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왕이-케리의 또 다른 카드?


성능은 불확실한데 가격은 확실히 1조 이상

 

이웃 나라는 왜 사드에 발끈할까

 

왕이 중국 외교부장의 방미를 며칠 앞둔 지난 2월20일께 워싱턴 사정에 밝은 외교 소식통이 뜻밖의 얘기를 전해왔다. “다음 주 중에 미국 협상팀이 평양을 방문할 가능성이 높다!”

주한 미군의 사드 배치 움직임과 3, 4월 한·미 합동군사훈련을 앞둔 미국 전략무기들의 심상치 않은 동향, 한·미 해병대의 북한 내륙 진공훈련인 쌍용작전, 참수작전과 이에 맞선 북한의 청와대 타격 엄포 등 한반도 긴장이 최고조에 달한 시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 협상팀이 북한에 간다니,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지난 1월 베이징에서 북·미·중 3자가 접촉했고, 남북이 개성공단을 둘러싸고 자해행위를 주고받은 2월11일 베이징에서 북한과 일본의 외교관이 접촉했다는 정보가 일본 외교가에서 날아들긴 했다. 그렇다고 특별하게 진전된 상황도 없지 않은가. 미심쩍은 태도를 눈치챈 듯 이 소식통은 다음 말을 이어갔다. “2월23~24일, 왕이 외교부장의 방미 때 언론에 발표되지 않을 또 다른 보따리가 있을 것이다. 그것과 관련돼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면서 이 ‘또 다른 보따리’의 내용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했다.

“북한의 핵동결 및 비확산 선언과 IAEA 사찰단 복귀 등이다. 지난해 류윈산 상무위원 방북 때 미국이 중국을 통해 (북으로부터) 얻고자 했던 내용들이다.”

ⓒAP Photo2월23일 워싱턴에서 왕이 중국 외교부장(왼쪽)과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의 기자회견이 열렸다. 사드 배치와 평화협정 관련 언급이 나왔다.

소식통이 제공한 정보의 진가는 곧바로 드러났다. 2월23일(현지 시각) 워싱턴에서 왕이 외교부장과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의 기자회견이 열렸다. 예견됐던 대로 중국이 북한과의 광물 거래를 제한하고 금융제재도 수용하는 등 미국 측의 이른바 ‘이빨 있는 제재안’을 상당 부분 수용할 것으로 알려졌다. 눈길을 끈 것은 사드의 한국 배치와 최근 불거진 평화협정 문제에 대한 케리 미국 국무장관의 발언이었다. 그는 “아직 사드의 한국 배치는 결정되지 않았고 미국이 사드에 목말라 있거나 그런 기회를 찾기 위해 노심초사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과 한국 등 우방국에 대한 핵 위험이 사라진다면 사드를 배치할 필요성도 없어진다”라고 말했다. 사드 강행 의지를 밝혀온 한국 정부 및 미국 군부의 견해와는 결이 다르다.

평화협정과 관련된 캐리의 발언은 더욱 직설적이다. “미국의 대북정책 목표는 지속적인 응징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북한을 협상 테이블로 돌려놓으려는 것이다. 북한이 비핵화를 위한 테이블에 나오고 협상에 응한다면 궁극적으로 평화협정을 체결할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북한이 ‘핵협상에 응할 경우’ 사드의 한국 배치나 대북 군사 압박을 중단하고 평화협정에 대해서도 논의할 수 있다는 얘기다.

ⓒEPA포항에서 진행된 북한 내륙 진공훈련인 한·미 쌍용작전(2014년 3월).

