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 스토리


국정교과서를 위한 무리수, ‘국가의 거짓말’


역사학자들이 안 쓰니 군인이 교과서 쓰나


교과서 집필진 비공개가 올바른가?

 

‘99.9%.’ 흰 바탕에 빨간색 숫자가 화면을 채웠다. 함께 등장한 문구는 이랬다. “전국 고등학교의 절대다수가 편향된 역사 교과서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11월3일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에서 대국민 담화에 나선 황교안 국무총리는 직접 15분 동안 프레젠테이션을 하며 검인정 교과서 공격의 최전방에 나섰다. 전국 고등학교 중 딱 3곳(0.1%)만 교학사 교과서를 선택했다며, 나머지 99.9%를 모두 편향이라 몰아붙였다. 2012년 대선 기간 내내 “100% 대한민국을 만들겠다”라던 박근혜 정부가 2015년 내놓은 담대한 ‘0.1% 대한민국’ 선언이었다.

‘담대함’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사실 왜곡도 서슴지 않았다. 황 총리는 기존 검인정 교과서의 문제점을 세세하게 지적했다. 가장 먼저 두산동아 역사 교과서 278쪽 하단을 캡처해 보여주며 “너무나도 분명한 6·25 전쟁의 책임마저 북한의 잘못이 아닐 수도 있다는 그릇된 생각을 갖게 할 우려가 있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를 두고 ‘교묘한 기술’이라고 지적하며, 검인정 교과서가 남침을 부인한다는 뉘앙스를 풍겼다. 제시한 자료는 ‘38도선을 경계로 잦은 충돌이 일어나다’라는 소제목으로,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이전 남북한 사이 많은 충돌이 있었다는 내용이다.

 

ⓒ시사IN 신선영 11월3일 황교안 총리는 대국민 담화에서 ‘고등학교 99.9%가 편향된 역사 교과서로 가르친다’고 말했다.

왜곡이다. 해당 페이지 전체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정부가 편집해 보여주지 않은 교과서의 바로 윗부분은 “김일성은 소련을 방문해 스탈린에게 무력 통일을 위한 군사적 지원을 약속받았다”라고 명시해놓았다. 곧이어 바로 다음 쪽에도 “1950년 6월25일 새벽 북한군은 38도선 전역에서 전면적인 공격을 시작했다. (…) 국제연합은 북한의 불법적인 남침을 침략 행위로 규정하고 한국에 군사 지원을 결의하였다”라고 적혀 있다. ‘북한의 남침’이라는 표현은 명징하게 279쪽에만 두 번, 280쪽에 한 번, 283쪽에 한 번 등 교과서 곳곳에 반복해서 쓰였다. 박근혜 정부가 현 검인정 교과서가 문제라며 대표 사례로 뽑아온 내용마저 앞뒤를 자르는 왜곡을 통해서만 위태롭게 지탱된다. 이 장면은 검인정 교과서의 편향이 아니라 정부 논리의 허약성을 폭로했다.

황 총리는 학교의 교과서 선택권이 원천 배제되어 있다며 “2014년 교학사 교과서를 채택한 20여 학교는 특정 집단의 인신공격, 협박 등 집요한 외압 앞에 결국 선택을 철회했다. 가장 교육적이어야 할 학교 현장이 반민주적·반사회적 행위에 무릎을 꿇었다”라고 말했다. 역시 사실과 거리가 있다. 당시 언론 보도를 종합해보면, 교학사 교과서 채택 철회는 ‘교학사 교과서 부실에 대한 해당 학교 학생·학부모의 반발’이 핵심이었다. 수원 동우여고에서는 교사의 양심선언까지 나왔다. 오히려 교과서 선정에 외압이 있었다는 고백이었다. 지난해 1월2일 〈한국일보〉는 교학사 교과서를 채택해 반발을 산 파주 운정고의 내부 사정을 한 관계자 멘트로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운정고 관계자는 ‘1%도 선택하지 않은 교과서를 꼭 선정해서 아이들에게 친일 등 왜곡된 역사관을 가르쳐야 하느냐’ ‘이 교과서로 공부했다가 수능에서 틀리면 어떡하느냐’는 등 학부모 비판이 많았다.”

