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10년차. 의도한 건 아닌데 매년 꼭 아홉 권씩 책을 번역했다. 올해도 마찬가지다. 김명남(사진) 번역가는 ‘행복한 책꽂이-올해의 번역가’ 후보에 몇 년째 이름을 올렸다. 최근 함께 일했던 한 편집자는 책의 참고문헌까지 모두 훑는 그의 성실함에 한 표를 보태고 싶다고 전했다. 소식을 알린 날, 마침 김씨의 생일이었다. 선물 같은 소식이라고 했다. 그녀에게 번역가는 ‘저자의 빠순이’다.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독자에게 한 권이라도 더 읽게 하는 데서 기쁨을 느낀다. 번역자의 구실이 단순히 책을 번역하는 데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는 동료 편집자들의 평가가 머리에 맴돌았다.

많은 출판인이 추천한 이유를 짐작하자면?
민망하다. 다른 분들은 조용히 작업만 하는 것 같은데 ‘트잉여’라 실명으로 SNS를 많이 해서 내 이름을 아는 것 같다(웃음).

과학 분야에서 독보적인 영역을 구축했다는 평가가 있다. 속도와 질을 장점으로 꼽기도 했다.
분야 덕을 봤다고 해야 하나. 문학 쪽은 워낙 많지만 과학책 번역하는 사람은 몇 안 되어 이름이 알려지게 되어 있다. 고마운 일이다. 번역 속도는 좀 빠른 것 같고, 미혼이고 혼자 살고 그러니까 가능한 일인 것 같다.

ⓒ시사IN 이명익김명남 번역가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도 그렇고 그림책 등 과학책 이외에도 영역이 넓어진 것 같다.
그림책은 조카가 생기니까 너무 해보고 싶었는데 재미있었다. 페미니즘 책은 전에도 한 권 번역했고 관심이 있었다. 책이 이렇게 화제가 될 줄 몰랐다. 과학책 번역할 때 가장 마음이 편하다고 주장하는데, 팩트 위주이고 공부만 열심히 하면 된다. 〈남자들은…〉은 평소 하던 것과 전혀 다른 문장이었다. 솔닛의 문장을 살리기 위해 공을 들였는데 건조한 것만 하다가 은유가 풍부한 걸 번역하니 정말 재미있었다. 사람들의 반응도 흥미로웠다. 내 개인의 인생이 펼쳐지면서 관심 있는 주제가 생기더라. 페미니즘도 그렇고, 마흔 살쯤 되니 노화에 관심이 생겨서 중년·노화와 관련된 것도 하고 싶다.

책 고르는 안목에 대한 칭찬도 있었다.
번역가가 돈 많이 벌지 못하는 직업인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인데, 마음에 안 맞는 책을 만나면 매우 괴롭다. 책 한 권에 최소한 두세 달 푹 빠져서 살아야 하는데 동조할 수 없으면 괴롭다. 경력이 쌓이면서 좋은 점은 시간 들이는 그 몇 달을 내가 고를 수 있다는 점이다.

일과는 어떤가? 집에서 작업한다고 들었다.
회사원일 때 여덟 시간 일했고 지금도 그렇게 정해놓았다. 주말에 쉬고 싶지만 그렇게는 잘 안 된다. 다행히 적성에 맞아서 침대에서 책상으로 출근하는데, 회사 다닐 때보다 지각도 안 한다. 번역가에게 뭐가 제일 중요하냐고 묻는다면 자기 관리다. 흥이 난다고 그 이상 하면 무리가 온다. 집필은 안 해봐서 모르지만 번역은 착상 떠올리는 게 아니라 해야 할 양이 정해져 있어서 엉덩이로 들인 시간만큼 (결과가) 나온다.

이력이 인상적이다. 카이스트 출신에 서울대 대학원, 일간지 기자, 인터넷 서점 편집장을 거쳤다.
과학을 전공했는데 중학교 때부터 번역가가 되고 싶어서 과학보다 영어 공부를 더 열심히 했다. 특수고에 가보고 싶어서 과학고에 갔고 대학 때는 화학 공부보다 과학사 공부를 열심히 했다. 과학사와 관련된 대학원을 지원했는데 떨어졌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제일 비슷할 것 같은 과를 찾았다. 그때부터 과학과 인문학을 잇는 것에 관심이 있었는데 대학원 나오니까 비슷한 게 뭔지 모르겠더라. 당시 2000년대 초 언론사 입사시험에서 상식·한문 과목이 없어졌다. 과학 기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일간지 문화부에서 책을 담당하다 보니까 기자가 아니라 책에 더 가까운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인터넷 서점이 생길 즈음인데 자리가 생겨서 옮겼다. 그때만 해도 MD가 출판사 프로모션에 부응해서 어떻게 책을 팔까 고민하기보다 소개를 잘 하면 팔리겠지 하고 막연히 생각하던 시절이라, 출근하면 그날 들어온 새 책을 읽고 소개를 썼다. 초창기 몇 년간 꿈의 직장이었다. 평소 같으면 보지 않았을 책들을 읽었고, 특히 자기계발서에 대한 편견이 깨졌다.