미국 국무부의 ‘2·29 트라우마’

그런데 ‘북한이 핵협상에 응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6자회담 형식이든 북·미 회담 형식이든, 그동안 북한과의 핵협상이 추진되지 못했던 것은 미국 국무부의 ‘2·29 트라우마’ 때문이었다.  2012년 2월29일, 국무부가 마음먹고 북한과 맺은 합의가 그해 4월15일 북한의 장거리 로켓 발사로 좌절된 뒤 국무부는 워싱턴 보수파들의 공격에 시달려왔다. 심지어 같은 해 7월부터는 라이벌인 국방부가 일본을 앞세워 독자적인 대북 라인 구축에 나서면서 주도권 다툼 양상까지 벌어졌다. 국무부가 체면을 잃지 않고 북핵 회담의 주도권을 되찾으려면 북한이 최소한 2·29 당시의 합의를 먼저 실행해줘야 한다. 그 합의 내용은 ‘핵·미사일 실험 동결(모라토리엄)과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단의 영변 핵시설 복귀’다. 이른바 ‘비핵화 선(先)조치’다. 하지만 북·일 협상을 통해 미국 국방부와 채널을 만든 북한으로서는 굳이 국무부 주도의 2·29 합의 내용을 실행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소식통의 말대로라면 왕이 부장은 이에 대한 해법을 들고 케리 국무장관을 만난 셈이다. 2월23일 기자회견 석상에서 보여준 케리 장관의 여유 넘치는 표정, 그간의 긴장된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덕담에서 행간을 읽을 수 있을 듯하다. 게다가 이는 소식통이 말한 왕이 부장의 방미 시점에 맞춘 ‘미국 협상팀의 평양 방문설’과도 아귀가 맞아떨어진다. 미국 처지에서 볼 때 이렇게 중요한 문제를 어떻게 중국 얘기만 듣고 판단할 수 있겠는가. 제3자에 의해 전달된 외교상의 중요한 정보를 직접 당사자에게 확인하는 것은 미국 외교의 오랜 전통이다.

ⓒAP Photo2015년 10월 류윈산 방북(위)으로 북·중 간 관계가 나아졌으나 6자회담 환경 조성에는 실패했다.

평화협정을 둘러싼 최근의 미·중 간 고공전 때부터 뭔가 낌새가 이상하긴 했다. 왕이 외교부장은 2월17일 중국 베이징에서 줄리 비숍 오스트레일리아 외무장관과 회담 후 연 기자회견에서 ‘비핵화의 실현과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는 것을 동시에 추진하는 협상을 벌일 것’을 제안했다. 지난해 10월1일 이수용 북한 외무상이 유엔총회에서 주장했고, 북한 외무성 대변인 역시 노동당 창건 70주년 기념일을 사흘 앞두고 지난해 10월7일에 공식 제기한 북한의 평화협정 체결 주장을 받아들이는 한편 미국이 그동안 요구한 비핵화 추진도 병행하자는 방안인 셈이다. 그러나 비핵화 없는 평화협정을 주장하는 북한과 평화협정 없는 비핵화를 선호하는 미국 입장이 팽팽한 판국에 이를 단순히 병행하자고 해서 될 일인가 하는 의문에 부딪힌 게 사실이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2월21일자 미국 〈월스트리트 저널〉이 북한의 4차 핵실험 전 북·미가 평화협정을 논의하기 위해 접촉했다고 보도한 것이다. 물론 비핵화 문제도 다뤄야 한다는 미국 측 요구를 북한이 거부해 결국 핵실험으로 이어졌다는 것이지만, 묘한 여운을 남겼다. 즉 왕이 부장이 제기한 동시병행론에 대해 미국도 비핵화 논의가 전제된다면 응할 용의가 있다는 뉘앙스를 풍긴 것이다. 미·중이 고공에서 양측의 의중을 떠본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 북한이 요구해온 평화협정 주장을 수용하는 모양새를 취해 북한의 체면을 살려주고, 그 대신 미국이 원하는 비핵화 선결 조치라는 양보를 선물해줌으로써, 중국을 매개로 한 북·미 간 채널을 여는 방향이다.

ⓒAP Photo중국의 ‘위안화 국제화’ 이후 글로벌 투기꾼의 위안화 공격이 본격화했다. 위는 베이징 증권사 객장.