11월4일 국사편찬위원회(국편) 기자회견. 김정배 국편 위원장은 신형식·최몽룡 명예교수만 집필진으로 공개했다(18~19쪽 기사 참조). 국편은 정부가 검인정 교과서에서 문제로 꼽는 근현대사 부분은 대표 집필자만 공개하고, 공개 시기도 집필 과정을 보면서 하겠다고 밝혔다. 집필진 비공개 원칙을 천명한 것인데, 이 역시 말 바꾸기다.

ⓒ연합뉴스2012년 10월11일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대선 후보는 국민 통합을 강조하며 ‘100% 대한민국’을 약속했다.

국정화 행정 예고일인 10월12일만 하더라도 집필진 공개가 원칙이었다. 김정배 국편위원장은 “모든 행정은 상당히 투명하게 이뤄질 것이다. 집필에 들어가면 그때는 (집필진이) 공개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기자회견 하루 전날인 11월3일 황우여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장관도 “집필부터 발행까지 교과서 개발의 전 과정을 투명하게 운영하겠다”라고 말한 바 있다. 주무장관의 말까지 하루 만에 뒤집힌다.

이뿐이 아니다. 김정배 국편위원장은 10월14일 “교학사 집필진은 배제하겠다”라고 했지만 11월4일에는 다른 말을 했다. 그는 “특정인을 거명해서 된다, 안 된다 그렇게는 말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박근혜 정부의 잦은 말 바꾸기와 혼선은 국정교과서를 진행해온 고비마다 거짓말을 한 게 아니냐는 의심을 사게 했다.

10월25일 불거진 교육부의 비밀 태스크포스(TF) 운영 의혹에 대한 해명 과정도 비슷했다. 교육부는 다음 날 오전만 하더라도 TF팀 존재를 인정했지만, 오후가 되자 TF팀은 없었다며 태도를 바꿨다. TF팀을 20여 일이나 몰래 운영한 사실을 감추려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왔다. TF팀은 행정자치부 장관과 사전 협의를 거쳐야 만들 수 있어서다.

교육부가 10월19일 방송에 내보낸 ‘유관순 광고’도 정부 왜곡의 대표 사례다. 광고 속 교복을 입은 한 학생이 “나는 당신(유관순)을 모릅니다”라고 말하자 자막으로 ‘유관순은 없었습니다’라는 문구가 나온다. 현행 교과서에 유관순에 대한 내용이 없어서 학생들이 역사를 제대로 배우지 못한다는 의미다. 광고 내용은 사실이 아니다. 올해 3월 보급된 고교 〈한국사〉 8종에는 모두 유관순 관련 내용이 있다.

정부발 왜곡과 오독이 넘쳐나는 와중에도 여론은 국정화 반대로 기우는 추세다. 11월6일 발표된 한국갤럽 여론조사는 역사 교과서 국정화에 대해 찬성이 36%, 반대가 53%였다. 17%포인트 차이다. 정당 지지층 외에 무당층에서도 반대가 훨씬 높았다(찬성 19%, 반대 67%). 무당층이 반대 의사를 분명히 한 것은 국정교과서 논쟁이 진영론에 갇혀 있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추세는 정부에 더 나쁜 신호를 보내고 있다. 국정화 방침 발표 직후인 10월13~15일 조사에서는 찬반 여론이 42%로 같았다. 일주일 뒤인 10월20~22일 조사에서는 찬성이 6%포인트 줄고 반대가 5%포인트 늘었다(찬성 36% 대 반대 47%). 이후 두 차례 조사에서도 반대 여론은 49%에서 53%로 계속 증가세인 반면 찬성은 36%에서 고착됐다.

국정화에 호의적이지 않은 여론 지형이 강화되면서 권력 핵심 인사들의 도를 넘어서는 ‘센 발언’이 쏟아지고 있다. 정부가 문제 삼는 교과서를 사용한다는 이유만으로 99.9%를 좌편향으로 몰아붙인 황교안 총리 발언이 대표적이다.

