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범의 아이폰 암호 잠금장치를 풀라는 법원의 명령에 아이폰 제조사인 애플이 불복하면서 미국 사회가 시끌시끌하다. 공화당 대선 유력 주자인 도널드 트럼프 후보는 법원 명령을 거부한 애플을 보이콧하겠다고 선언했다. 10년 전 출시 이후 지금까지 7억 대 이상의 아이폰이 팔렸다. 그런데 문제의 아이폰 한 대 때문에 애플과 미국 정부 간 세기의 ‘프라이버시 전쟁’이 시작됐다. 현재 애플은 1심 법원의 명령에 맞서 대법원까지 염두에 둔 장기전을 각오하고 있다. 팀 쿡 회장(55)이 전면에 나서 여론전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번 사태의 발단은 지난해 12월 캘리포니아 주 샌버너디노에서 발생한 무슬림 부부의 총기 난사 사건이다. 당시 14명이 사망하고 22명이 부상당했다. 미국 연방수사국(FBI)은 이 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테러범 사예드 파룩이 사용한 아이폰 5C의 보안기능을 풀어줄 것(‘잠금 해제’)을 애플에 요구했다. FBI는 이들 테러범 부부가 범행 전 이슬람 극단 무장세력인 ‘이슬람국가(IS)’에 충성을 서약한 만큼 그 배후와 다른 테러리스트와의 연계 가능성을 조사하기 위해선 ‘잠금 해제’가 필수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애플은 이를 거절했다. 결국 FBI는 로스앤젤레스 연방지법에 도움을 요청했다. 법원은 애플에 협조를 명령했다.

ⓒEPA2월23일 미국 캘리포니아의 한 애플 매장 앞에서 지지자들이 애플을 옹호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하지만 애플의 쿡 회장은 2월17일 ‘고객에게 드리는 메시지’를 내고 FBI 요구가 고객의 개인정보를 위협하는 ‘위험한 선례’이자 ‘정부의 월권’이라고 비판했다. 닷새 뒤인 2월22일에도 직원들에게 보낸 이메일을 통해 “이번 사안은 법을 준수하는 수천만 고객의 자료 보안이 걸린 것이고, 모든 사람의 민권을 위협하는 위험스러운 선례를 남기는 일이다”라며 수사 당국과의 결전 의지를 다졌다. 쿡의 행동을 우호적 여론을 조성하려는 행위로 판단한 법무부는 “애플이 테러 수사에 협조하기는커녕 법원의 명령을 공개적으로 부정했다. 애플의 행동은 자사 평판에 대한 부정적 영향을 차단하려는 상술에서 비롯된 것이다”라고 맹비난했다.

현재 여론 지형은 혼전 양상이다. 2월22일 공개된 퓨리서치 자료에 따르면 설문 응답자들은 ‘잠금 해제’를 요구한 FBI에 51%의 지지를 보냈다. 애플 지지는 38%에 불과했다. 반면 2월24일 공개된 로이터 통신의 조사에서는 46%가 애플의 손을 들어줬으며 FBI 지지는 35%에 머물렀다. 이런 가운데 구글의 순다르 피차이 회장을 비롯해 페이스북의 마크 저커버그, 트위터 창업자인 잭 도시 등 실리콘 밸리의 거물들이 일제히 쿡의 행동을 지지하고 나섰다. 다만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인 빌 게이츠는 〈파이낸셜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수사 당국이 특정 사안에 대한 정보를 요구하는 만큼 기술업계도 테러 수사와 관련해서는 협조해야 한다”라며 다른 견해를 보였다.

ⓒAP Photo팀 쿡 애플 회장(위)은 이번 싸움이 대법원까지 갈 수 있는 장기전이라고 보고 여론전 등 대응 전략을 펼치고 있다.

사실 애플은 2008년 이후 각종 사건 사고에 연루된 용의자의 아이폰 수사와 관련해 FBI 협조에 적극 응하는 등 정부와 우호적 관계를 유지해왔다. 2015년 상반기만 해도 애플이 수사 당국의 협조에 응한 사례가 3000건 이상에 달한다. 이번 파룩 건만 해도, 애플은 그가 테러를 자행하기 두 달 전인 10월 초까지 아이클라우드에 축적된 백업 자료를 모두 FBI에 넘겨줬다.

하지만 애플의 협조적 분위기는 지난해 10월을 기점으로 180° 바뀌었다. 당시 뉴욕 연방지법에서 마약 사범이 자신이 소지한 아이폰 5S의 암호를 잊어버렸다고 주장하고, 이에 담당 검사가 법원에 요청해 애플 측에 잠금 해제를 명령하자 이를 거부한 것이다. 당시 법정에서 애플의 담당 변호사인 마크 쥐위링거는 “고객 정보가 다방면에서 포위당하고 있다. 고객 정보의 프라이버시와 보안이 지금처럼 중요한 적이 없다”라고 주장했다.

