선택지를 뽑아들지는 알 수 없지만 현실은 그다지 녹록하지 않다. 인위적으로 경선 판도를 바꾸려 할 경우 트럼프 지지자들의 저항도 만만치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트럼프 카드 쓰느니 차라리 지는 게 낫다?

당장 트럼프와 친한 사이로 알려진 공화당의  컨설턴트 로저 스톤이 최근 보수 웹사이트인 ‘월드넷데일리’와의 인터뷰에서 당 지도부의 음모론을 제기했다. 공화당 지도부가 비밀리에 루비오를 대선 후보로 지명한다는 ‘플랜 A’를 세웠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자 루비오가 실패할 경우에 대비해 대선 후보를 지낸 밋 롬니를 다시 끌어들여 트럼프의 대항마로 키운다는 ‘플랜 B’를 마련했다는 내용이다. 로저 스톤은 “공화당 지도부는 루비오든 롬니든 힐러리와 상대해 패해도 트럼프가 승리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낫다는 생각이다. 미치 매코넬 상원 원내총무나 폴 라이언 하원 의장은 불법 이민자나 통상 문제 등 여러 현안과 관련해 많은 부분에서 힐러리와 인식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함께 갈 수 있다고 본다”라고 밝혔다.

이처럼 공화당 컨설턴트의 입에서 이 같은 음모론이 나온다는 것은 사실 여부를 떠나 그만큼 공화당 지도부의 ‘트럼프 절대 불가’ 방침이 강경함을 의미한다. 공화당 일부에선 트럼프의 대항마로 루비오가 불가능하면 크루즈를 차선책으로 고려해야 되지 않느냐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공화당 지도부와 주류 대다수는 트럼프보다 오히려 크루즈를 더 싫어해 이 방안도 실현되기 힘들다. 이래저래 지금 같은 교착 상황이 해소되지 않을 경우, 19세기 이후 ‘링컨의 당’을 자부해온 공화당은 조만간 ‘트럼프 당’으로 전락할지도 모른다.

기자명 워싱턴∙정재민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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