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한 권력의 폭주로 세상이 어지러웠다. 참다못한 인권 변호사와 의사 출신 사나이 둘이서 의기투합해 새로운 질서를 바라는 민심에 답하며 국가를 새롭게 탄생시켰다. 문재인과 안철수의 이야기가 아니다.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가 일으킨 쿠바 혁명 이야기다.

올해로 57주년을 맞는 쿠바 혁명은 단순한 정치권력의 변동이 아니었다. 경제·사회·문화 모든 분야의 총체적인 혁명이었다. 쿠바인들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꿔버린 쿠바 혁명은 제3세계와 유럽은 물론 아시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세계사적 사건이다. 특히 쿠바의 무상교육과 의료 체계는 높이 평가받는다. 이와 반대로, 쿠바의 혁명정부를 경제적으로 자립하지 못한 구시대의 산물이자 이념적 실패작이라는 혹평 역시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오늘날 망가진 쿠바 경제의 근본 원인이 미국의 가혹한 경제봉쇄라는 사실에는 누구나 동의한다.

쿠바 혁명의 본질은 미국이라는 거대한 제국과의 투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400여 년에 걸친 스페인 식민지 시대가 끝나자마자 쿠바는 약 60년간 미국의 실질적인 지배를 받았다. 미국에 종속돼 있던 시절의 정점에서 미국의 충견 노릇을 톡톡히 하던 바티스타 정권을 전복시키고 들어선 세력이 바로 혁명정부다. 카스트로 정권이 구축한 ‘다윗과 골리앗’의 프레임은 20세기 후반 국제정치의 지형을 바꿨다. 정의로운 명분과 지정학적 여건을 활용한 쿠바의 영리한 외교는 미국으로부터 작은 섬나라를 오늘날까지 지켜왔다.

ⓒAP Photo2015년 8월14일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사진 가운데)이 참석한 가운데 쿠바 아바나의 미국 대사관에서 성조기 게양식이 열렸다.

미국은 1964년 국무부 보고서에 명시한 것처럼 라틴아메리카에서 미국의 패권에 저항하는 쿠바를 좌시할 수 없었다. 쿠바 미사일 위기를 겪은 뒤로는 자국을 초토화시킬 수 있는 소련의 ‘항공모함’ 쿠바를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쿠바에 대한 미국의 테러는 끊이지 않았다. 피그스 만 침공 같은 군사작전, 카스트로 암살 시도, 경제제재, 이민자 정책 등 쿠바에 대한 미국의 전방위 압박은 21세기까지 이어졌다.

지난해 말 백악관은 오바마 대통령이 2016년 내로 쿠바를 방문할 가능성을 시사했다. 쿠바 혁명이 일어난 이후에 태어난 오바마가 쿠바와의 국교 정상화를 선언(2014년 12월)한 지도 이제 1년이 넘었다. 그동안 양국에 대사관이 개설됐고, 직항 항공편이 생겼으며, 직통전화도 가능해졌다. 조만간 우편 배송도 이루어질 것이다. 그사이 다양한 분야의 협상을 위해 미국의 국무부·농무부·상무부 장관과 주지사 여럿이 수차례 쿠바를 방문했다.

그러나 두 나라의 관계 회복에는 여러 난관이 남아 있다. 쿠바의 ‘인권’이나 ‘정치적 부자유’ 같은 미국 정부의 레토릭 때문이 아니다. 가장 큰 걸림돌은 과거사다.

쿠바 혁명정부는 정권을 장악하자마자 토지개혁을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미국 기업들은 쿠바 내에 갖고 있던 19만㏊ 이상의 땅을 몰수당했다. 보복 조치로 미국은 쿠바로부터의 설탕 수입을 끊어버렸다. 그러자 쿠바는 설탕으로 소련의 원유를 교환 구입했다. 이를 미국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한 워싱턴은 쿠바 내의 미국 정유업체들에 소련 원유를 정유하지 못하게 했다. 그러자 쿠바 혁명정부는 모든 산업의 국영화를 추진하며 자국 내 미국 정유업체들의 소유권을 박탈해버렸다. 이로 인해 사유재산을 빼앗긴 미국 자본가들은 미국 정부를 압박해 대(對)쿠바 경제제재를 선포하도록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피그스 만 침공과 쿠바 미사일 위기로 양국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당시 카스트로 정부는 영국·스페인·멕시코 등의 자산을 국유화하는 경우에는 매입비용을 지불했다. 그러나 미국의 자산에 대해서는 한 푼도 내지 않았다. 그때 쿠바 정부가 미국인들로부터 압수한 자산의 가치가 19억 달러가량이었다. 물가상승률을 감안해서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70억 달러(약 8조5000억원)를 훨씬 웃돈다.

