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일가는 7월17일 삼성물산 주주총회에서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을 누르고 합병안(삼성물산+제일모직)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승계까지는 갈 길이 멀다. 또한 승계가 이뤄져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조부(이병철)와 부친처럼, 한국 경제사에 한 획을 긋는 업적을 남기기는 매우 힘들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경영 환경에 부닥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것은 ‘기업 경영에서 주주 권력의 획기적 강화’다. 그동안 삼성 일가는 계열사가 계열사를 소유하는 복잡한 지분 관계를 통해 그룹 지배권을 비교적 튼튼하게 유지해왔다. 이 ‘재벌’ 시스템에서는 설사 상당수 주주가 원한다 해도, 삼성 일가를 경영자 자리에서 내쫓을 수 없었다. 이 덕분에 이건희 회장은 다른 글로벌 기업들에 비해 훨씬 적은 돈을 주주에게 돌려주면서도 경영자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런 와중에 나타난 무서운 적이 바로 엘리엇이다. 엘리엇은 ‘기업의 주인’인 주주들의 이익을 높이라는, 어떻게 보면 지당하기 짝이 없는 주장을 내놓고 있다. 사실상 삼성 계열사들의 지주회사로 내정된 ‘합병 삼성물산’에서, 엘리엇은 2~3% 이상의 지분을 가진 유력 주주 지위를 당분간(혹은 한동안) 유지할 것이다. 큰 지분이 아닌 것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엘리엇처럼 유능한 헤지펀드이자 선동가라면, 그동안 ‘억압’당해온 주주들을 분기시켜 삼성 가문에 맞설 수 있다. 엘리엇은 시가총액(계열사 포함) 1000억 달러(약 110조원) 규모의 미국 대기업 EMC의 지분을 불과 2% 확보한 것으로 핵심 계열사의 분사를 압박하는 등 기업 전체를 뒤흔든 바 있다. 결국 엘리엇 측 인사를 EMC 이사회에 두 명이나 진입시킨, 대단히 실력 있는 벌처펀드다.
 

ⓒ시사IN 신선영7월17일 삼성물산 주주총회장에 모인 주주들. 엘리엇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날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안은 통과되었다.

삼성 가문으로서는 엘리엇에 약점을 고스란히 노출시킬 수밖에 없는 처지다. 승계에 성공하려면, 앞으로도 계열사 분할, 지분 매각 및 매입, 합병 등 넘어야 할 산이 무궁무진하다. 단계마다 주주들의 동의를 얻어내야 한다. 주요 계열사들의 주가 역시 안정적으로 유지되어야 한다. 핵심 중 핵심 계열사인 삼성전자에 대한 이건희 일가의 지배권도 위태롭다. 금산분리 관련 법률의 시행 일정 등을 감안하면, 앞으로 2~3년 내에 삼성생명은 삼성전자 지분 7.2%를 강제로 매각해야 할지도 모른다. 현재 이건희 일가의 삼성전자에 대한 영향력 가운데 절반이 날아간다.

일가로서는 어떻게든 주주들의 동의를 얻어내야 한다. 배당금이나 자사주 매입 등으로 이전보다 훨씬 많은 돈을 주주에게 배분해야 한다. 주주들의 기대 수준은 엘리엇의 ‘참전’ 이후 껑충 높아져 있다. 삼성물산은 이미 배당 성향을 크게 높이는 등 주주 친화 정책을 발표한 바 있다. 제일모직도 7월23일 이사회에서 자사주 250만 주(4400억원 규모)를 매입하겠다고 결정했다. 삼성이 이른바 ‘주주 가치 경영’을 회피할 수 없는 처지에 서게 된 것이다. 더욱이 선도 기업으로서 삼성의 경영 방향은 한국의 전체 기업에 큰 영향을 끼친다. ‘주주 가치 경영’의 시대가 한국에서도 본격 개화하는 것일까?

그러나 〈워싱턴 포스트〉(3월2일)에 따르면, 하필 이런 시기에 ‘주주 가치 경영’의 본산인 미국에서는 이에 대한 회의가 확산되고 있다. 주주 가치 경영은 심지어 ‘임금 정체’ ‘기술혁신 지체’, 궁극적으로는 ‘끝없는 불황’의 원흉으로 지목된다. 기업 경영진이 주주의 요구에 순응하다 보면, 단기적으로 주가를 올릴 수 있는 일만 하게 되기 때문이다.