그렇다면 그동안의 전쟁 일보 직전 분위기에서  하루아침에 북한의 비핵화와 평화협정을 맞바꾸는 대타협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 것일까? 당연히 그건 아니다. 외교관의 말은 역시 끝까지 들어봐야 한다. 케리 장관은 어디까지나 ‘궁극적으로… 할 수 있다’고 말했을 뿐이다. 북한이나 미국이나 지금 당장 비핵화나 평화협정에 응할 처지도 아니고 그럴 마음도 없다. 다만 아무런 대화 없이 지금처럼 방치되어서는 곤란하다는 얘기다. 왕이 부장의 다음과 같은 발언에 미국과 중국의 속마음이 담겨 있다. “(미·중 양국 모두가) 한반도 상황을 향후 두 달 동안 아주 면밀히 모니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한반도 상황이 통제를 벗어나는 상황을 예방해야 한다.”

향후 두 달이면 3, 4월이다. 한·미 양국의 키리졸브 훈련과 독수리훈련, 이에 맞서는 북한군의 움직임 등으로 긴장이 고조될 것이다. 이런 움직임이 통제를 벗어나지 않도록 미국과 중국이 ‘상황을 예방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 국무부와 중국 국무원의 ‘공동관리 체제’

엄밀하게 말하면 미국 국무부와 중국 국무원에 의한 ‘공동관리 체제(콘도미니엄 체제, G2 체제)’를 부활시키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미·중 양측은 이미 지난해 10월 류윈산 중국 상무위원장 방북을 통해 같은 시도를 했으나 좌절한 바 있다. 그 뒤 미·중 관계는 심각한 상황으로 접어들었고 거기에 한반도도 빨려 들어갔다. 이제 전환의 시점이 온 것이다.

류윈산 방북 당시의 상황은 2013년 6월 캘리포니아 미·중 정상회담 직후에 비견할 수 있다. 당시 북한의 3차 핵실험으로 어지러워졌던 동북아와 한반도 정세를 미·중 정상이 가닥을 잡고 6자회담으로 이어가려 했다. 지난해의 류윈산 방북 역시 그 직전인 9월 미·중 정상회담의 연장선에서 이뤄졌다. 남중국해 인공섬을 둘러싼 충돌은 있었지만, 북한이 70주년 당 창건 기념일 전후에 4차 핵실험과 장거리 로켓 발사를 강행할 것이라는 소문이 팽배한 한반도 상황을 그대로 방치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장예쑤이 중국 외교부 대미담당 수석부부장(전 주미 대사)과 쑹타오 중앙외사영도소조 상무 부주임이 동행한 것이라든지, 이들의 방북 하루 전인 지난해 10월8일 미국 국무부 차관이 베이징까지 날아가 접촉한 것 역시 그런 맥락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류윈산 방북은 북·중 간 관계 회복에는 상당히 중요한 합의를 이뤘으나 미국 측이 희망한 6자회담 환경 조성에는 실패해 미국을 실망시켰다.

그 뒤 여러 가지 상황이 발생했다. 워싱턴에서는 이미 마이클 필스베리 허드슨연구소 중국전략센터 소장의 〈100년의 마라톤〉이라는 책이 인기를 끄는 등 중국 때리기 분위기가 만연해 있었다. 더구나 남중국해 인공섬 매립에 대한 미국 국방부의 위기감은 폭발 일보 직전이었다. 국무부의 공동관리 체제 구축 시도마저 불발로 끝나자 드디어 미국의 행동 개시가 이뤄졌다. 지난해 10월27일 미국 이지스함 라센호가 남중국해 인공섬 12해리 안에서 대중국 무력시위를 시작한 것이다.