ⓒEPA교황청은 미국과 쿠바의 재수교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위는 1998년 쿠바를 방문해 카스트로를 만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국교 정상화 이후 미국과 쿠바의 ‘샅바 싸움’

반세기 전 빼앗긴 자산에 대한 미국의 배상 청구에 쿠바 역시 강경하게 대응하고 있다. 쿠바는 미국의 경제봉쇄로 인해 누적된 피해액 1170억 달러를 요구한다. 이와 더불어 쿠바는 19세기 말에 미국이 부당하게 탈취한 관타나모 기지를 반환하라는 주장도 펴고 있다.

해결책이 없는 것은 아니다. 쿠바 경제 활성화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윈윈’ 구도로 가는 합리적인 대안들이 있다. 어차피 미국이 궁핍한 쿠바로부터 현금 배상을 받아내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쿠바 정부가 배상 대상인 미국인들에게 개발 인허가, 세제 특혜, 민영 사업권 등을 대체 지불할 수 있다.

일부 법학자들은 쿠바 측이 주장하는 경제적 피해에는 국제법적 선례나 근거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유엔에서 쿠바 경제봉쇄 관련 찬반 투표를 할 때마다 미국과 이스라엘만 일관되게 찬성해왔다. 미국의 대쿠바 경제봉쇄야말로 명분도, 근거도 없는 조치였다는 방증이다.

1996년 클린턴 대통령이 서명한 ‘헬름스-버턴 법(Helms-Burton Act)’은 쿠바에 대한 종전의 경제제재를 더욱 광범위하게 확장하기 위한 수단으로, 쿠바와 거래하는 외국 기업들에 대한 제재 및 보복 조치들이 포함돼 있다. 소련 붕괴 후에도 망하지 않고 버티는 쿠바를 죽이기 위한 미국의 마지막 비수였다.

미국의 이러한 비인도적 행위에 교황청을 포함한 국제사회는 일제히 비난에 나섰다. 1998년에 이뤄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역사적인 쿠바 방문과 후임 교황들의 잇따른 쿠바행 역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엄밀히 따지면 미국과 쿠바의 재수교에 결정적인 구실을 한 것 역시 교황청이었다.

미국과 쿠바 양국이 관계를 완전히 정상화하려면 경제봉쇄를 풀어야 한다. 그 열쇠를 쥔 곳은 미국 의회다. 일설에 따르면, 1973년 한 기자가 피델 카스트로에게 “미국과의 관계 개선이 언제쯤 가능할 것 같으냐”라고 묻자 카스트로는 “미국에서 흑인이 대통령이 되고, 라틴아메리카 출신이 교황이 되는 날에야 가능할 것이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2016년은 흑인 미국 대통령 임기의 마지막 해이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대다수 미국 국민이 쿠바와의 수교를 반기고 있다. 오바마 역시 자신의 외교 업적을 굳히고 싶어 한다. 그러나 공화당의 유력 대선 후보들인 쿠바계 이민 2세 루비오와 크루즈는 쿠바와의 긴장 완화를 파투 놓기 위해 벼르고 있다(이들의 노선은 일부 탈북자들의 반공 정서와 유사하다).

경제적으로 허덕이는 쿠바 역시 미국과의 관계 개선이 절실하다. 지난 17년간 쿠바를 후원해온 산유국 베네수엘라는 최근 정권 교체로 더 이상 우방이 아니다.

1492년 콜럼버스가 쿠바를 발견한 이후 스페인·미국·소련 등 지구를 호령한 제국들은 카리브 해의 보물섬인 쿠바를 탐내왔다. 미국의 라이벌인 중국 역시 쿠바에 군사적·경제적 관심을 갖고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외교의 기술은 협상에서 드러난다. 중국 열병식 한번 갔다가 미국한테 면박받은 것을 만회하려 일본과의 과거사를 졸속으로 덮어버리고 자화자찬하는 한국 정부는, 일만 안 풀리면 북한과 대치한 한반도의 특수성을 운운한다. 반세기 이상 미국과 싸우고 대치하며 협상하는 쿠바의 혁명정부를 주의 깊게 지켜봐야 하는 이유다.

기자명 정승구 (영화감독·작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