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주석 탄생 100주년인 2012년 4월15일 발사한 장거리 로켓은 불발로 끝났다. 로켓이 다시 날아 궤도상에 진입한 것은 그해 12월12일. 북한으로서는 경사스러운 날이었겠으나 시진핑에게는 치욕스러운 날이었다. 11월15일 중국 공산당 제18기 1중 전회에서 총서기에 선출된 지 한 달도 안 되어 북한의 초대형 도발에 직면한 것이다. 그것도 11월30일 측근인 리젠궈(李建國) 신임 전인대 상무위원회 부위원장을 취임 특사 겸 김정은 제1비서에게 보내 미사일 발사 실험과 핵실험을 중단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했으나 보기 좋게 뺨 맞은 꼴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북한이 3차 핵실험을 한 2013년 2월12일은 전인대에서 시진핑이 주석직을 승계(2013년 3월15일)하기 한 달 전이었다. 총서기 취임 직후 뺨 맞고, 국가 주석 취임 직전 찬물을 뒤집어쓴 꼴이다. 북한이 3차 핵실험을 한 이후 북·중 관계 회복을 위해 당·정의 실무자들이 여러 아이디어를 올렸으나 번번이 시진핑에 의해 가로막혔다. 그만큼 분노가 컸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시진핑 개인감정만으로 중국이 유엔의 대북 제재에 동참하고 독자 제재에 나선 것은 아니다. ‘중국몽(中國夢)’을 외치며 대국 외교를 지향한 시진핑 정권에게 필요했기 때문이다. 2013년 6월의 캘리포니아 미·중 정상회담에서 시진핑이 오바마에게 제안한 신형대국관계는 미국이 먼저 얘기를 꺼낸 G2 체제에 대한 나름의 화답이었다. 금융완화 정책을 둘러싸고 중국의 경제지원을 필요로 하던 미국의 속내와 중국 해군의 태평양 진출 확대 기회로 이용하려는 중국의 속내가 교차했다.

ⓒXinhua2013년 6월7일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시진핑 주석(왼쪽)과 오바마 대통령이 미·중 정상회담을 했다.

바로 이 미·중 밀월기에 3차 핵실험이라는 사고를 친 북한이 끼어 있었다. 중국의 제재 동참은 ‘책임 있는 대국’으로 우뚝 선 중국의 국제사회에 대한 의무라고 포장됐지만 실제로는 미국과 신형대국관계를 맺기 위한 교환 품목 중 하나였던 것이다. 그해 12월의 장성택 처형 탓도 있었지만 은행 간 금융거래 제한과 무기 금수조치에 이어 2014년 1월에서 5월까지 원유 공급 전면중단이라는 강도 높은 제재조치가 취해졌다. 미국과 국제사회가 그토록 열망하던 원유 중단 조치가 드디어 ‘통계상’에 잡힌 것이다. 2014년 10월 옌볜대학 세미나에 참석한 중국 전문가는 ‘북한이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오면 좋지 않을 것’이라며 기염을 토했다. 중국의 힘, 그리고 제재 효과에 대해 믿어 의심치 않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그 뒤 어떻게 됐는가.

북한은 힘은 들었을지언정 무릎을 꿇지는 않았다. 북한 경제는 오히려 지표상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충격이었던 것은 중국의 대북 제재가 북한을 고립시킨 것이 아니라 중국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결과를 낳았다는 점이다. 해석은 여러 가지다. 중국의 대북 지원이 외부에 알려진 것만큼 그렇게 많지 않았을 가능성. 보통 중국에서 북한으로 매년 유·무상 합쳐 100만t의 원유가 들어가는 것으로 본다. 이 중 50만t은 유상이고 50만t은 무상 지원이라고 하는데, 바로 이 부분에 대해 얘기가 엇갈린다. 베이징에 나와 있던 북한 고위 무역일꾼들은 실제보다 부풀려진 내용들이 외부에 많이 알려졌다고 말하곤 했다. 사실상 무상 지원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원유 지원을 예로 들면 수풍 발전소 전기를 나눠 쓰는 대가이지 공짜가 아니라는 것이다. 국내의 한 대북 사업자는 “아프리카의 개별 국가마다 중국이 매년 1억 달러 이상 지원하는 데 비해 북한에 지원하는 액수는 5000만 달러도 되지 않는다”라고 지적했다.

