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조선인 시인 김시종(87)이 제42회 오사라기 지로(大佛次郎) 상을 수상했다. 이 상은 소설, 논픽션, 역사 기술 등 폭넓은 분야에서 활약한 작가 오사라기 지로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아사히 신문사가 만든 산문 문학상이다. 한국 사회에서도 친숙한 노벨 문학상 수상자 오에 겐자부로나 시바 료타로 등도 이 상을 수상했다. 지난해 제1회 제주4·3평화상 수상자인 재일조선인 소설가 김석범도 그의 소설 〈화산도〉로 1984년 제11회 상을 받은 바 있다.

김시종 시인의 이번 수상작인 〈조선과 일본에 살다-제주도에서 이카이노로(朝鮮と日本に生きる―済州島から猪飼野へ)〉(이와나미 신서, 2015)는 자서전이다. 시인이 시집이 아니라 자서전으로 수상하게 된 데에는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났으나 평생을 일본에서 살아온 한 인간의 정신과 언어에 대한 직시에서 배어나오는 날카로운 통찰력 때문일 것이다. 오사라기 지로 상의 선정위원들은 책에 담긴 작가의 쓰라린 과거를 드러내는 용기와, 원한 많은 언어인 일본어로 일본 사회에 물음을 던지는 작품 활동을 계속해온 각오를 높이 샀다고 했다. 담당 편집자의 10년이 넘는 설득 끝에 빛을 본 이번 자서전은, 적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작가 자신에게는 마음이 무거운 회상기이고 일본과 한국의 독자에게는 마음 편하게 읽히지는 않을 책이다.

ⓒ이령경 제공김시종 시인이 수상한(위) ‘오사라기 지로 상’은 아사히 신문사가 만든 산문 문학상이다.

재일조선인 작가 1세대인 김시종 시인은 일제강점기인 1929년 1월 부산에서 태어났다. 유년기에 함경북도 원산의 친조부 댁에서 3년여를 지냈지만, 어머니의 고향인 제주 성내에서 청소년기를 내내 보냈기에 그는 자신의 고향을 제주도라고 말한다.

소년 김시종은 1936년 황민화 교육이 시행되던 제주공립보통학교(1938년 제주공립심상소학교로 개칭)에 입학해 식민지 종주국의 ‘국어’였던 일본어를 통해 감성을 키우고 사고 체계를 형성했다. 식민지 지배하에서 자라긴 했지만, 소년의 일상은 일본 전통 시와 정감 어린 동요나 군가에 흠뻑 빠져 지낸 나날이었다.

1941년 제주북공립국민학교로 바뀌면서 그나마 있던 조선어 수업도 없어지고 집에서도 사용이 금지되었지만, 일본어 공부가 즐겁기만 했던 소년은 불편함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소년은 일본어를 못하는 어머니와 유창한 일본어 실력을 지니고도 전혀 쓰려 하지 않는 한복 차림의 아버지가 답답했다. 또한 소년은 일제가 망하면 조선도 망한다고 생각했기에 6학년 말 일본의 진주만 침공 성공에 만세를 불렀고, 자신도 군인이 되고자 했다. 김시종 시인은 그러한 소년기의 자신이 바로 진짜 일본 국왕의 백성이 되고 싶었던 ‘황국 소년’이었음을 아주 솔직하게 고백한다.

김시종은 1942년 선생님이 되기 위해 광주의 관립광주사범학교 심상과(尋常科)에 들어간 후부터 본격적으로 문학적 감수성을 키우게 된다. 열혈 황국 소년치고는 감성적이었던 김시종은 톨스토이의 〈부활〉을 애독했고, 기타하라 하쿠슈(北原白秋·1885~1942) 등 일본 시인들의 영향을 받아 시 습작도 많이 했다고 한다. 한창 감수성 예민한 소년은 일본 전통 시와 산문의 음률과 서정성에 이끌렸고, 이때 몸에 새겨진 감성들이 나중에 시인 김시종의 근간이 되었다.

하지만 열일곱 살 김시종은 ‘원하지도 않았던 8·15 광복’을 맞이한다. 어리석었던 ‘황국 소년’이 부끄러워진 청년 김시종은 1945년 9월 광주의 학교로 돌아가 조선어 습득에 매진했다. 그때 시인에게 사상적 전환점을 가져다준 최현을 만나게 된다. 청년 김시종은 최현을 통해 조국의 현실에 눈을 떴고 이육사와 같은 민족 시인들의 시도 접했다. 광복 후 김시종의 청춘은 이육사의 시로 뿌리내리기 시작했다고 회상한다.