한 달 뒤인 지난해 11월30일 중국 위안화가 국제통화기금(IMF) 집행이사회에 의해 특별인출권(SDR) 통화 바스켓에 포함되자 이를 계기로 핫머니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위안화 국제화’는 중국이 추진해온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의 국제 투자자금 조달을 용이하게 해준다. 그러나 위안화의 국제 거래를 통제해온 족쇄를 풀어버림으로써 위안화를 글로벌 투기꾼들의 표적으로 노출시키는 측면도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올해 1월21일 글로벌 투기자본의 대부라고 할 수 있는 조지 소로스가 다보스포럼 참석 중 블룸버그 TV와의 인터뷰에서 중국 경제의 경착륙 가능성을 경고한 것을 신호탄으로 공매도 수법을 동원한 글로벌 투기꾼들의 위안화 공격이 본격화됐다(〈시사IN〉 제440호 ‘중국 경제는 시한폭탄?’ 참조). 일각에서는 중국을 4월께 IMF 관리 체제로 몰아가는 것이 글로벌 투기꾼들의 목표라고 주장한다.

북한의 핵실험과 장거리 로켓 발사로 인한 한반도 위기는 이런 와중에 벌어졌다. 지난해 12월 모란봉악단의 베이징 공연은 류윈산 방북 당시의 합의 사항 중 하나였다. 원래는 12월 공연이 성공하면 올해 2월 한 차례 공연을 더 한 뒤 3월에 김정은 비서가 방중한다는 시나리오였다. 그런데 리허설 도중 예기치 않은 분란이 발생해 모란봉악단이 철수하고 그 여파로 남북 당국자 회담도 깨졌다. 북한은 4차 핵실험과 장거리 로켓 발사로 치달았다.

미국으로서는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온 셈이었다. 사드의 한국 배치와 미국 전략무기를 동원한 무력시위로 1타 3·4피의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대북 압박은 기본이고 통화전쟁과 남중국해 무력시위, 타이완 선거에서의 민진당 집권과 함께 대중국 봉쇄가 완성됐다. 한·중 관계, 남북 관계의 고리가 끊어진 한국을 한·미·일 동맹으로 묶고, 멀리 러시아에도 견제구를 날릴 수 있게 됐다.

무엇보다 중국이 답답해졌다. 경제성장 둔화와 내수 부진, 외자 유출 등으로 경제 여건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 미국과의 통화전쟁과 한반도 긴장 고조라는 협공은 피할 필요가 있었다. 중국이 남중국해에서 판을 키우거나 핫머니의 공격으로 중국 경제가 심각한 위기 국면에 빠지면 미국도 안전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숨구멍이 필요해진 상황이다. 결국 북한과의 교섭에서 돌파구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투기자본의 공격으로 중국도 북한에 대해 더 이상 수수방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북한에 ‘핵동결 선언’과 ‘중국의 국경 통제에 따른 무역 축소 및 경제난’ 가운데 양자택일을 요구했다는 얘기가 나온다”라고 앞의 소식통은 전했다. 왕이 외교부장이 이번 방미에 ‘북한의 핵동결 선언 약속’이라는 보따리를 들고 갈 수 있었던 배경이다. 물론 중국의 선물도 준비돼 있다. 리허설 사건으로 중단됐던 모란봉악단 공연 재개와 김정은 비서의 방중 프로그램 재가동이다. 오는 3월1일부터 15일까지의 중국 전인대 기간을 피해 가급적 3월 안에 모란봉악단이 중국에 다녀가고 4월에 김정은 비서가 방중해 북·중 정상회담을 하는 방안이 거론된다. 그리고 북한은  5월의 7차 당 대회 때 핵동결과 비확산을 선언한다는 시나리오다. 어차피 북한도 7차 당 대회 이후 경제개발에 매진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크게 손해볼 일은 없다. 미·중의 공동관리 체제가 복원되면 사드 배치와 통화전쟁, 남중국해와 타이완 문제 등 다른 현안에 대해서도 그랜드 바겐(대협상)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북한·미국·중국이 모두 제자리를 찾아가면 남는 것은 결국 한국뿐이다. 중국과 대립하며 사드 배치를 강행하고 개성공단을 섣불리 중단시킨 데 대한 청구서를 어떻게 감당할지 걱정이다.

기자명 남문희 대기자 다른기사 보기 bulgot@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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