‘북한 고립’이 말처럼 쉽지 않다니까

두 번째는 그나마도 줄어든 부분을 누군가 메워주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러시아다. 2014년과 2015년, 러시아산 원유가 평안북도 봉화화학공장에 공급되고 있다는 얘기가 돌았다. 러시아산 원유는 보통 소형 유조선으로 동해를 거쳐 나진·선봉의 승리화학공장에 공급되는 게 원칙인데 서부 지역에 위치한 봉화화학에 나타난 것이다. 중국이 공급을 줄인 만큼 러시아가 메워준 것으로 보인다.

세 번째는 시장화의 진전으로 중국의 생필품 지원이 줄어도 북한 주민들 삶에 큰 영향이 없다는 점이다. 차라리 중·조 변경의 무역을 통제하면 북한 시장에 상품 공급이 줄어들어 타격이 있을 수 있으나 지방정부 관할인 변경 무역까지 중앙에서 통제하기는 쉽지 않다.

중국이 원유 지원을 감축한 만큼 러시아가 메우고 들어왔다는 것은 북한을 고립시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러시아의 대표적인 한반도 전문가 알렉산드르 레빈의 얘기처럼 북한이라는 공간은 비우면 비워진 채로 그대로 있는 게 아니라 다른 누군가에 의해 채워지게 되어 있는 것이다. 반면 대북 제재 동참을 통해 중국이 얻고자 했던 미국과의 신형대국관계는 성과가 없었다. 오히려 미·일 동맹만 강화됐다. 미국은 북한문제는 중국에 떠넘기고 일본과 동맹을 강화해 중국을 봉쇄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평양 조선중앙통신1월6일 ‘수소탄 실험에 성공했다’는 북한 당국의 성명을 전해 들은 평양 주민들이 환호하고 있다.

북한과 관계가 악화된 이후 중국의 외교적 영향력은 추락했다. 중국이 미처 예상치 못했던 결과다. 1990년대 소련이 대북 편향 외교에서 남북 균형 외교로 전환한 후 영향력이 오히려 축소돼버렸던 것과 똑같은 경험을 중국이 하게 된 것이다. 중국이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자 미국은 더 이상 중국을 거치지 않고 북한과 직접 접촉에 나섰다. 2014년 11월8일 제임스 클래퍼 국가정보국(DNI) 국장의 방북이 그 상징이다. 그 후에도 성 김 대북정책특별대표를 중심으로 북한과의 직접 접촉을 위한 시도가 계속돼왔다. 한마디로 토사구팽당한 셈이다.

중국 내에서도 자성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특히 2014년 하반기, 대북관계를 전담하는 공산당 대외연락부를 중심으로 북핵 문제와 북한 문제를 분리해 대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결국 2015년 1월8일 김정은 비서 생일에 축전을 보내는 것을 계기로 중국의 대북정책에 궤도 수정이 이루어졌다.

4차 핵실험이 터지자 여기저기서 다시 중국을 찾는 목소리가 들린다.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은 지난 1월7일 왕이 중국 외교부장과의 통화에서 중국의 기존 대북 접근법이 사실상 실패했다고 규정하며 더 강력한 제재에 나설 것을 요구했다. 박근혜 대통령도 1월13일의 기자회견에서 중국의 적극적 역할을 주문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중국의 대답은 1월8일 화춘잉 외교부 대변인의 논평에 잘 드러나 있다. “반도(한반도) 핵 문제는 중국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고 중국이 ‘매듭’을 만든 것도 아니며 중국이 (북핵)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핵심’도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기자명 남문희 대기자 다른기사 보기 bulgot@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