박 대통령의 측근으로 불리는 새누리당 이정현 의원은 10월26일 당 최고위원회에서 “교과서가 친북이거나 좌편향 내용이 있다면 바로잡혀야 한다. 올바른 교과서를 만들자는 취지에 반대하는 국민은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른바 ‘비국민론’이다. 국가와 박근혜 정권을 사실상 동일시하며, 정부 방침에 비판적인 사람을 ‘비국민’으로 밀어냈다.

ⓒ시사IN 조남진‘국정교과서 집필·개발 과정을 투명히 하겠다’던 황우여 장관(왼쪽)의 말은 뒤집혔다. 이정현 새누리당 의원은 도를 넘어선 발언을 쏟아냈다.

이틀 후 그는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 참석해 국정교과서를 반대하는 이들이 북한 주도의 적화통일을 준비한다는 취지의 발언도 했다. 이 의원은 국정교과서 반대론자를 가리켜 “언젠가는 적화통일이 될 것이고 북한 체제로 통일이 될 것이고, 그들의 세상이 됐을 때 남한 내에서 우리 어린이들에게 미리 그런 교육을 시키겠다는…”이라고 말하다 제지당했다.

국정화 관련해 ‘종북몰이’ 카드 내밀었으나…

전가의 보도인 종북몰이다. 박근혜 정권은 고비 때마다 종북몰이로 위기를 탈출해온 이력이 있지만, 이번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둘 있었다. 첫째, 통합진보당 사태와 같은 종북몰이 국면에서 박근혜 정권은 늘 상대를 소수파로 고립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번 여론 지형은 정권 자신이 소수파다. 다수 국민을 상대로 ‘종북’ 딱지를 붙이는 시도는 심지어 박근혜 정부의 국정 운영 패턴과도 충돌한다. 초조함이 읽히는 대목이다. 둘째, 통합진보당 해산이라는 정치적 ‘승리’가 역설적이게도 정권의 ‘좋은 타깃’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종북 딱지를 붙이고 싶어도 적당한 상대가 보이지 않는다. 새누리당은 교과서 정국 초기에 학생들이 주체사상 교육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현수막을 내걸었다가 망신만 당한 적도 있다.

정점은 박근혜 대통령이 찍었다. 박 대통령은 11월5일 청와대에서 열린 제6차 통일준비위원회 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통일을 앞두고 매우 중요한 것은 우리나라에 대한 강한 자긍심과 역사에 대한 뚜렷한 가치관이다. 이것이 선행되지 않으면 통일이 되기도 어렵고, 통일이 돼도 우리의 정신은 큰 혼란을 겪게 되고 중심을 잡지 못하는, 그래서 결국 사상적으로 지배를 받게 되는 기막힌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박 대통령이 직접 사용한 ‘사상적 지배’라는 단어는, 그동안 정부가 한사코 부인해오던 국정교과서에 대한 ‘사상통제 욕망’을 역으로 보여준다. 정부는 그동안 기존 검인정 교과서가 잘못되었으니 국정교과서로 갈 뿐이지, 그 해석은 학자들에게 맡기겠다고 누차 말해왔다. 하지만 역사의 사상적 지배 언급은 결국 ‘올바른 역사’에 대한 다른 해석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드러냈다.

총리는 교과서를 발췌 왜곡하고, 정부는 말을 바꾸고, 권부 핵심 인사는 다수 국민을 상대로 종북몰이를 하고, 대통령은 교과서를 사상 통일 문제로 보는 ‘전체주의’ 사고방식을 얼떨결에 고백한다. 국정화를 할 권한은 휘둘렀으되 명분과 여론에서 밀리는 불편한 상태가 정부·여당을 옥죄고 있다. 결과는 총체적인 ‘말의 파산’으로 드러났다.

ⓒ연합뉴스11월5일 통일준비위원회 제6차 회의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사상적 지배’라는 용어를 쓰며 역사 교과서 국정화에 대한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

 

 

 

기자명 김은지 기자 다른기사 보기 smi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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