단기적으로 주가를 올리는 가장 쉬운 방법은 해고나 임금 삭감, 분사 등을 통해 경영비용을 줄이는 것이다. 혹은 보유 자금을 설비투자나 노동자 훈련, 연구개발에 사용하기보다 배당 성향을 높이고 자사주를 대량 매입하면 주식 가치를 삽시간에 높일 수 있다. 문제는 이 같은 주주 가치 경영이 주주에겐 ‘빠르고 강한’ 기쁨을 주지만, 해당 기업의 장기적 발전에는 이롭지 않다는 것이다. 더욱이 주주들은 대체로 수익이 나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는 대규모 투자는 반기지 않는 성향을 지닌다.


기업의 이해관계자는 주주만이 아니다

직관적으로 봐도 뚜렷한 사실이다. 기업의 이해관계자는 주주만이 아니다. 노동자, 경영자, 소비자, 지역사회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가 있다. 이들은 협력해서 기업을 꾸려 나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기업의 수익에서 더 많은 몫을 차지하기 위해 다투는 관계이기도 하다. 주주의 몫이 커지는 것은 다른 이해관계자들의 몫이 줄어든다는 이야기와 다르지 않다.

최근에는 미국에서 ‘주주 가치 경영과 불황 간의 관계’를 실증한 논문들도 나오고 있다. 루스벨트 연구소가 지난 2월 발간한 논문 〈기업 대출과 투자 간의 연관성이 사라진다〉가 대표적이다. 저자 중 하나인 메이슨 교수(뉴욕 대)에 따르면, 미국 기업들이 최근 돈을 빌리는 주된 이유는 새로운 프로젝트에 대한 투자가 아니라 주주들을 위한 배당금이나 자사주 매입을 위한 것이다. 주식시장이 기업에 자금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기업이 주식시장에 자금을 제공하는 기묘한 현상이다.

지난해 10월 발표된 륭크비스트 교수(뉴욕 대)의 논문 〈기업 투자와 주식시장 상장:하나의 수수께끼〉에 따르면, 주주의 영향을 크게 받는 상장 기업보다 개인 기업(privately held firm:오너가 외부 간섭 없이 경영 방침을 설정)의 투자 성향이 훨씬 높다. 개인 기업이 매년 총자산의 10%를 투자하는 반면 상장 기업의 그것은 4%에 불과하다. 한마디로 주주 가치 경영이 기업의 투자 성향을 저해해 만성적 불황을 초래한다는 이야기다.

미국 민주당은 내년 대통령 선거의 주요 이슈로 ‘주주 가치 경영’을 비판할 전망이다. 민주당 관련 싱크탱크인 미국진보센터(CAP)가 지난 1월 낸 보고서는, 중산층과 빈곤층의 생활수준을 개선하기 위한 과제 중 하나로 주주 가치 경영의 개혁을 요구하고 있다. 그 대안 중 하나는 기업의 경영 방침에 대한 노동자들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이다. 주주들은 주식을 팔고 나가면 그만이지만 노동자들은 자신이 일하는 기업이 오랫동안 번영하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

삼성은 정치인·법조인·언론인 등 매수하기, 주식시장 제도의 틈새를 활용한 3세 지분 늘리기, 반도체 노동자 백혈병 사태 같은 사회적 범죄를 거듭 일으켜왔다. 그러나 삼성은 적어도 대규모 장기 투자에서는 다른 글로벌 기업이 따라잡기 힘든 존재다. 삼성이 2000년대 후반 갤럭시 시리즈로 대박을 칠 수 있었던 것은 1990년대 초·중반에 이미 LCD 패널, 플래시메모리, 2차 전지 등에 수조원씩 투자했기 때문이다. 다른 글로벌 기업 경영진이 이런 제품들의 시장 전망을 몰랐던 것이 아니다. 그들이 투자하지 않은 이유는 주주들에게 위험하고 불투명하며 수익을 내기까지 오래 걸리는 대규모 투자를 설득할 수 없어서였다.

주주 가치 경영의 본격화는 ‘삼성식 경영’의 황금기가 지나감을 의미한다. 총수 일가가 독점하던 경영에 주주들의 요구를 대폭 반영하게 되었으므로, 이른바 반(反)기득권 ‘경제 민주화’의 실현이기도 하다. 삼성물산 주총을 앞두고 삼성 측과 보수 언론들은 갑자기 애국심을 부르짖으며 엘리엇을 투기자본, 국부 유출자 등으로 공격했다. 주총이 끝나자 이번엔 이른바 경제 민주화 진영과 진보 성향 언론들이 ‘재벌 사랑이 애국이냐’며 역공을 퍼붓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봤듯이 삼성 같은 거대 기업집단의 지배구조가 바뀌는 것은 애국심의 문제가 아니다. 고용과 기술 발전, 그리고 금융과 산업 간의 건전한 자금 순환에 대한 문제다.

기자명 이종태 기자 다른기사 보기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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