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그는 미국의 문화 ‘아이콘’에서 ‘성폭행범’으로 몰리는 신세가 됐을까? 50년 이상 배우이자 코미디계 거인으로 4억 달러(약 4800억원)에 달하는 엄청난 부와 평판을 얻고도 일련의 성추문 사건으로 기소돼 감옥행 위기에 처한 빌 코스비(78)를 두고 하는 말이다. 코스비는 1980~1990년대에 걸쳐 풍요로운 흑인 가정의 일상을 흥미롭게 그린 시트콤 〈코스비 쇼〉로 세계적인 대박을 터뜨리며 미국인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코스비는 1960년대 중반부터 이미 크고 작은 성추문에 시달렸다. 2014년까지는 별 탈 없이 넘기는 듯 했다. 그러다 지난해 피해 여성들 가운데 일부가 오랜 침묵을 깨고 과거 코스비가 자신들에게 저지른 엽기적인 성추행 사실을 공개하면서 큰 충격을 던졌다. 이 와중에 한 여성이 약물 투입과 함께 성폭행을 당했다는 내용이 밝혀졌고, 관련 혐의로 코스비는 지난해 12월30일 기소되었다.

이 사건의 피해 여성은 올해 44세인 안드레아 콘스탄드. 현재 캐나다에 거주하는 그녀는 12년 전인 2004년 1월의 어느 날 저녁 코스비의 초대로 펜실베이니아 주 교외에 있는 그의 자택에 갔다가 강제로 약물 투입과 성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한다. 이번 사건을 맡은 펜실베이니아 주 몽고메리 카운티의 케빈 스틸 검사는 “기소하기에 충분하고도 강력한 증거가 있다”라고 자신감을 보였다. 하지만 코스비는 혐의 내용을 완강히 부인하고 있어 향후 치열한 법정 다툼이 예상된다.

ⓒAP Photo2015년 12월30일 빌 코스비(가운데)가 강제 추행과 성폭행 혐의로 기소돼 법정에 출두하고 있다. 이 사건에 대한 첫 심리는 1월14일에 열린다.

흥미로운 사실은 콘스탄드가 이번 사건과 관련해 과거에도 한 차례 사법 당국에 도움을 호소한 적이 있다는 점이다. 그녀는 코스비로부터 성폭행을 당한 지 1년쯤 뒤인 2005년 1월 모친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모친이 경찰에 관련 사실을 알리면서 코스비에 대한 수사가 시작됐다. 하지만 코스비는 조사 과정에서 콘스탄드와의 관계를 ‘연인’으로 규정하는 동시에 사건 당일 벌어진 일은 ‘상호 합의’에 근거한 것임을 강조했다. 또한 자신은 결코 그녀와 성관계를 가지지는 않았다고 주장했다. 당시 사건을 맡은 브루스 캐스터 검사는 증거 부족을 이유로 코스비를 기소하지 않았다. 콘스탄드는 민사소송을 제기해 2006년 합의로 마무리했다.

그런데 끝난 것으로 보였던 이 사건이 지난해 여름 재심에 들어갔다. 검찰이 사건 당시의 양측 진술서 등 정황을 다시 분석한 뒤 코스비의 유죄를 입증할 수 있다고 결론 내렸기 때문이다. 스틸 검사는 공소시효(12년) 만료를 불과 며칠 남겨놓고 코스비를 전격 기소했다.

콘스탄드 측의 주장은 대충 다음과 같다. 두 사람은 2004년 펜실베이니아 주 템플 대학 선후배 사이로 처음 만났다. 당시 그녀는 학교 여자농구팀에서 직원으로 일했다. 문제의 사건이 벌어지기 전까지 그녀는 코스비의 초대로 두 차례에 걸쳐 그의 자택을 방문했다. 그때마다 코스비의 성적 유혹을 받았지만 거부했다. 하지만 세 번째 방문 때 사건이 터졌다. 코스비는 콘스탄드가 자신의 직업 계획을 털어놓다가 초조해하는 모습을 보이자, 포도주와 푸른 알약 3정을 건넸다. 알약은 진정제인 ‘콸루데스’였다고 한다. 콘스탄드는 약을 복용한 뒤 20~30분 정도 지나자 정신이 혼미해지면서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지경에 처했다고 주장한다. 이런 상황에서 코스비가 콘스탄드의 몸을 만졌으며, 정신을 차린 새벽 4시쯤에는 성폭행을 당한 통증을 느꼈다는 증언이다.