시인의 의식 속 ‘모국어’와 다름없는 언어가 종주국의 침략 언어 ‘일본어’였던 만큼, 청년 김시종의 ‘8·15’는 식민지 지배의 끝이면서 동시에 자신을 지배하고 있던 언어와의 싸움이 시작된 날이기도 했다. 1949년 6월 이후 부득이하게 일본에서 살아야 했던 사정도 겹쳐 김시종 시인은 자신의 문학세계에서 주체적으로 선택한 언어인 일본어와 ‘재일조선인(재일·在日)’으로서의 삶에 대한 긴장을 한시도 놓지 않는다. 김시종 시인은 수상 소감에서 자신의 ‘재일’로서의 삶은 자신의 몸에 밴 유창하고 세련된, 감정이 과다한 일본어를 버리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밝혔다. 자신도 인정할 정도로 과도하게 ‘일본어’와 ‘재일’을 응시하고 집착해온 것이다. 1986년 에세이집 〈자이니치(在日)의 틈새에서〉로 마이니치 출판문화상, 2011년에 시집 〈잃어버린 계절〉로 다카미 준(高見順) 상을 수상했다. 일본어를 부정적 매체로 삼아 태어난 그의 시는 반일본적 서정성과 리듬을 창조해 응축된 표현의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받는다.

ⓒ연합뉴스2006년 부인 강순희씨와 함께 제주 한라산에 오른 김시종 시인.

4·3 학살의 광풍을 피해 일본으로 건너간 시인

이번 자서전의 후반부는 제주4·3에 관한 김시종 시인의 생생한 증언이 담겨 있다. 제주 역사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김시종 시인은 제주에서 남로당 활동에 가담하다가 1947년에 예비 당원이 되었다. 1949년 6월 4·3의 와중에 나이 든 부모만 남겨두고 학살의 광풍을 피해 일본으로 몸을 피해야 했다. 2011년 4월 도쿄에서 열린 제주4·3사건 63주년 기념 강연에서 김시종 시인은 ‘내 사랑 클레멘타인’을 흥얼거리다 눈물을 흘렸다. ‘내 사랑 클레멘타인’은 그가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서 배운 유일한 조선말 노래였기 때문이다.

그는 2000년 도쿄의 제주4·3사건 52주년 기념강연회 이전까지는 공식적으로 4·3을 언급한 적이 없다. 4·3으로부터 도망 나와 살아남은 자의 부채감이 컸던 것이다. 광복 직후 한반도를 둘러싼 혼돈스러운 정치 사회 상황에 대한 시각, 제주4·3으로부터 도망 나온 자의 시각, 구 종주국 일본에서 살게 된 재일조선인으로서의 시각들이 겹겹이 얽히고설켜 있으면서도 각각 고립된 채 김시종 시인의 기억 속에 갇혀 있었다. 분단된 조국의 현실과 차별과 배제가 여전한 일본 사이에서 김시종 시인은 오랫동안 그 기억들을 꺼낼 수도 없었고 말하고 싶지도 않았을 것이다. 소설가 김석범이 제주4·3 때 제주도에 없었기 때문에 계속 4·3을 써야 했다면, 김시종은 그 섬에 있었기 때문에 쓸 수가 없었다.

책 말미에 2003년 시인이 쓴 인사말이 들어가 있다. 조선적을 한국적으로 바꾸고, 일본의 외국인등록증의 성 ‘임’으로 제주도 본적을 취득했다는 내용이다.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온 김시종 시인은 일본에서 국외 추방을 피하기 위해 임 아무개씨의 명의로 체류 자격을 획득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한국적을 취득하면서도 호적에 이 이름으로 등재해야만 했던 것이다.

김시종 시인은 고향을 떠나온 지 49년 만인 1998년에 고향을 처음 방문했다. 조선적을 지닌 재일조선인은 고향을 방문할 때마다 임시여권을 발급받아야 했고, 정권에 따라 그것도 쉽지 않았다. 시인은 그간 방치해온 부모님의 묘에 1년에 한두 번 성묘라도 하고 싶어서 한국적을 취득했다. 그러나 본명 김시종이 필명이 되고 임시종이라는 이름이 본적에 오르게 되었다. 이 시인의 두 이름에 분단의 현실과 한반도와 일본을 가로지르는 역사가 되새겨져 있는 것이다. 그의 자서전은 한국에서 곧 번역 출판될 예정이다.

기자명 도쿄∙이령경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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