프라이버시와 안보 사이에서 절충점 찾아야

현재 FBI가 애플에 요구하는 건 한 가지다. 2014년 10월 도입된 아이폰의 최신 운용체제에 따라 사용자가 열 번 이상 틀린 암호를 넣으면 폰 자료가 자동으로 삭제되도록 한 기존 소프트웨어를 우회하거나 방지할 수 있는 새로운 소프트웨어를 만들어달라는 것이다. 테러범 파룩의 잠긴 아이폰은 2013년 9월에 출시된 5C 모델로 구형이지만 이런 최신 보안체계를 다운로드한 상태다. FBI는 애플에 요구한 새로운 소프트웨어를 파룩의 아이폰 단 한 대에만 적용할 것이란 점도 강조했다. 하지만 애플은 ‘백도어(backdoor:보안장벽 우회로)’ 설치 요구를 거부했다. 이런 백도어를 만들면 수사 당국이 언제든 다른 아이폰에 악용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애플이 저항하는 이유 중에는 자사의 이해관계도 걸려 있다. 〈월스트리트 저널〉에 따르면 애플의 판매 수입은 3분의 2가 해외에서 창출되는데 그 비결 중 하나가 애플의 철저한 프라이버시 보장과 보안이다. 지난해 애플의 총 판매액은 2340억 달러에 달했다. 그 가운데 590억 달러를 차지한 중국의 경우, 인권운동가들이 ‘일단 아이폰 백도어 설치가 허용되면 중국 정부 역시 비슷한 요구를 애플에 관철시키려 할 것이다’라고 우려한다. 2013년 에드워드 스노든의 폭로 이후 유럽 시민들 역시 자신이 미국 국가안보국(NSA)으로부터 무차별적인 도·감청을 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상태다. 이런 상황에서 애플이 정부의 요구에 못 이겨 백도어 프로그램을 만들 경우 회사 이미지 실추는 물론 고객의 대량 이탈을 각오해야 한다.

애플은 과거 삼성과의 특허전을 이끈 브루스 시웰 법률고문이 소송을 진두지휘하고 있지만 외부에서도 연방 법무차관을 지낸 테드 올슨을 비롯한 쟁쟁한 변호사들을 대거 영입해 만반의 준비 중이다.

ⓒEPA공화당 대선주자인 도널드 트럼프(위)는 애플 보이콧을 선언했다.

일부 전문가들은 애플이 향후 법정 다툼에서 이번 사안의 본질을 언론 자유를 보장한 수정헌법 제1조 맥락에서 접근할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아이폰 보안을 위해 만든 소프트웨어 코드는 단순한 명령체계가 아닌 애플의 창조적 작품이니만큼 당연히 헌법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법원이 애플에 대해 파룩의 잠긴 아이폰을 풀 수 있는 새로운 소프트웨어 코드를 만들라고 강요하는 것은 마치 정부가 언론인에게 친정부 기사를 쓰도록 강요할 수 없는 이치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1977년 대법원 판례도 애플에겐 희소식이다. 당시 판례에 따르면, 범죄 사건에 연루되지 않은 제3자에 대해 정부가 ‘불합리한 부담’을 지워서는 안 된다. 애플이 FBI 요구에 따라 새로운 소프트웨어를 만든다는 것은, 정부가 민간 기업에 ‘불합리한 비용’을 부담하라고 강요하는 꼴이다.

물론 애플의 이런 논리가 법정에서 인정을 받아 최종 승자가 될지는 속단하기 어렵다. 사상 최악의 9·11 테러를 겪은 미국에선 아이폰 같은 분쟁이 법정으로 갈 경우 테러 방지라는 명목으로 정부 측에 유리하게 작용할 법 조항들이 수두룩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사건의 핵심은 ‘국가 안보냐 프라이버시냐’라는 양자택일적 논쟁보다는 오히려 양측의 절충점을 찾는 게 더 중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미국 정부 내 여러 정보기관을 총괄하는 국가정보국장실(ODNI) 프라이버시 담당관을 지낸 브라운 대학 왓슨 국제공공문제연구소의 티머시 에드거 선임연구원이 〈워싱턴 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어떤 식의 결론이 나든 프라이버시와 안보 간의 균형을 바로잡는 데 엄청나게 중요한 영향을 끼칠 것이다”라고 진단한 것도 그래서다.

기자명 워싱턴∙정재민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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