안정적인 직장을 그만두고 번역의 길로 접어들었다.
직장 생활을 하는 동안 선배의 추천으로 번역을 했는데 일과 병행하기 힘들더라. 계산해보니, 혼자 살고 다른 데 별로 취미가 없으니까(취미는 클래식 듣기, 추리소설 읽기라고 한다)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중학교 때부터 번역가가 꿈이 아니었다면 그렇게까지는 못했을 것 같다.

어릴 때부터 번역가를 꿈꿨다는 게 인상적이다.
책을 굉장히 좋아했다. 책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은데 도저히 쓰지는 못하겠더라. 내 한계를 일찍 알았다. 창조력이 조금도 없더라(웃음). 문학 읽으면서 김화영·이윤기같이 일류 번역가를 접했고 번역가라는 이름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걸 깨달았다. 마흔이 되면 해야겠다고 막연히 생각했다. 대학 때 번역 과정을 공부하기도 하고 자격증 시험도 봤다. 도움은 안 되었지만 관심이 계속 있었다.

번역의 매력은 뭔가?
책에서 뭔가 배울 수 있다는 게 제일 재미있는 것 같다. 한번 했던 주제의 책을 계속하면 편한데 재미가 없다. 번역가마다 다르지만 잘 쓰인 문장에 끌리거나 이야기가 너무 좋아서 하는 분들은 결말을 안 읽고 번역한다. 흥미가 떨어진다는 이유에서다. 내 경우 책 고르기 전부터 다 읽어보고 내용이 지적이고 마음에 들어야만 그 몇 달을 견딜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

본격적으로 공부하고 싶은 생각이 들 것 같다.
공부 안 하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학문은 한 분야에 대한 집요함, 성실성이 필요하다. 번역가는 성실성이 기본이지만 집요함보다는 박학다식에 끌리는 부류인 것 같다. 쓸데없는 지식을 너무 많이 알게 되는데 정말 쓸데가 없다(웃음). 다만 다음 책을 번역할 때 쓸모가 있게 된다. 과학책이라고 과학 얘기만 나오는 게 아니라 문화·야구 얘기도 나온다. 작가라면 피할 수 있지만 번역가는 피해 갈 수 없다. 책이 둘러싼 모든 문화에 대해 얕고 넓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

번역 이후 편집자의 역할은 어느 정도인가.
0%에서 100%인 것 같다. 가끔 번역한 그대로 교정이 되지 않은 채 책이 나오기도 하는데 잘했구나 싶어서 좋은 게 아니라 불안하다. 책은 함께 만들면 좋아진다. 편집자에 따라 과학책이라도 대중서나 실용서가 될 수도 있고, 어려운 책이 될 수도 있다. 편집자가 보는 매력, 내가 보는 매력이 다른데 많이 얘기해서 합하면 정말 좋아진다. 그런 과정 자체를 즐겨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그렇지 않으면 번역가의 삶이 의미 없다.

번역의 어려움이라면?
과학책에선 어려운 용어가 많이 쓰인다. 노승영 선생도 말했는데 번역가는 번역의 전문가지 과학의 전문가는 아니기 때문에 수학회, 물리학회 용어집이나 잡지를 참고한다. 우리말로 번역이 안 된 신조어를 만들기도 한다. 번역가는 원문의 구속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작업이라 한계가 있다. 학자들이 학문의 일환으로 번역한다면 우리는 직업인으로서, 출판인으로서 번역을 하는 사람들이다. 두 부류는 작업의 윤리나 프로토콜이 다른 것 같다. 출판 시장 상황이 좋지 않으면 번역가도 힘들 수밖에 없다. 시장이 어려워지면서 국내서보다 제작비가 많이 드는 번역서의 출간이 많이 줄었다. 얼마 전 한 재독 철학자의 책을 번역한 분이 인세를 크게 벌었다고 하는데 그런 성공 사례가 있어야 사람들이 힘을 내서 할 수 있다.

가장 고생했던 번역을 꼽자면?
(올해 출간된) 〈아인슈타인이 말합니다〉(위 사진)를 작업하며 고생을 많이 했다. 10년 하면서 웬만한 고생은 다 겪었다고 착각했다. 일단 아인슈타인은 독일어로 많이 말했는데 영어로 된 책이고 1600개의 명언이 담긴 책이다. 플롯이 없고 독자와 장소에 따라 전혀 맥락이 달랐다. 애들한테 말한 거면 애들 말투로, 나이 들어서 한 거면 노인의 말투로 해야 했다. 좋아하는 과학자이고, 쓴 책과 논문도 다 읽어봤으니까 쉬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계속해서 새로운 패턴의 어려움이 나타나는 게 (이 작업의) 재미라고 생각한다.

2015년은 개인적으로 어떤 해였나?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아래 사진)로 〈한국일보〉 한국출판문화상을 받았는데 그 시상식이 올해 초 있었다. 그리고 이 인터뷰로 마무리를 해서 올해를 매우 잘 산 것 같은 착각이 든다(웃음). 운이 좋은 해인 것 같다. 10년차이기도 하고 마침 마흔 살이기도 해서 내년엔 일을 쉬고 아예 다른 걸 해볼까 고민했는데 ‘아, 지금처럼 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지금 하는 일이 좋고 더 잘하고 싶다.

기자명 임지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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