코스비의 얘기는 다르다. 우선 당일 자신의 집에서 발생한 일은 “상호 합의”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한다. 코스비가 콘스탄드에게 건넨 알약도 ‘콸루데스’가 아니라 스트레스 완화제인 베나드릴이었다는 것이다. 더욱이 세 알도 아니고 한 알 반을 세 조각으로 나눠 주었다고 한다. 성관계도 없었다. 다만 이야기를 나누다 “서로 목을 껴안고 키스”하고 콘스탄드의 몸을 만졌는데, 그녀 역시 긍정적으로 반응했다는 것이 코스비의 주장이다. 코스비는 더 이상의 성적 시도를 하지 않고 침실로 올라갔다고 주장한다. 이튿날 아침 콘스탄드에게 머핀과 카푸치노 커피를 대접했는데, 그녀는 전날 벌어진 일에 대해 아무런 부정적 반응을 보이지 않고 귀가했다는 것이다.

코스비가 기소를 당했지만 유죄판결을 받을지는 아직 불투명하다. 양측의 상반된 주장 때문이다. 무엇보다 12년 전에 벌어진 일을 입증할 수 있는 ‘결정적 한 방’이 없다. 하지만 간접적 정황은 많다. 지금까지 50명 이상의 피해 여성이 잡지와 자서전 등을 통해 코스비를 비난했다. 그중 적지 않은 여성은 콘스탄드의 증언과 동일한 유형으로 성적 공격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특히 지난해 하반기에 크리스티나 루엘리(72)라는 여성은 1965년 코스비가 자신에게 약물을 투여한 뒤 성폭행했다고 주장해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런 점들은 기소를 결정한 스틸 검사 측에 유리한 정황으로 작용할 수 있다. 특히 스틸 검사는 코스비가 2005년 민사소송을 제기한 콘스탄드와 합의해주면서 사과를 표명하고 보상금을 지급했다는 사실 자체가 그의 유죄를 암시하는 강력한 증거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콘스탄드가 약을 먹고 성폭행을 당했다고 입증할 수 있는 ‘유전자 감식’ 증거가 없다. 더욱이 2005년 당시 담당 검사였던 브루스 캐스터는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코스비를 불기소 처분한 바 있다. 코스비 변호인단은 이번 기소를 결정한 스틸 검사의 ‘정치적 의도’까지 문제 삼는다. 대표 변호사인 모니크 프리슬리는 “이번 기소는 정의를 이루기 위한 게 아니라 선거공약을 완수하기 위한 것이다”라고 비판했다. 지난해 여름, 주 검사 선거 당시 스틸 후보가 코스비 관련 성 추문을 낱낱이 파헤치겠다는 공약을 내걸어 유권자들의 큰 지지를 얻었고, 덕분에 경쟁자인 캐스터 후보를 물리친 것을 두고 하는 얘기다.

다른 피해 여성의 증언 채택 여부가 핵심 변수

그렇다면 과연 어느 쪽이 승리할까? 법률 전문가들은 사건을 심리할 대배심의 배심원단을 어떻게 구성할지, 그리고 다른 피해 여성의 증언을 채택할지 여부가 핵심 변수라고 꼽는다.

당장 배심원단 구성부터 쉽지 않아 보인다. 원칙적으로 배심원들은 심리 사건에 대한 사전지식이 없어야 한다. 하지만 코스비 사건은 이미 알려질 대로 알려진 상태여서 편견 없는 배심원 후보를 찾기가 힘들다.

다른 피해 여성들을 증인으로 채택할 수 있을지도 불투명하다. 펜실베이니아 주법에 따르면, 본안 소송과 직접 관계없는 사람(예컨대 피해를 주장하는 다른 여성)의 증언은 피고인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어서 원천 금지돼 있다. 하지만 ‘약물 투입 뒤 성폭행’이란 범죄 유형이 되풀이되었다면 다른 피해 여성의 증언이 법정에서 허용될 수도 있다. 검사 측은 이 점을 십분 활용할 계획이다. 전직 검사인 배리 코번은 〈뉴욕 타임스〉에 “비슷한 피해를 본 여성들의 증언은 배심원단에 강력한 효과를 미칠 것”이라고 말했다. 같은 이유로, 코스비 변호인단은 다른 피해 여성들의 법정 증언을 기필코 막겠다는 방침이다.

이번 사건의 첫 심리는 1월14일 열린다. 최종 결과야 좀 더 두고 봐야겠지만 유죄가 확정되면 코스비는 5~10년 징역형을 살아야 한다. 이미 여론재판에서 완패한 코스비가 실제 법정에서도 패해 인생 말년을 철창 안에서 보내게 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기자명 워싱턴∙정재민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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